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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도서관

병을 환대할 수 있는 위대한 건강!

by 북드라망 2016. 6. 14.

자기 의 연구자


우울한 방문객, 병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에 한 팀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너무 몸이 아파 다음날 휴가를 내야겠다고 했다. 어제, 오늘 그 친구가 반차를 쓸지 모르겠다며 이야기하던 생각이 났다. 들어보니 아내와 아이도 함께 병을 얻은 모양이다. 겨울날 된바람처럼 그 친구의 마음도 추울 생각을 하니 불현듯 몹시 안쓰럽다.

직장인들에게 병은 쉽게 일상을 무너뜨린다. 왕들조차 병에서 자유롭지 못한 걸 생각하면 그리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성군이라던 세종도 평생 병을 달고 살았다. 젊어서부터 쭉 한쪽 다리가 쑤시고, 등에 부종(몸이 붓는 증상)이 심해 돌아눕질 못했으며, 소갈증(당뇨병)에다, 심지어 안질(눈병) 때문에 정무를 보지 못할 지경이기도 했다. 급기야 병이 심해 29세가 되던 때에는 관을 짜서 죽음을 준비할 정도였다. 병이 나라의 통치조차 무너뜨린 경우다. 세종은 이런 자신을 보고 이렇게 한탄한다.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다른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 나의 쇠로함이 참으로 심하구나!”

내 경우에도 오래 매달리던 일을 마치고, 잠시 쉴 틈이 생길 때면 이 우울한 방문객이 어김없이 찾아오곤 했다. 특히 토, 일요일처럼 휴일에 찾아온 이 우울한 방문객은 얄밉기 그지없다. 황금 같은 휴일을 병으로 앓다 보면 시름에 겨운 내 삶이 통째로 우울해져서, 그만 아무나 붙잡고 통곡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정말 주말에 아픈건 뭔가 억울한 느낌이다!

이때만큼은 몸이 그 무엇보다 요상하다. 내가 마치 몸이란 형무소에 갇혀, 간수이자 죄수로 함께 사는 것 같은 느낌인 것이다. 끙끙 않는 죄수인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간수인 ‘나’. 그러나 그런 몸을 벗어나지 못하고 휴일을 고스란히 바치고 마는 ‘나’. 몸의 형무소에서 병을 맞아 힘겨워하는 나를 생각하면 어쩐지 끔찍하다.


몸, 타자들의 공동체

병에 대해서라면 철학자 니체(F. Nietzsche, 1844~1900)와도 그 인연을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는 평생 건강이 좋지 않았다. 편두통과 심각한 근시, 게다가 눈의 피로도 극도로 심했고, 때때로 위장병까지 가세해 니체의 존재를 뒤흔들었다. 물론 사이가 틀어진 바그너의 음악이 자신의 위(胃)에 맞지 않는다고도 했는데, 어쩌면 그것 때문에 위장병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무슨 일을 하고 있든, 그는 매일 병마와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가장 자주 아팠던 것은 편두통. 밤새 잠을 못 잘 정도로 괴로웠다. 어떤 때는 사흘 밤낮에 걸쳐 지속되기도 한다. 겨우 15분 동안 글을 읽거나 쓰고 나면 몇 시간씩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아플 때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고, 설령 무언가를 먹어도 곧 토하고 말았다. 한 번씩 이렇게 시달리고 나면 온 몸이 탈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탈진 때문에 다른 병에 연이어 걸리기도 했다.

이런걸 보면 니체에게 병은 단순한 놈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가, 니체는 병을 매우 다르게 접근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병에 대한 새로운 감각은 몸(신체)에 대한 독특한 시선으로부터 솟아난다.

우선 니체에게 신체는 ‘힘들의 관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하는 힘들과 지배받는 힘들 간의 관계이기도 했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좀 알쏭달쏭하다. 어떻게 힘들이 관계를 맺어 신체를 구성한다는 말일까? 그리고 어떻게 지배하고 지배받는다는 말일까?

프랑스 조각가 앙투안 브루델의 <댄스>, 샹젤리제 극장에 조각되어 있다.


고대 자연 철학에서는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신체는 일종의 결합체이다. 스토아 철학자이자 로마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의 출생은 우주의 여러 요소들이 결합한 것이고, 죽음은 그것들의 해체라고 말한다(『명상록』 Ⅳ-5). 우리들의 몸이 태어나고 죽는 문제를 우주의 요소들이 결합했다가 흩어지는 사건으로 본 것이다. 이런 시각은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의보감』 「내경편」에서는 우리 신체가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이 합쳐져 이루어졌다는 구절이 보인다. 

결국 몸은 우주의 수많은 움직임들이 우연히 뒤엉켜 생겨난 일시적 사건(event)이라고 해야 한다. 다만 사람의 시간으로 보면 이 사건이 무척이나 길게 여겨져서 고정불변처럼 느껴질 뿐이다. 니체는 신체를 어느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사건이라고 하면서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 떼이자 목자이다.”
    -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신체는 하나로 결합되어 드러난 다양체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고대의 자연학적 태도가 여기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신체는 수많은 요소들의 결합, 일종의 무리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체 안에는 온갖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에 뒤이어서 니체는 사람들이 육체보다 중요하게 여기던 ‘정신’을 신체의 도구이며 놀잇감에 불과하다고까지 선언한다. 신체 안에는 너, 나가 따로 없고, 서로가 서로에게 ‘나’가 아닌 채로 결합되어, 서로를 도우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란 ‘너’와 ‘너’의 결합, 즉 타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다보니 신체 안에서는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때론 전쟁이, 때론 평화가 신체를 지배한다. 원래 지지고 볶는 공동체라면 그래야 하는 것이다. 병은 이 관점에서라야 제대로 보인다.

예를 들면 한의학에서 피부와 폐는 연결되어 있다. 폐가 호흡을 하듯 피부도 호흡을 한다. 그러니까 한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피부는 밖으로 드러난 폐다. 평화 시기에는 안에 들어앉은 폐와 밖을 차지하는 피부가 제대로 관계를 맺고 움직인다. 그러나 폐기(肺氣, 폐의 기운)가 약해지면 피부에 감기가 치고 들어온다. 폐와 피부의 관계가 무너지면서 감기에 의해 지배당하고 마는 것이다. 순식간에 평화가 전쟁으로 돌변한다.

어떤 계기를 통해서 내 몸에는 새로운 요소들이 들어온다. 병이란 바로 이렇게 신체 안으로 새로운 타자가 구성되는 일이다. 즉 병은 내 신체에 참여한 새로운 ‘너’다. 신체란 새로운 타자들이 끊임없이 참여하고 나가기도 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병마저도 일원으로 존재하는 그런 공동체이다.


위대한 건강, 병을 환대하다

니체는 아플 때면 여행을 가거나, 숲을 거니는 것을 택했다. 눈이 무척 나빴던 그는 검은 숲을 아주 좋아했다. 거대한 적송, 참나무, 자작나무, 너도밤나무, 물푸레나무가 드리운 그늘을 따라 몇 시간이고 거닐다 보면, 숲의 어둠이 니체의 눈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니체는 걸으며 과거의 일보다 미래의 일을 더 자주 생각한다고 쓴다. “저는 이곳에서 숲속을 많이 걸어다니고 있으며, 아주 즐겁습니다.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저는 희망과 믿음으로 가득 차서 여러 가지 일을 곰곰이, 충분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과거 일을 생각하지만 미래에 대해 훨씬 더 자주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 삶의 방식이기도 하고 건강을 되찾는 방식이기도 합니다.”(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 『좋은 유럽인 니체』) 놀랍게도 니체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건강을 되찾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무척이나 자연학적이다. 그리스·로마에서는 일상에서 수행하는 건강의 실천이 합리적 생활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뼈대이다. 그것은 자신과 세계가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대한 인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 사이에는 삶을 구성하는 온갖 요소들이 그물망처럼 둘러싸여 있다. 상황 상황마다 이런 요소들과 내가 어떻게 배치되는지, 또 그 그물망 속에서 내가 일상의 사건들에 어떻게 참여하는지, 등등에 따라 신체에 병적인 결과를 유발할 수도 있다. 또 신체를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가 허약하면, 둘러싼 환경에 변화가 없는데도 환경과 나 사이의 관계가 급격히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바로 이런 변화가 병이다. 아마 위에서 언급했던 감기라는 사건도 이런 경우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의 움직임에 아주 예민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때때로 갖가지 움직임에 대응하다 피로해질 수도 있다. 원래 감기도 특별히 찾아와 걸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평상시에도 수시로 신체에 들락날락 한다. 그러나 별 문제가 없다가도 관계에 뭔가 이상이 생기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신체의 균형을 깨트리고 만다. 저항하고 공격하는 신체의 본능이 움츠러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피로한 신체, 의욕을 갖지 못하는 신체이다. 오히려 이것이 감기보다 더 심각한 병일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이 신체를 자기 삶의 길잡이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몸이라는 길잡이에서는 엄청난 다양성이 나타난다. 더 잘 연구할 수 있는 보다 풍부한 현상을 더 빈약한 현상을 이해하는 길잡이로 사용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허용된다.”(니체, 『유고』Ⅻ) 다시 말하면 신체 안의 다양한 관계들의 움직임을 배우고, 그것으로부터 삶의 기술을 터득하라는 뜻이다. 감기로부터 신체의 발란스가 깨지고 회복되는 배움을 얻는다. 그리고 그로부터 자신의 생활을 갱신한다. 이런 국면들을 통과하며 일상을 새롭게 구성할 계기를 얻는 것이다.

니체에게 강한 것이란 자신의 신체를 길잡이로 삼을 줄 아는 자이다. 니체의 표현대로 강한 자는 “심오한 생리학자”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들이 사는 방법을 삶의 “위생법”이라고도 말했다. 동아시아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양생술”이다. 또 어느 시인의 말을 빌려 말하면 이를 행할줄 아는 자는 “자기 삶의 연구자”(박노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신체와 환경을 탐구하여 이들을 구성하는 타자들을 잘 다룰 줄 알게 된 자, 바로 그런 사람이 강한 사람인 것이다.

* * *

니체는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사려 깊고 극도로 부드러웠을 뿐 아니라 정중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여행을 다니고, 내면적인 훈련에 대해 강조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매순간 탐구적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의 주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폭풍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더없이 잔잔한 말들이다. 비둘기처럼 조용히 찾아오는 사상, 그것이 세계를 끌고 가지.”(「더없이 고요한 시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아마 내게 전화했던 그 팀원은 아픔의 시간동안 자기도 모르게 몸이라는 길잡이와 함께 자기 자신을 거듭 연구했을지 모른다. 아프지 않고서는 자기 삶에 관심갖지 않았던 자신을 질책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병이라는 타자는 우리들로 하여금 자기를 연구하라는 명령으로 찾아온 손님일지 모르겠다.

‘위대한 건강’은 그런 것이다. 병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환대하는 것, 오히려 그로부터 ‘신체-공동체’의 생명을 증대시킬 절호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이 의미에서 병은 우리에게 다가온 하나의 선물이다. 자기를 탐구하는 ‘자기의 연구자’로서 말이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 이 글은 월간금융 4월호에 소개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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