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패러다임, 혹은 의사소통

패러다임, 혹은 의사소통

편집부 다용도

교과서적으로 익히게 되는 과학사, 혹은 과학혁명.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 이야기를 듣고서, 지동설을 주장하기 전에 주류적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계 이론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구도 없을뿐더러 옛날 사람이라 그렇지.. 했다. 그리고 지구가 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회가 지금의 관점에서는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요즘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17세기 자연철학자들이나, 당시의 상황들을 꽤 구체적으로 떠올리면서 과학사에 대한 이해일지 오해일지 암튼 그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 이번에 읽기 시작한 『새 물리학의 태동』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계 이야기가 나오는데...
 
프톨레미는 우주의 체계가 이렇다고 주장하기보다는 가능한 여러 가지 모델들을 제시하고 이 모델들을 통하여 다른 천문학자들이 구체적인 천체의 궤도들을 찾아낼 수 있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간혹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접근 방식은 20세기의 이론 물리학자들의 방식과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즉 20세기의 이론 물리학자들의 방식은 언제나 하나의 모델을 설정하고 그 모델로부터 논리적 결과로 유도된 방정식이 관측 결과와 잘 일치하도록 그들의 모델을 계속 개선해 나가 결국에는 관측 결과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법칙으로 정리해 내는 것이었는데……

─버나드 코헨,『새 물리학의 태동』, 36쪽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계가 그렇게 오랫동안 정론으로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론이 워낙 융통성이 있어서 실제 관측 결과와 잘 맞기도 하였고, 또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체계와 썩 잘 어울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계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새로운 역학체계가 필요하지도 않았다는 말.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그 이후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무지와 비합리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 나름의 합리성 때문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왼쪽이 프톨레마이오스의 구조, 오른쪽이 코페르니쿠스의 구조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중심에 있던 지구와 달을 태양과 자리를 바꾸어서 태양이 우주의 중심으로 오게 했고, 항성천구의 1일 1회전의 운동을 없앤 것 뿐이다.

 
혁명이라는 분수령을 가로지를 수 있는 의사소통이란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회전한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그를 돌았다고 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단순히 틀렸거나 또는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지구'라는 것으로 의미했던 것에는 이미 고정된 위치라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었다. 적어도 그들의 지구는 움직일 수 없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가 일으킨 혁신은 단순히 지구를 움직이게 한 것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물리학과 천문학의 문제들에 접근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었고, 필연적으로 '지구'와 '운동'의 의미를 둘 다 바꾸어 버렸다.

─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214쪽

쿤에 따르면 경쟁하는 패러다임은 상호간에 의사소통이 부분적으로밖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 등장한 패러다임에 속한 과학자집단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같은 방향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본다. 이 각각의 집단은 일부러 상대가 주장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내키는 대로 보고 싶은 걸 보는 것도 아니다. 양쪽이 모두 세계를 바라보고 있고, 그들이 보는 대상은 변하지 않았으나 어떤 영역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서로 다른 '관계'에서 그것들을 본다. 이들 사이에 충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려면 한쪽 그룹이 '패러다임 시프트'라고 하는 '개종'을 거쳐야만 한다. 다윈은 그의 『종의 기원』의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나는 이 책에서 제시된 견해들이 진리임을 확신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나의 견해와 정반대의 관점에서 보아 왔던 다수의 사실들로 머릿속에 꽉 채워진 노련한 자연사학자들이 이것을 믿어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본다. 편견없이 이 문제의 양면을 보두 볼 수 있을 젊은 신진 자연사학자들에게 기대를 건다.

나는 보지만 상대는 보지 못하는 것, 혹은 상대는 보지만 나는 보지 못하는 것. 쿤 식으로 하자면 패러다임은 오로지 과학에만 있는 것이지만, (패러다임이 스물두 가지 다른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는데, 한두 개 추가되어도 별 차이 있겠나.. 하는 심정으로..) 어쩌면 사람들 사이의 불통,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리감,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 그것들이 패러다임 탓일지도 모르겠다. 똑같은 '산소'를 발견하고 각각 다른 것으로 본 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처럼, 우리는 같은 대상을 보면서도 각자가 가진 체계로만 그 정도를 인식한다. 그로 인해 정서가 달라진다. 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한 과학자는 해석자이기보다는 차라리 거꾸로 보이는 렌즈를 낀 사람과 비슷"(『과학혁명의 구조』, 177쪽)하다고 했다.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상대를 만나면 우리 사이에 어느 정도의 의견차가 있는 게 아니라 정말 다른 인식체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게 몸으로 실감되는 요즘. 상대가 거꾸로 보이는 렌즈를 바꿔 끼거나, 내가 렌즈를 바꿔 끼지 않는 한 우리 사이에 의사소통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개종'으로서의 패러다임 시프트 아닌, 다른 방식의 해결은 과연 있는 걸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레메디오스 바로, <세 가지 운명>
_ 다른 공간에 있는 세 사람, 하지만 하늘에 있는 별과 세 사람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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