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박남준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쫓기듯 사는 삶에 잠시 숨을 고르게 해주는 시집

 ― 박남준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살다보면 일도 관계도 참 벅차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하루살이 인생처럼 허덕허덕 간신히 보내고 있거나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를 달리듯 하는 때. 그러다 어떤 임계점 같은 곳에 다다랐을 때, 그러니까 달려도 달려도 맹렬히 쫓아오는 일의 기세에 더 이상 도망칠 의욕도 잃고 그냥 “날 잡아먹어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나를 팽팽하게 했던 모든 끈을 다 놓아 버리려 했을 때, 만난 시집이 바로 박남준의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실천문학사, 2010)였다.
 
박남준 시인은 지리산 자락 마을인 경남 하동 악양에 10여 년째 살고 있고, 그 이전에는 전북 모악산 자락에서 또 10여 년을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의 시는 자연에서의 목가적 삶을 다루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일상에서 예기치 않게 자연을 만났을 때 느끼는 어떤 편안함, 어떤 작은 기쁨 같은 것이 그의 시에는 담겨 있다. 그것은 그러니까 일부러 교외에 나가서 자연을 만끽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어느날 눈길이 머문 곳에 우연히 피어 있는 어린 잎을 만났을 때, 길가 혹은 어느 집 담장 너머 우연히 눈이 간 나무에 단풍이 들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지나가다 본 어느 화단에서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들꽃을 만나게 되었을 때 느끼는 그런 작은 기쁨과 소소한 편안함 같은 것을 닮았다.

나 자체가 자연인 그런 삶에서 나온 시들, 어떤 대상화된 자연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이야기가 자연 속에 펼쳐진 시들이랄까. 그래서인지 아무튼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를 손에 들었을 때, 나는 숨을 좀 고를 수 있었다. 깊은 숨을 한번 편안히 내쉬었고, 도망치는 트랙 위의 나를 트랙 밖으로 내보냈다. 트랙 밖에도 땅이 있었다.




밤새 더듬더듬 엎드려
어쩌면 그렇게도 곱게 썼을까
아장아장 걸어 나온
아침 아기 이파리
우표도 붙이지 않고
나무들이 띄운 연둣빛 봄 편지

― 「봄 편지」 全文


매화가 핀다고
연꽃이 곱다고
산국처럼 물들고 싶다고
눈꽃이 못내 그리웁다고
솔숲 맑은 바람 다관에 우려내면
찻잔에 어느새
푸른 하늘 담기네

― 「차 한잔」 全文


그리움도 오래된 골목 끝 외딴 감나무처럼 낡아질 수 있을까
흘러온 길이 끝나는 곳 세상의 모든 바다가 시작되는 그곳
밤새 불빛 끄지 않고 뒤척이며 깜박이는 등대 같은 것

― 「쉰」 全文


이 시집에는 쉰이 넘은 나이에 홀로 산자락에 거주하는 시인의 삶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그런 시 중 특히 「독거노인 설문 조사」는, 관공서에서 ‘독거노인’이며 ‘생활보호 대상자’로 자신을 명명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내 눈길이 간다.


우울증은 없는가요
너무 행복해서 탈이네요
충치, 틀니를 하셨는지
잘 씹어 먹어요
담배는 하루 몇 개비 피워요
갑으로 물어보세요
갑으로는 문항이 없는데요 그럼 열 개비 이상
약주는 하셔요 술은 몇 잔 정도
몇 병으로 물어봐요
최근에 병원에 가신 적이 있는가
생활은 어떻게 하시나 생활보호 대상자는 아니신가
시인이에요 시인

인기척에 나가보니 웬 아주머니 하는 말 군 보건소에서 나왔다는데 독거라는 말끝을 자르며 독거노인 조사요 아니 옆집도 있고 아랫집도 있는데 그랬더니 그분들은 함께 사시잖아요 우리 나이 쉰넷, 사고로 다친 무릎이 쑤시고 절뚝거리며 치통이 자주 양수쌍쌍겸장으로 관자놀이 편두통을 쨉 훅 어퍼컷 카운트 펀치로 휘두른다 온갖 잡문을 써서 꾹꾹 눌러 담은, 월수 삼사십, 한 시인의 경제가 싹 벗겨져 들통 나는 설문 조사당하는 날

― 「독거노인 설문 조사」 全文





박남준 시인의 최근 시집은 작년에 나온 『중독자』인데, 특이하게 ‘펄북스’라는 곳에서 출간되었다. 보통 이 정도의 관록(?)이 있는 시인이면 이른바 주요한 ‘문학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는데 들어보지 못한 출판사에서 시집이 나와 의아했는데, 찾아보니 지역 서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온 진주문고에서 만든 출판사란다.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그동안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지역문화가 꽃피워져야 되는데 우리나라는 서울 중심적인 문화가 편중되어 있다. 지역에 사는 예술인들이 그 지역에서 활동을 하고 열심히 한 작업들이 지역무대에 올려지거나 출판되어지면 지역문화가 조금 더 꽃피지 않겠는가’라고 말해온 내 자신을 생각하면서 지역 출판사에서는 한 번도 출판해 본 적이 없는 게 부끄러”웠다며 그런던 차에 우연히 진주문고에서 내는 펄북스와 연이 닿아 시인의 등단 30주년 7번째 시집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인터뷰 기사 원문을 보러 가시려면). 세상에 필요하고 중요한 일은 말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자기 삶에서 행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특별히 힘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하고 사는 시인의 시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바람은 춤추고 우주는 반짝인다
지금 여기 당신과 나
마주 앉아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는 것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나무들이 초록의 몸속에서
붉고 노란 물레의 실을 이윽고 뽑아내는 것
뚜벅뚜벅 그 잎새들 내 안에 들어와
꾹꾹 손도장을 눌러주는 것이다

아니다 다 쓸데없는 말이다
한마디로 인연이란 만나는 일이다
기쁨과 고통,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물들어간다는 뜻이다

―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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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애독자 2016.01.18 08:47 답글 | 수정/삭제 | ADDR

    “나 자체가 자연인 그런 삶에서 나온 시들, 어떤 대상화된 자연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이야기가 자연 속에 펼쳐진 시들”... <독거노인 설문조사> 재밌네요. 사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다 <독거노인>이죠. 나뭇가지 끝에서 아장아장 걸어나온 아기 이파리도, 찻잔에 담긴 푸른 하늘도, 밤새 불빛 끄지 않고 뒤척이며 깜박이는 등대도... 우리는 다들, 방년 150억살, 우주의 나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뭘 그렇게 안달복달하면서 허덕이며 사는지.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잠깐 앉아 쉬어가야겠네요.

  • 하이 2016.06.08 18:41 답글 | 수정/삭제 | ADDR

    좋은 정보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