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친구였구나;;;
‘혼자 조용히 살고 싶다’가 한때 오랜 꿈이었다. 섬마을 선생님이 되어 섬마을에서 평생을 보내도 좋다는 생각에, 분위기 파악 못하고 노래방에 가서도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을 불러 대던 철없던 시절도 있었으나 그 꿈은 교대 입학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저절로 사라졌다(참 포기가 빠른 나란 여자). 다음은, 돈 많고 명 짧은 남자와 결혼하여 유산을 상속받은 뒤 역시 섬마을에 가서 북카페를 하면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꿈이었다. 그 꿈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닌 덕에 곧 깨졌다. 내 얘기를 들은 선배왈, “아무개야, 예뻐야 돼”. 돈 많고 명 짧은 남자를 만나려면 일단 예뻐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 맞다! 내가 그 생각을 못했네! 역시 바로 접었다.
안녕, 나의 꿈들아~
아무튼 그랬다.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었거나, 누가 날 들볶거나 한 것도 아닌데, 또 누가 봐도 사회성이 떨어지거나 하는 편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뭐가 됐건 사람들과 좀 엮이지 않고, 부대끼지 말고, 나도 아무도 안 건드릴 테니 아무도 날 건드려 주지 않았으면 했다. 나중에 내가 처음 내 사주를 읽을 수 있게 됐을 때는 이게 관성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원국과 지장간 심지어 대운에도 50대 전까지는 관이 없는, 완벽에 가까운 무관 사주의 소유자가 바로 나다. 알다시피 관성은 조직운이기도 하고, 책임감이기도 하다. 내 사주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되는 대로 막사는 (+ 막살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그러니까 누가 옆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사주를 좀더 들여다보게 된 후에는 무관성보다 무비겁이 더 문제라는 걸 알았다. 비겁은 나의 일간과 같은 오행으로 곧 ‘나’다. 그러니 비겁이 없다는 것은 또다른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에 소극적이거나 굳이 소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한편, 비겁이 강하다는 건 그만큼 주체성이 강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관성이 없이 비겁이 강하면 고집쟁이가 될 가능성이 크고, 비겁이 없이 관성이 강하면 의무감에 짓눌려 살기 쉽다. 좌우간 무비겁+무관성의 나란 인간을 한마디로 하면 ‘Let it be’, ‘냅둬요’다. 냅두라는데, 다 귀찮고, 다 필요없다는데 누가 이런 사람을 좋다고 할 텐가. 이제 보니, 참 안타까운 사주다.
이런 사주지만, 그리고 참 건방진 말이지만, 내가 지금까지의 내 삶을 평가한다면 나름 잘 살았다. 늘 하는 생각은 ‘이만 하면 됐다’다(그 ‘이만 하다’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기준이 아주 낮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난 그만 하면 됐다;;). 내가 잘 살고 있다고 느끼는 건, 딱히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거다(내 기준은 이렇다;;).
한 연구에 따르면 “친한 친구가 5명 늘어날 때마다 학교폭력으로 발생하는 학생들의 자살 생각이 10%씩 줄어들 수 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건복지포럼」}고 한다. 죽고 사는 문제가 친구한테 달려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생명은 열린계다. 안과 밖이 쉬임없이 넘나들어야 한다. 이런 생명활동을 윤리적으로 표현하면 우정이 된다. 어디 청소년뿐이랴. 중년도 노년도 다 마찬가지다. 삶의 질을 결정짓는 건 친구다.
- 고미숙,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156쪽
딱히 죽고 싶어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죽고 싶지 않다, 사는 게 괜찮다, 라고 느낀 게 친구 때문이었구나. 친구가 생기면 죽고 싶은 마음이 줄어든다, 죽고 사는 문제가 친구한테 달려 있다, 삶의 질을 결정짓는 건 친구다……라는 저 대목을 읽었을 때 깨달았다. 그래도 친구가 있어서 이만큼이나 살았구나 하고.
그런데 내가 본 내 사주로는 내가 참 친구가 없을 사주다. 소극적인 주제에 제멋대로이기까지 하지 않는가. 나도 싫다. 하지만, 내 입으로 말하기는 참 뭐하지만, 그래도 나 (많지는 않아도) 친구 있다. 도대체 나한테 어떻게 친구가 있었을까, 가 나도 궁금해서 다시 한번 사주를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비밀은 대운에 있었다. 나는 1대운인데 11세 대운과 21세 대운, 그러니까 가장 많은 친구를 사귀고 친구와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그 시기에 비겁 대운이 들어와 있었다. 11세 대운에는 무술 대운으로 비견이 기둥으로 세워져 있다. 원국의 인성과 식상에 비견이 더해져 있으니, ‘요 정도면 친구로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스스로도 든다(^^). 또 생각해 보니 지금 내가 ‘친구’라고 부르는 친구들은 다 비견/겁재 대운에 사귄 친구들이다. 지금 속해 있는 대운인 31세 대운(은 경자로 식재 대운이다)에서는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저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대운이 지나가면 41세 대운에 다시 겁재 대운이 온다(아싸!).
노란색 '戊'와 '己', '丑'이 나에게 '친구'라는 것!
명리학의 십신(十神)이란 개념은 인생을 주도하는 열 개의 운동에너지를 지칭하는데, 그 가운데 ‘겁재’(劫財)라는 항목이 있다. 말 그대로 ‘재물을 약탈해 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육친(六親)으로 풀면 형제, 동업자, 친구, 남편의 여인, 아내의 남자 등이 거기에 해당한다. 그럼 이 운을 타고난 이들은 늘 재물을 약탈당할 테니 참으로 흉하지 않겠는가. 그렇긴 한데, 반전이 있다. 겁재는 재물을 털어 가는 대신 내 명줄을 튼튼하게 해준다. 이건 또 뭔 소리? 겁재가 많다는 건 내가 관장하는 재산(혹은 능력)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뜯어갈 게 있어야 겁재들이 몰려오지 않겠는가? 해서, 겁재에 둘러싸여 있으면 고단하긴 하지만 훨씬 긴장된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나를 살리는 기운이라 하는 것이다.
- 고미숙,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249쪽
형제, 동업자, 친구, 남편의 여인(흠흠)…… 뭐 아무래도 좋다. 다 “내 명줄을 튼튼하게 해준다”니. 그저 땡큐다. 주변의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들여다봐도 결국 그 사람들의 문제는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41세 대운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된다. ‘불혹’(不惑)까진 몰라도 ‘불우’(不遇)하진 않겠다. 겁재가, 아니 친구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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