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고정희 『이 시대의 아벨』
왜 태양은 빛나는지
왜 파도는 밀려오는지
당신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세상이 끝났다는 걸 모르는 걸까요.
왜 새들은 노래하는지.
왜 별들은 반짝이는지.
내가 당신의 사랑을 잃었을 때
세상도 끝났다는 걸 모르는 걸까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궁금해하죠.
모든 것이 그대로인 이유를.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어떻게 세상이 이전과 똑같이 흘러가는지.
왜 내 가슴은 계속 뛰는 걸까요.
왜 내 눈에선 눈물이 흐르는 걸까요.
당신이 내게 이별을 고했을 때
세상이 끝나버린 걸 모르는 걸까요.
스키터 데이비스(Skeeter Davis)의 노래 ‘The end of the world’의 노랫말이다.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배운 것은(알게 되었다기보다는 배웠다는 쪽이 더 맞겠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담임선생님이기도 했던 영어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가르쳐 주신 노래였다. 영어로 된 가사를 칠판에 쓰고 한 구절씩 아이들과 함께 해석해 나가던 선생님은 갑자기 목이 메어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어리둥절해진 우리는 눈만 껌벅이며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미안하다고 하시며, 당신의 여동생 이야기를 해주셨다. 형제가 많은 집에서 여동생과 선생님은 한방을 쓰며 유독 사이가 돈독한 자매였단다. 어릴 때부터 서로의 비밀과 꿈을 모두 나눌 만큼, 가장 친한 혈육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그런데 선생님이 스무살 무렵에 여동생이 갑작스런 사고로 죽고 말았다고. 몇날 며칠을 실신한 듯 울다 쓰러지고 울다 쓰러지며 지내는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저 팝송이 흘러나왔고… 정말 노랫말처럼 어떻게 내 동생이 죽었는데, 오늘도 해가 뜨는지, 왜 별은 뜨는지, 왜 세상은 변한 게 하나도 없는지… 너무나 원망스러워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아마 벌써 오래전 일이고 이젠 괜찮을 것 같아(당시 시점으로 여동생 분이 돌아가신 건 20년 가까이 지난 일) 우리 반 아이들에게 영어를 친숙하게 해주실 요량으로 팝송을 가르쳐 주시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그때의 감정이 훅 일어나신 듯했다.
그때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 가까운 이의 부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내 동생이 죽었는데도 어떻게 해가 뜨는지” 이상하고 원망스러웠다는 선생님의 슬픔은 내 가슴에 꽤 긴 시간 동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내게 스무살 때부터 오랫동안 4월은 어떤 ‘죽음’들과 연이어진 5월의 죽음들을 떠오르게 하는 달이었다. 내 삶을 크게 바꾼 아픈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 죽음들이 영어선생님의 여동생 일처럼 내게 직접 한 존재의 ‘부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40여 년간 혈육이나 가까운 이를 잃은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지인들이 불의의 사고로, 혹은 안타까운 선택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내가 꾸준히 만나거나 내 생활 속에 있는 이들은 아니었기에 소식도 늦게야 건너 건너 듣는 경우가 많았고, 연락을 하며 지내지 않는 사이였기에 사실… ‘부재’를 느낄 일도 없었다.
2년 전 겨울, 가까이 지냈고 내가 참 좋아했던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나는 가까운 이가 ‘부재’하는 감각을 아주아주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10여 년을 가까이 지냈지만, 돌아가시기 전 2년 정도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락을 못 드리고 있다가 부고를 듣게 되었다. 부고를 들은 장소는 서울 지하철의 한 환승역. 지금도 그 역에 가면 선생님이 생각난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다가 심지어 선생님이 생전에 출간하신 책들을 보아도 비교적 무심히 지나다가, 문득 훅 하고 가슴에 ‘부재’가 사무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이젠 정말 뵐 수도, 전화를 드릴 수도 없다는 것이… 이상한 말이지만 실감나지 않는 만큼 또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가까웠던 지인의 부재도 이러한데, 가족을 잃고 가족 같은 친구를 잃는 일은 어떠할까.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죄스럽고 염치없게 느껴진다. 다만 이 부재들을 생각하며 오래전 “캄캄한 밤이라도” “마주잡을 손 하나”는 오고 있다고 말해 주던 시 한편이 떠올랐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을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全文
우리들 어둠은 구원이 되는구나
공평하여라 어둠의 진리
이 어둠 속에서는
흰 것도 검은 것도 없어라
덕망이나 위선이나 증오는 더욱 없어라
이발을 깨끗이 할 필요도 없어라
연미복도 파티도 필요 없어라
이 어둠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두 손을 맞잡는 일
손을 맞잡고 뜨겁게 뜨겁게 부둥켜안는 일
부둥켜안고 체온을 느끼는 일
체온을 느끼며 하늘을 보는 일이거니
― 「서울 사랑―어둠을 위하여」 부분
문득 달력을 보니 4월에는 생각 외로 무슨무슨 날이 많다. ‘죽음’과 ‘부재’만 생각했었는데, 잘 알고 있는 ‘식목일’―나무 심는 날도 있고, 4‧19혁명 기념일도 있고, 4월 21일 과학의 날도 있고, 4월 23일 세계 책의 날도 있고,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도 있다. 그리고 4월 20일, ‘장애인의 날’도 있다. 동생이 시각장애를 갖게 된 이후, 내게 ‘장애인’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그 전에 듣던 말과 같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인간이 간접경험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지만, 살아오면서 알게 된 몇 가지 것 중 하나는 미루어 그의 처지를 생각해볼 순 있어도 그 마음을 짐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떤 아픔도 기쁨도 상처도 행복도 직접 겪어야 알 수 있다. 다행이라면, 그 겪음을 통해 하나씩 배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미루어 짐작이나마 할 수 있게 되고, 겸손해지는 순간이 한순간 늘어나고, 타인에 대한 공감이 한순간 더 가능해진다.
얼굴이 잘생긴 내 동료 서정민 씨는 두 살 때 하체 소아마비를 앓았다. 세 살 때는 이미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고 그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는 비로소 걷는 것의 부러움을 알게 되었다. 햇볕 쨍쨍한 봄날 긴 골목에서 줄넘기 술래잡기 공차기로 신들린 동네 아이들을 먼 발치에서 구경만 하면서 그만 왜 앉아 있는지를 몰랐다. 경상도의 고래등 같은 기와지붕 밑에서 조석으로 이어지는 어머니의 질긴 한숨 소리가 천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란도셀을 짊어진 동네 아이들이 키들거리며 학교로 달려갈 때 그의 푸른 하늘도 경련하기 시작했다. 가고 싶다 뛰고 싶다 달리고 싶다, 그는 유리창에 물컵을 내던지고 면도날 몇 개를 푸른 눈에 꽂았다. 전주 예수 병원과 세브란스 병원의 물리 치료실., 용하다는 병원은 죄다 전전하면서 사지에 몸 다리기 밧줄을 매고서 <하나님 개새끼> 욕설을 퍼부으면서 초등학교 시절을 걷기 위해 탕진했다. 한 주일에 한 번씩 오리 생피 들이키고 소금 한입 틀어막고 피보다 진한 울음을 울었다. 집문서 땅문서 다 날리고 13년 되던 날 목발을 짚었다.
그는 목발로 대학엘 들어갔다.
13년 동안 마신 오리 생피 냄새가 등나무꽃으로 피어나는 꿈을 꾸면서 버스를 타고 도서관엘 출입하고 사랑을 배우면서 그는 <신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실로 불편한 것은 그의 목발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들의 <굽어진> 마음인 것도 알았다.
그래 그래 그래
내 동료 서정민 씨가 13년 동안 앉은뱅이 다리를 펼 때 멀쩡한 사람들은 무얼 폈나? 내 동료 서정민 씨가 대서양을 날기 위해 밤잠을 설칠 동안 멀쩡한 사람들은 무엇과 싸웠나? 왜 앉은뱅이 마음 하나 못 고치나.
실로 불편한 것은 그의 목발이 아니라 우리들의 굽어진 마음이라는 것을 아는 서정민 씨는 오늘도 이상주의 목발을 짚고 이쁜 보람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태평양을 건너리란 꿈으로 출렁인다. 두 손에 박힌 굉이 힘을 더 주면서.
― 「徐正敏小傳」 全文
*보람이는 서정민 씨의 첫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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