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글, 리좀
ㅡ<나무와 리좀> 편 ②
ㅡ<나무와 리좀> 편 ②
김해완(남산강학원 Q&?)
『천 개의 고원』 첫 고갯길에서, 나는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식물과 마주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첫장부터 새로운 사유, 새로운 글쓰기, 새로운 존재양식을 선언했다. 리좀(rhizome)! 그것은 뿌리줄기식물을 뜻한다. 고구마밭을 떠올려 보자. 고구마가 한창 물올랐을 때에는 어디까지가 이 고랑이고 저 고랑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줄기들이 중심 없이 사방팔방 아무 곳에나 뿌리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뿌리줄기들은 하나에서 수만 개로 갈라지거나 결국엔 모두가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게 리좀이다. 리좀은 나무와 질적으로 다르다. 하나의 뿌리에 얽매이지 않고 어떠한 지점과도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의 핵심개념으로 이들을 지목함으로써, 이 소박한 식물(고구마, 연근, 참마…^^)은 단번에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저번 편에서 ‘나무’를 보았으니, 이번 편에서는 ‘리좀’을 본다. 나무로 멈춰 있었던 일상이 리좀으로 전환되는 그 지점을 순간포착(!) 한다.
리좀이 작동하는 원리
그런데 이 희한한 개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이는 걸까? 정말로 고구마 같은 것(?)이 나무로부터 도주할 수 있는 건지, 의심도 든다. 하지만 구체적인 이미지에서 추상적인 개념의 차원으로 도약하는 순간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리좀(rhizome), 세상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겉으로 보기에 많은 것들이 따로 따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너, 남-녀, 인간-짐승, 지식인-노동자, 히틀러-대중, 혹은 서로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모든 것들…) 그러나 저 땅 밑에서는 리좀이 사방팔방으로 줄기를 뻗치고 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들 사이에도 무언가가 흘러 다니며 그 사이의 거리 또한 끊임없이 좁혀졌다 멀어졌다 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고구마밭처럼,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세계는 구조적으로 짜인 건축물이 아니라 수많은 흐름들이 뒤엉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전체다.
이거 혹시 막 나가는 해체주의가 아닌가? ‘나’도 ‘너’도 ‘세상’도 그냥 막 흐트러뜨리기만 하는? 그렇지 않다. 리좀은 구조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신 ‘배치’라는 새로운 개념과 조우한다. 배치는 쉽게 말하면 열린 구조이다.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졌으며, 일정한 틀을 유지하지만 언제든지 외부와 교류가능하다. 현실적인 예시를 드는 것은 쉽다. 우리의 몸. 피부란 아주 미세한 구멍들의 집합이다. 따라서 그것은 나를 외부와 차단시켜 주는 경계가 아니라 외부와 내가 끊임없이 뒤섞이게 해주는 막이다. 바람이 나를 향해 불어올 때 그것은 실제로 내 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위장 또한 하루에도 몇 번씩 타자의 죽음과 나의 생명을 뒤섞는다. 내 몸 구석구석에는 세균들, 기생충들, 미생물들이 (무려!) 1.3kg이나 차지한 채로 살고 있다. ‘김해완’이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열심히 아미노산을 합성하면서 일평생을 살다가는 ‘단백질’이나 ‘비듬’도 있다. 몸 자체가 배치인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은 타자들로 득실거린다. 나의 행위 속에는 내가 모르는 타자들이 함께 한다. 내가 뭔가를 한다는 것은 늘 타자와 마주치는 것이다. 이 ‘타자’는 내가 평소 의식하고 만나는 사람들 외에도, 내가 모르는 수많은 타자들까지도 포함한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생뚱맞은 사건이 폭격처럼 나를 덮쳤다고 치자. 그 사건은 나 이외의 타자들이 미리 만들어놓은 관계망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 타자들과 관계망을 맺으면서 살아왔다.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삶 자체가 말이다. 이렇게, 삶이란 관계들의 총합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때 ‘총합’은 양적인 것이 아니다. SNS 팔로워가 아무리 몇 만이더라도 내 삶이 몇만 배 더 풍요로운 것은 아니듯이. ‘관계’를 수적으로 환원하는 태도는 그것을 단순히 A와 B를 연결해 주는 끈(AㅡB)으로만 사고할 때 나타난다. 그러나 오히려 있는 것은 그 둘의 사이(AㅡB)뿐이다. A와 B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그 둘 사이에 흐르는 관계가 전부인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타자는 이미 ‘내’ 안에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다른 것이 됨으로써 너와 관계를 맺는다. 인디언들의 표현을 빌리면 “나는 너다”인 셈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써왔던 ‘타자’라는 말도 사실은 적확한 표현이 아니다^^;) ‘나’는 판 위에서 교차하고 치고 빠지는 수많은 선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혹은 끊임없이 운동하는 이 모든 선들이 그 자체로 ‘나’가 된다. 그렇기에 나는 내 삶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내 삶이 내 것은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기에 딱 들어맞는 개념을 제시한다. 다양, 그 자체를 “실사實辭”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다양체(Multiplicity)다. 손과 발, 뼈와 살이 다르다는 차원에서의 다양함이 아니다. 이미 그 자체로 ‘다양’이라는 뜻에서의 다양체다. 다양체를 이해하는 첫걸음은, 무언가를 단일한 실체로 보지 않는 데에 있다. 그것은 사실 ‘상想’일 뿐이다. 특정한 상(표상/언어/이미지)을 치워 버릴 때 우리는 그 밑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수많은 뿌리줄기들을 보게 된다. 내가 곧 서식지이고 배치라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그 뿌리줄기들이 곧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것들이 내 위에서 벌이는 여러 ‘운동’들이 바로 나의 구체적인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고로, 다양체를 만드는 둘째 걸음은 n-1이 되어야 한다. n개의 결정요인을 가지되 늘 n-1에 서있을 것. 내 위에서 벅적거리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느끼되, 다른 모든 결정요인들을 종속시켜 버릴 ‘1(Unique)’만은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나무형 '삶'에 대항할 만한 새로운 존재양식이다. 나무의 동일성은 리좀 앞에서 와해된다(!). 주체는 외부와 끊임없이 연결접속하는 기계이며, 세상은 끝없는 흐름이 교차하는 판이며, 삶은 나의 계열과 또 다른 계열이 부딪히면서 벌어지는 폭발의 연속이다. ‘살아간다’는 동사는 무슨 뜻인가. 내(A)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외부와 소통하면서 끊임없이 차이화하는 ‘dA’(미분)만 있을 뿐이다. 내 안에 외부가 우글거린다는 것은 곧 내가 계속해서 새로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리좀은 우리가 수많은 것들과 이미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이질적인 것들과 ‘접속’한다는 것도 보여 준다. 연결접속(connection). 멈추지 않고 차이를 만들어 내야지만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다. 사실 진짜로 그렇다! 매번 똑같은 상태만 동일하게 반복한다면 그것은 숨 쉬고 영양분을 보충하는 식물인간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삶이란 고정된 캔버스의 풍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운동이다. 한 번도 멈춘 적 없었고, 심지어 죽음이라는 것 이후에도 계속될 절대적 운동이다. 리좀, 그것은 모든 것이 살아 있다는 선언이며, '삶'이 아닌 ‘살아 있음’에 대한 철학적 고찰인 것이다. 이러한 ‘살아있음’의 역동성은 '삶'의 딱딱함과 확연히 대비된다. 나무형 '삶'은 어떤 식으로든 '통일성'을 만들어 낸다. 그 틀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선재하는 기호체계와 표준적 얼굴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 꼬리표를 내면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예속한다.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역량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결핍도 없이 나무로부터 벗어난다. 리좀이 나무보다 생명력이 훨씬 더 월등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사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리좀과 나무를 늘 함께 만난다. 리좀과 나무는 실체가 아니라 각각의 ‘유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칼로 무 자르듯 두 영역으로 나눠지지 않고 서로를 통과하면서 복잡하게 현실화된다(도주선이 굳어서 다시 나무가 되기도 하고 나무에서 다시금 리좀이 뻗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무언가를 생성해내는 힘은 오직 리좀에게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무에 있을 때조차도) 늘 리좀줄기를 놓지 말아야 한다. '삶'의 틀거리를 벗어나 ‘살아 있음’을 감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의 역량’이기 때문이다.
리좀, 살아 있다는 선언
무기는 장전되었다. 이제 떠들고, 써대고, 새롭게 읽는 일만 남았다. 굿바이, 오랫동안 내 ‘삶’을 두고 ‘간을 보던’ 낡은 담론들이여! 내 주소지는 살벌한 정글도, 따뜻한 온실도, 부모-그늘 밑도 아니다. ‘세상’은 어디 따로 있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바로 나의 삶 자체이다. ‘삶’이라고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그 위에서 벅적거리고 있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들린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 시공간의 배치를 몸에다 새겨 넣는다. 나의 배움의 터전은 남산강학원이다. 그래서 나의 언어는 이곳의 사유와 어법과 분리되지 않는다. 나의 할머니는 건물청소부다. 그래서 광주시청 용역청소부들의 행진은 내 할머니들의 행진이다. 나의 모교는 대안학교였다. 그래서 나는 ‘진보적인’ 교육 속에서 자랐고 동시에 ‘진보’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도 함께 버렸다. 나의 세상은 한 발짝씩 확장되고, 이것 외에 다른 세상은 없다. 세상은 이미 주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결정되어 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나는 분명 대학과 경쟁과 소비만을 무책임하게 부추기는 꽤 괴로운 시대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게 우리를 멈추게 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얼마든지 틈새시장(?)을 공략할 수 있고, 튈 수 있고, 중간에서 시작할 수 있다. 거대한 나무-시스템 위에서도 뻗어나가는 리좀처럼.
무엇이 ‘되어야 한다’ 혹은 ‘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을 ‘삶’으로 환원하지 말라. 무엇을 하든, 어디서 살든, 그것은 다 삶이다. 삶이라는 사본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저렇게 그리는 지도 자체가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은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고 나온 부채다” 따위의 말들에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또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무기력해지거나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의의’가 아니라 ‘욕망’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차이화하는 힘’으로 정의했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나를 살게 하는 그 생기(生氣)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나의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길이 아니라 트랙일 뿐이다. 삶이 하나의 길이라면 거기에는 하나의 종착역도 시발점도 없을 것이다. 길은 내가 확장되고, 깨지고, 수많은 것들로 우글거리게 하는 ‘중간’이다.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고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거나 끝내지 않는 것이다. 삶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무 상관없어지는 지점은 오직 그 사이 뿐이다. 물론, 가다보면 의지가 꺾이거나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는 날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이 처음이므로 미숙할 수 있다. 하지만 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때조차 우리는 욕망하고 있다. 우리는 걸어가는 그 위에서 공부하게 될 것이다. 어느 욕망이 날 살리고 죽이는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욕망의 회로를 구성해야 하는지.
나의 젊음에게, 또한 나와 같은 시대를 통과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리좀적 사유가 몹시 필요하다고 느낀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모든 게 손에 쥐어져 있었던 우리는 자본주의의 세례를 그대로 받았다. ‘자본’은 교묘하게 나무형 삶을 강요한다. 그것은 리좀처럼 세계 모든 구석구석에 손길을 뻗치지만, 우리의 시야를 협소하게 하고 오직 자본에로만 종속시킨다는 점을 볼 때 무서운 신종-나무다. 자본은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고 대신 그만큼의 불안 속으로 떠민다. 하지만, 구제역으로 매장당하는 수만 마리의 돼지와 소를 보면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면 과연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것의 화려함에 나의 생(生)을 걸어서도 내주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해야 한다.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낀다면 우리는 삶에 대한 쓸데없는 망상으로 불안해하지는 않을 것이고, 자본에 의지하지 않고도 충만해질 수 있을 것이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절망의 벽이 나의 삶이라면 그 벽을 푸르게 덮는 것은 수천 개의 다른 잎들이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 아니므로 나와 다른 것들과 접속하면 접속할수록 나의 삶은 생생해질 것이다. 청춘의 열정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갈구하는 힘이며 또한 그것처럼 자연스럽고 충만한 것은 없다. 그리고 나는 나의 젊음에, 이 未-완성에 감사한다. 내 나이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또 아무리 ‘삶’을 말해도 그것이 진부해지지 않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무형 책에서 시작했으니 리좀적 글로 앞으로를 말하려고 한다. 이제 남은 일은 ‘삶의 새로운 서사’를 직접 쓰는 것뿐이므로(^^). 들뢰즈와 가타리도 해석하기보다는 용법을 발명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글은 참 좋은 무기다. 글은 우리를 재단하는 선분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다양체이기도 하다. 공부를 하는 나의 삶에 진심으로 감사할 때가 있다면, 책을 읽다가 나와 타자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는 순간순간들 그리고 내 글이 우글거리는 하나의 서식지가 되었음을 볼 때이다. 글은 내가 머물 수 있는 최소한의 영토이자 내가 만날 수 있는 최대한의 ‘접속’이다. “나는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살아 있으며, 또 살아 있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통해서 만나게 될 수많은 책들과, 글로서 펼쳐질 또 다른 세계를 기대한다. 그러다 보면 함께 공부하고 부대낄 친구들이 찾아와 그들과도 ‘접속’하게 되지 않을까? 그 또한 기대한다. 친구를 만나는 여정,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것, 매일매일 공부하고 글을 쓰는 것은 나에게는 분리되지 않는다. 10년 뒤에 정규직으로 찾아올 장밋빛 미래보다는 순간에 몰입하는 지금-여기의 ‘살아 있음’이 내게는 훨씬 더 매력적이다.
나는 바로 이 여정에 대해서 글을 쓰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이 글쓰기 자체가 여정이 될 것이다. 섣부르게 ‘삶’에 대해서 규정하기보다는 느리더라도 사유에 균열이 가는 순간순간을 포착해 가고자 한다. 나 또한 글이 다양체라는 것을 믿으므로, 내가 ‘살아 있음’을 찾는 이 과정이 또한 누군가에게 낯선 고원과 접속하는 기회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저번 편에서 ‘나무’를 보았으니, 이번 편에서는 ‘리좀’을 본다. 나무로 멈춰 있었던 일상이 리좀으로 전환되는 그 지점을 순간포착(!) 한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30쪽
리좀이 작동하는 원리
그런데 이 희한한 개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이는 걸까? 정말로 고구마 같은 것(?)이 나무로부터 도주할 수 있는 건지, 의심도 든다. 하지만 구체적인 이미지에서 추상적인 개념의 차원으로 도약하는 순간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리좀(rhizome), 세상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겉으로 보기에 많은 것들이 따로 따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너, 남-녀, 인간-짐승, 지식인-노동자, 히틀러-대중, 혹은 서로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모든 것들…) 그러나 저 땅 밑에서는 리좀이 사방팔방으로 줄기를 뻗치고 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들 사이에도 무언가가 흘러 다니며 그 사이의 거리 또한 끊임없이 좁혀졌다 멀어졌다 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고구마밭처럼,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세계는 구조적으로 짜인 건축물이 아니라 수많은 흐름들이 뒤엉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전체다.
이거 혹시 막 나가는 해체주의가 아닌가? ‘나’도 ‘너’도 ‘세상’도 그냥 막 흐트러뜨리기만 하는? 그렇지 않다. 리좀은 구조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신 ‘배치’라는 새로운 개념과 조우한다. 배치는 쉽게 말하면 열린 구조이다.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졌으며, 일정한 틀을 유지하지만 언제든지 외부와 교류가능하다. 현실적인 예시를 드는 것은 쉽다. 우리의 몸. 피부란 아주 미세한 구멍들의 집합이다. 따라서 그것은 나를 외부와 차단시켜 주는 경계가 아니라 외부와 내가 끊임없이 뒤섞이게 해주는 막이다. 바람이 나를 향해 불어올 때 그것은 실제로 내 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위장 또한 하루에도 몇 번씩 타자의 죽음과 나의 생명을 뒤섞는다. 내 몸 구석구석에는 세균들, 기생충들, 미생물들이 (무려!) 1.3kg이나 차지한 채로 살고 있다. ‘김해완’이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열심히 아미노산을 합성하면서 일평생을 살다가는 ‘단백질’이나 ‘비듬’도 있다. 몸 자체가 배치인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은 타자들로 득실거린다. 나의 행위 속에는 내가 모르는 타자들이 함께 한다. 내가 뭔가를 한다는 것은 늘 타자와 마주치는 것이다. 이 ‘타자’는 내가 평소 의식하고 만나는 사람들 외에도, 내가 모르는 수많은 타자들까지도 포함한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생뚱맞은 사건이 폭격처럼 나를 덮쳤다고 치자. 그 사건은 나 이외의 타자들이 미리 만들어놓은 관계망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 타자들과 관계망을 맺으면서 살아왔다.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삶 자체가 말이다. 이렇게, 삶이란 관계들의 총합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때 ‘총합’은 양적인 것이 아니다. SNS 팔로워가 아무리 몇 만이더라도 내 삶이 몇만 배 더 풍요로운 것은 아니듯이. ‘관계’를 수적으로 환원하는 태도는 그것을 단순히 A와 B를 연결해 주는 끈(AㅡB)으로만 사고할 때 나타난다. 그러나 오히려 있는 것은 그 둘의 사이(AㅡB)뿐이다. A와 B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그 둘 사이에 흐르는 관계가 전부인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타자는 이미 ‘내’ 안에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다른 것이 됨으로써 너와 관계를 맺는다. 인디언들의 표현을 빌리면 “나는 너다”인 셈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써왔던 ‘타자’라는 말도 사실은 적확한 표현이 아니다^^;) ‘나’는 판 위에서 교차하고 치고 빠지는 수많은 선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혹은 끊임없이 운동하는 이 모든 선들이 그 자체로 ‘나’가 된다. 그렇기에 나는 내 삶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내 삶이 내 것은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기에 딱 들어맞는 개념을 제시한다. 다양, 그 자체를 “실사實辭”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다양체(Multiplicity)다. 손과 발, 뼈와 살이 다르다는 차원에서의 다양함이 아니다. 이미 그 자체로 ‘다양’이라는 뜻에서의 다양체다. 다양체를 이해하는 첫걸음은, 무언가를 단일한 실체로 보지 않는 데에 있다. 그것은 사실 ‘상想’일 뿐이다. 특정한 상(표상/언어/이미지)을 치워 버릴 때 우리는 그 밑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수많은 뿌리줄기들을 보게 된다. 내가 곧 서식지이고 배치라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그 뿌리줄기들이 곧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것들이 내 위에서 벌이는 여러 ‘운동’들이 바로 나의 구체적인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고로, 다양체를 만드는 둘째 걸음은 n-1이 되어야 한다. n개의 결정요인을 가지되 늘 n-1에 서있을 것. 내 위에서 벅적거리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느끼되, 다른 모든 결정요인들을 종속시켜 버릴 ‘1(Unique)’만은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나무형 '삶'에 대항할 만한 새로운 존재양식이다. 나무의 동일성은 리좀 앞에서 와해된다(!). 주체는 외부와 끊임없이 연결접속하는 기계이며, 세상은 끝없는 흐름이 교차하는 판이며, 삶은 나의 계열과 또 다른 계열이 부딪히면서 벌어지는 폭발의 연속이다. ‘살아간다’는 동사는 무슨 뜻인가. 내(A)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외부와 소통하면서 끊임없이 차이화하는 ‘dA’(미분)만 있을 뿐이다. 내 안에 외부가 우글거린다는 것은 곧 내가 계속해서 새로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리좀은 우리가 수많은 것들과 이미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이질적인 것들과 ‘접속’한다는 것도 보여 준다. 연결접속(connection). 멈추지 않고 차이를 만들어 내야지만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다. 사실 진짜로 그렇다! 매번 똑같은 상태만 동일하게 반복한다면 그것은 숨 쉬고 영양분을 보충하는 식물인간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삶이란 고정된 캔버스의 풍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운동이다. 한 번도 멈춘 적 없었고, 심지어 죽음이라는 것 이후에도 계속될 절대적 운동이다. 리좀, 그것은 모든 것이 살아 있다는 선언이며, '삶'이 아닌 ‘살아 있음’에 대한 철학적 고찰인 것이다. 이러한 ‘살아있음’의 역동성은 '삶'의 딱딱함과 확연히 대비된다. 나무형 '삶'은 어떤 식으로든 '통일성'을 만들어 낸다. 그 틀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선재하는 기호체계와 표준적 얼굴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 꼬리표를 내면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예속한다.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54쪽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역량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결핍도 없이 나무로부터 벗어난다. 리좀이 나무보다 생명력이 훨씬 더 월등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사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리좀과 나무를 늘 함께 만난다. 리좀과 나무는 실체가 아니라 각각의 ‘유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칼로 무 자르듯 두 영역으로 나눠지지 않고 서로를 통과하면서 복잡하게 현실화된다(도주선이 굳어서 다시 나무가 되기도 하고 나무에서 다시금 리좀이 뻗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무언가를 생성해내는 힘은 오직 리좀에게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무에 있을 때조차도) 늘 리좀줄기를 놓지 말아야 한다. '삶'의 틀거리를 벗어나 ‘살아 있음’을 감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의 역량’이기 때문이다.
리좀, 살아 있다는 선언
무기는 장전되었다. 이제 떠들고, 써대고, 새롭게 읽는 일만 남았다. 굿바이, 오랫동안 내 ‘삶’을 두고 ‘간을 보던’ 낡은 담론들이여! 내 주소지는 살벌한 정글도, 따뜻한 온실도, 부모-그늘 밑도 아니다. ‘세상’은 어디 따로 있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바로 나의 삶 자체이다. ‘삶’이라고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그 위에서 벅적거리고 있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들린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 시공간의 배치를 몸에다 새겨 넣는다. 나의 배움의 터전은 남산강학원이다. 그래서 나의 언어는 이곳의 사유와 어법과 분리되지 않는다. 나의 할머니는 건물청소부다. 그래서 광주시청 용역청소부들의 행진은 내 할머니들의 행진이다. 나의 모교는 대안학교였다. 그래서 나는 ‘진보적인’ 교육 속에서 자랐고 동시에 ‘진보’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도 함께 버렸다. 나의 세상은 한 발짝씩 확장되고, 이것 외에 다른 세상은 없다. 세상은 이미 주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결정되어 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나는 분명 대학과 경쟁과 소비만을 무책임하게 부추기는 꽤 괴로운 시대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게 우리를 멈추게 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얼마든지 틈새시장(?)을 공략할 수 있고, 튈 수 있고, 중간에서 시작할 수 있다. 거대한 나무-시스템 위에서도 뻗어나가는 리좀처럼.
무엇이 ‘되어야 한다’ 혹은 ‘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을 ‘삶’으로 환원하지 말라. 무엇을 하든, 어디서 살든, 그것은 다 삶이다. 삶이라는 사본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저렇게 그리는 지도 자체가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은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고 나온 부채다” 따위의 말들에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또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무기력해지거나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의의’가 아니라 ‘욕망’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차이화하는 힘’으로 정의했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나를 살게 하는 그 생기(生氣)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나의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길이 아니라 트랙일 뿐이다. 삶이 하나의 길이라면 거기에는 하나의 종착역도 시발점도 없을 것이다. 길은 내가 확장되고, 깨지고, 수많은 것들로 우글거리게 하는 ‘중간’이다.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고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거나 끝내지 않는 것이다. 삶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무 상관없어지는 지점은 오직 그 사이 뿐이다. 물론, 가다보면 의지가 꺾이거나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는 날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이 처음이므로 미숙할 수 있다. 하지만 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때조차 우리는 욕망하고 있다. 우리는 걸어가는 그 위에서 공부하게 될 것이다. 어느 욕망이 날 살리고 죽이는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욕망의 회로를 구성해야 하는지.
나의 젊음에게, 또한 나와 같은 시대를 통과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리좀적 사유가 몹시 필요하다고 느낀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모든 게 손에 쥐어져 있었던 우리는 자본주의의 세례를 그대로 받았다. ‘자본’은 교묘하게 나무형 삶을 강요한다. 그것은 리좀처럼 세계 모든 구석구석에 손길을 뻗치지만, 우리의 시야를 협소하게 하고 오직 자본에로만 종속시킨다는 점을 볼 때 무서운 신종-나무다. 자본은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고 대신 그만큼의 불안 속으로 떠민다. 하지만, 구제역으로 매장당하는 수만 마리의 돼지와 소를 보면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면 과연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것의 화려함에 나의 생(生)을 걸어서도 내주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해야 한다.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낀다면 우리는 삶에 대한 쓸데없는 망상으로 불안해하지는 않을 것이고, 자본에 의지하지 않고도 충만해질 수 있을 것이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절망의 벽이 나의 삶이라면 그 벽을 푸르게 덮는 것은 수천 개의 다른 잎들이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 아니므로 나와 다른 것들과 접속하면 접속할수록 나의 삶은 생생해질 것이다. 청춘의 열정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갈구하는 힘이며 또한 그것처럼 자연스럽고 충만한 것은 없다. 그리고 나는 나의 젊음에, 이 未-완성에 감사한다. 내 나이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또 아무리 ‘삶’을 말해도 그것이 진부해지지 않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이폰이 아니다."
나무형 책에서 시작했으니 리좀적 글로 앞으로를 말하려고 한다. 이제 남은 일은 ‘삶의 새로운 서사’를 직접 쓰는 것뿐이므로(^^). 들뢰즈와 가타리도 해석하기보다는 용법을 발명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글은 참 좋은 무기다. 글은 우리를 재단하는 선분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다양체이기도 하다. 공부를 하는 나의 삶에 진심으로 감사할 때가 있다면, 책을 읽다가 나와 타자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는 순간순간들 그리고 내 글이 우글거리는 하나의 서식지가 되었음을 볼 때이다. 글은 내가 머물 수 있는 최소한의 영토이자 내가 만날 수 있는 최대한의 ‘접속’이다. “나는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살아 있으며, 또 살아 있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통해서 만나게 될 수많은 책들과, 글로서 펼쳐질 또 다른 세계를 기대한다. 그러다 보면 함께 공부하고 부대낄 친구들이 찾아와 그들과도 ‘접속’하게 되지 않을까? 그 또한 기대한다. 친구를 만나는 여정,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것, 매일매일 공부하고 글을 쓰는 것은 나에게는 분리되지 않는다. 10년 뒤에 정규직으로 찾아올 장밋빛 미래보다는 순간에 몰입하는 지금-여기의 ‘살아 있음’이 내게는 훨씬 더 매력적이다.
나는 바로 이 여정에 대해서 글을 쓰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이 글쓰기 자체가 여정이 될 것이다. 섣부르게 ‘삶’에 대해서 규정하기보다는 느리더라도 사유에 균열이 가는 순간순간을 포착해 가고자 한다. 나 또한 글이 다양체라는 것을 믿으므로, 내가 ‘살아 있음’을 찾는 이 과정이 또한 누군가에게 낯선 고원과 접속하는 기회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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