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상처 준 자를 용서하라, 용서하라
― 12월이면 생각나는 시집,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
고등학교 때까지, 아니, 정확하게는 중학교 3학년 초부터 대학교 입학 전까지 교회는 내 생활의 중심처였다. 아주 작지도 아주 크지도 않은 동네에 있는 교회에는 딱 서로를 알고 어울릴 만큼의 동급생들과 선배들과 후배들이 있었고, 중등부와 고등부로만 나뉜 학생회가 있었다(작은 교회는 중고등부가 통합되어 있고, 큰 교회는 중등부만 해도 중등 1부, 2부… 식으로 나뉜다).
어디든 조직이 있으면 행사도 있는 법이다.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서 팀웍이 중요하고 팀웍을 위해서는 자주 모여야 하므로 우리는 참 교회에서 자주 만났다. 비록 각자 학교에서는 누구는 뛰어난 성적을 자랑하고, 누구는 문제아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교회 안에서만은 모두 주님의 활동을 함께하는 친구였다!(사실 서로의 학교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지 않았기에 학교에서의 모습이 어떤지는 잘 몰랐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응답하라 1988’ 시절의 교회 학생회가 치러야 할 가장 큰 행사가 뭐였냐면 여름의 수련회와 가을의 문학의 밤이었다(물론 성탄절이나 봄에도 역시 소소한 행사들이야 있었지만, 준비에 드는 공력이 두 행사에 견줄 수는 없었다). 두 가지 중에서도 우리의 기획력과 각자의 장기를 가장 많이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문학의 밤’이었다. 이름이 참, 오해를 부를 수 있는데, ‘문학’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좀 고급스러움을 지향하는 학예회 같은 것이기도 하고, 공동체나 연구실에서 하는 ‘학술제’ 축제랑 비슷한 것이기도 하다.
왜 시집이야기에 교회의 ‘문학의 밤’이 나오는가. 내가 ‘서울의 예수’와 ‘금관의 예수’를 이 행사 덕분에 만났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문학의 밤’을 한 채널의 라디오처럼 구성했다. 그러니까 각 프로그램마다 DJ가 있다. 노래를 틀어주는 프로그램(우리가 노래하는 거다), 시나 성경을 낭송하는 프로그램, 라디오극을 하는 프로그램 등이 짜여지는데, 가장 공이 많이 들어가고, 가장 관객의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히 라디오극 팀이다. 라디오에서 하나의 단막극을 틀어주듯, 연극처럼 무대에서 행위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음향팀과 더불어 목소리 연기를 펼친다. 대본은 직접 쓰거나 희곡을 각색하거나 했는데, 어느 해인가 내가 각색을 맡게 되었다. 너무 오래 전 일이라 당연히 구체적 내용은 거의 생각나지 않고, 소년원에 수감된 청소년들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어렴풋이 떠오른다. 거기에 정호승의 시 「서울의 예수」의 한 대목이 나왔으며, 배경 음악으로 김민기의 「금관의 예수」(혹은 「주여 이제는 여기에」: 같은 노래가 두 제목으로 불리고 있는 것 같다. 당시에 나는 그 노래 제목을 ‘금관의 예수’로 알았다)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 「서울의 예수」 부분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텅 빈 얼굴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거절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구름 저 편 푸른 숲에 아 거기에 있을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 노래 「금관의 예수」 가사 全文
뭔가 ‘금지’된 것이 많은 나이인 청소년 시기에다가, 시절 또한 ‘금지’하는 것투성이인 때였다. 아마 ‘금관의 예수’ 노래도 금지곡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기에 꼭 더 넣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찾아 읽게 된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 시집에는 가족을 위해 공장에서 일하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은 어린 여공, 구걸하는 맹인부부, 가난 때문에 소년원에 갇힌 소년, 구두닦기 소년 등 고단한 삶을 사는 이들의 모습이 때로는 애절하게 때로는 잔잔하게 그려져 있었다.
순아 오늘도 에미는 네가 보고 싶어
아픈 몸을 이끌고 역에 나갔다
와닿는 열차의 어느 칸에서고 네가
금방이라도 웃으면서 내릴 것 같아
차마 발길을 못 돌리고 에미는 또 울었다
(중략)
처음엔 어느 곳 시다로 있다더니
곧 미싱사 보조가 되어 월급도 올랐다고
좋아라고 보내오던 네 편지
봉투째 부쳐오던 네 월급
이번 구정엔 틀림없이 에미 보러 온다기에
에미는 동네마다 옷장사를 나갔는데
눈 오는 시장바닥을 떠돌면서 기다렸는데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네가 먼저 가다니
이 에미를 남겨두고 네가 먼저 가다니
썰렁한 네 자취방 윗목에는
아직도 빈 라면 봉지가 나뒹구는데
순아 하늘에는 겨울에 무슨 꽃이 피더냐
이 겨울 하늘에도 눈물꽃이 피더냐
― 「마지막 편지」
더 낮은 곳에서, 그곳의 이들과 함께하는 삶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믿었지만, 사실 어떤 이들이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인지 실감할 수는 없었던 10대 후반의 어느 때 만났던 정호승의 시 속 인물들은 당시에는 충격과 안타까움으로 다가왔고, 이후 어떤 나의 기본정서 같은 것을 형성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정호승 시인의 시는 노래로도 많이 만들어졌는데, 안치환은 한 앨범을 통째로 정호승 시인의 시를 가지고 꾸린 적이 있을 정도다. 『서울의 예수』에는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맹인부부 가수’, ‘눈물꽃’, ‘이별노래’, ‘또 기다리는 편지’ 등의 노랫말이 된 시가 실려 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람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 「우리가 어느 별에서」 全文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펼쳐보았던 『서울의 예수』에서 한 해를 마감하는 이때,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시 한 편을 발견했다. 내게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새해에는 더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가,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다.
너희는 너희에게 상처 준 자를 용서하라.
한 송이 눈송이 타는 가슴으로
마른 나뭇가지마다 하얀 눈꽃으로
너희는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감사하라.
감사가 없는 곳에 사랑이 없고
용서가 없는 곳에 평화가 없나니
너희는 평화가 너희를 다스리게 하라.
정직한 자가 이 땅 위에 꽃을 피우고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너희는 사랑하라.
굶주린 자의 밥그릇을 빼앗지 말고
목마른 자의 물대접을 차버리지 말고
오직 너희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라.
눈 내리는 새해 아침에는
절망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모여 앉아
눈물의 굳은 빵을 나눠 먹는 일은 행복하다.
날마다 사랑의 나라를 그리워하면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다.
너희는 바람이 불 때마다
언제나 괴로워하지 않았느냐.
사랑과 믿음의 어둠은 깊어가서
바람에 풀잎들이 짓밟히지 않았느냐.
아직도 가난할 자유밖에 없는
아직도 사랑할 자유밖에 없는
너희는 날마다 해 뜨는 곳에
그리움과 기다림의 씨를 뿌려라.
평화를 위하여 기도했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눈길 위를 걸으며 너희는 기도하고
언제나 새벽에 깨어나 목말라 하라.
오늘도 어둠 속에 함박눈은 내리나니
거룩한 사람 하나 눈길 위를 걸어오나니
너희는 새해에 그 눈길 위에 엎드려
너희에게 상처 준 자를 용서하라 사랑하라.
― 「서울 복음 2」 全文
'지난 연재 ▽ > 그때 그 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희성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4) | 2016.05.16 |
---|---|
고정희 시집 『이 시대의 아벨』 (0) | 2016.04.18 |
박남준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4) | 2016.01.18 |
이해인 수녀님 시집 『내 魂에 불을 놓아』 (2) | 2015.11.24 |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2) | 2015.10.20 |
다니카와 슌타로 시선집 『이십억 광년의 고독』 (0) | 2015.09.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