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대한 오해와 진실
1. 『삼국사기』에 대한 변명
역사책은 '독서물'이다. 물론 역사·문화·지리의 고증과 발견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게 역사책임을 간과해서 한 말은 아니다. 우리들은 역사소설을 읽듯, 역사책을 읽는다. 연구자가 아니라면 역사를 검증하기 위해 역사책을 들춰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역사적 사건, 사고들은 국사책에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잘 정돈된 ‘사건과 사고’ 너머의 ‘음험한’ 이야기를 찾을 때 역사소설과 마찬가지로 역사책도 읽는다. 어떤 가려진 진실을 찾기 위해서도 우리는 역사를 읽는다.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중요한 과제는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이다. 그 위험은 지배 계급의 도구로 넘어갈 위험이다. 어느 시대에나 전승된 것을 제압하려 획책하는 타협주의로부터 그 전승된 것을 쟁취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중)
이런 인식에 의거할 때, 『삼국사기』는 좋은(?) 책이 아니었다. 적어도 『삼국사기』를 읽기 전 이 책에 대해 가진 이미지는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삼국시대를 다룬 역사책이자 같은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유사』와 비교했을 때, 『삼국사기』는 재미없고 유익하지 않은 책이라고 단정해버렸던 것이다. 적어도 내 상식선에서 『삼국유사』는 필독서지만 『삼국사기』는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었다. 『삼국사기』는 매력적인 반전도 없고 전복적 의식을 찾을 수 없는, 왕들의 치란을 서술한 국가 공인 역사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부식이 왕의 명령에 의해 편찬한 정사(正史)라 국가주의적이며 보수적이라는 선입견을 나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내 머릿속의 『삼국사기』는 이데올로기에 포획된 책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또한 중국의 역사책 『사기』와 비교했을 때, 『삼국사기』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한나라 때 사마천이 죽음 대신 궁형을 선택한 이유는 오로지 『사기』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마천의 『사기』는 국가사나 정치사와 같은 거시사 뿐만 아니라 미시사까지 기술되어 있었다. 여기에 더해 ‘공간, 시간, 인간, 행위’의 역학 속에서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의 실제와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의 실제 속에 드러나는 역사 너머 ‘인간학’까지 탐구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아우라가 없었다. 한 존재의 유일한 생존 이유였던 『사기』와 견줄 때 『삼국사기』는 그 얼마나 안온한 책인가? 불온함이라곤 감지되지 않는 책이었다.
읽기도 전에 『삼국사기』를 대하는 마음이란...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삼국사기』를 읽어보고 싶었다. 『삼국유사』와 얼마나 다른지, 도대체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구성했는지, 그 실체가 궁금해졌다. 훌륭한 역사책을 펼친다는 설레임은 조금도 지니지 않은 채 아예 국사책을 펼치는 마음으로 『삼국사기』를 읽었다. 전혀 기대감이 없어서였을까, 아님 이미 한 수 접고 시작한 독서였기 때문일까? 『삼국사기』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적어도 나에겐 『삼국유사』보다 흥미롭게 다가왔다.
『삼국사기』의 「열전」보다 「본기」가 더 매력적이었다. 삼국의 역사를 나라별로, 연대순으로 간략하게 기술한 <본기>에서 눈에 띈 것은 천재지변에 대한 기술이었다. 이상 기후나 자연의 괴변들을 특별한 사건으로 기록하는 방식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배제한 역사책인데 천재지변을 정치와 관련하여 중대하게 다루는 방식이 역사의 문외한이었던 나에겐 기이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사실로 구성하는지가 역사책 각각의 특이성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고구려 통치자들의 이야기는 흥미롭기 짝이 없었다. 고구려의 인물이라곤 장수왕, 광개토왕, 을지문덕 밖에 모르던 나에게 왕 노릇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고구려 왕비의 강인한 생존본능(?) 은 어떤 것인지 등을 알아가는 과정은 쏠쏠한 즐거움이었다.
적어도 『삼국사기』는 국사책과 달랐다. 김부식의 시선과 삼국시대 사람들의 시선이 엇갈리는 그 지점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많은 관념의 망령들을 볼 수 있었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역사주의적 인식, 식민지 시기 신채호의 절박함은 간과한 채 막연히 역사는 ‘아(한민족) 와 비아(비한민족) 의 투쟁’이라는 인식, 절대화된 단일민족 의식 그래서 삼국은 한 나라, 한 민족이라는 믿음. 물론 신채호의 역사의식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我와 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의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세계사란 세계의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란 조선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무엇을 아라 하고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한마디로 쉽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 외에는 모두 비아라 한다. 이를 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을 비아라 하지만,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은 각기 자기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을 비아라 한다. 무산계급은 무산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 등을 비아라 하지만, 지주나 자본가 등은 각기 자기와 같은 계급을 아라고 하고 무산계급을 비아라 한다. 뿐만 아니라 학문이나 기술, 직업이나 의견, 그 밖의 어떤 부분에서든 반드시 본위인 아가 있으면 따라서 아와 대치되는 비아가 있는 것이다. 아 내부에도 아와 비아가 있고, 비아 안에도 또한 아와 비아가 있다.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빈번하고 심할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투쟁도 더욱 맹렬하여 인류사회의 활동이 멈출 때가 없고 역사의 전도도 끝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다.
- 신채호, 『조선상고사』, 1931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다."
신채호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국가와 민족’의 역사를 소환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이 제국주의 적들과 투쟁하기를 강력히 촉구했던 것이다. 신채호의 역사의식은 민족주의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신채호는 세계주의자였다. 그래서 아와 비아는 민족 대 비민족일수도, 민족 내부의 유산자와 무산자일수도, 비민족 내부의 유산자와 무산자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신채호의 역사의식 중의 극히 한 부분만 앙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신채호의 역사의식의 실체에 다가갈 필요조차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저 국사책에서 배운 대로 역사를 이미지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망령들이 『삼국사기』를 읽으면서 깨져 나갔다. 우리에게 민족은 근대의 산물이었을 뿐 『삼국사기』에는 그런 민족은 없었으며, 발전·진보에 대한 의식도 없었다. 『삼국사기』를 읽고 나서야 여기서 제시하는 국가주의적 시선은 근대의 역사주의와 매우 다르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벤야민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과거에 대한 영원한 이미지를 제공받은 것이 아니라, 어떤 계열의 과거와 유일무이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가 사료가 아니라 독서물이 되는 순간 ‘역사주의’라는 이름의 미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 『삼국사기』의 운명
책도 운명이 있다. 어떤 책은 나오자마자 회자되어 한 시대를 풍미한다. 어떤 책은 조용히 묻혔다가 운명적인 길잡이를 만나 뒤늦게 매력을 발산한다. 그런가 하면 시대를 잘못 만나 역적보다 더 심하게 욕먹는 책도 있다. 『삼국사기』가 바로 그렇다. ‘근대’라는 복병을 만나 가차 없이 욕먹은 책이다. 근대의 길목에서 역사가 김부식과 그가 편수한 『삼국사기』는 더할 수 없는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삼국사기』를 둘러싼 편견의 기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신채호, 최남선과 같은 근대사가들은 『삼국사기』를 참아낼 수 없었다. 민족의 뿌리도 그리지 않고 삼국의 역사만을 기술했으며, 중국 사료에 의존해서 삼국의 역사를 기술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근대사가들에게 김부식과 『삼국사기』는 사대주의 화신으로 민족의 정신을 말살한 역적이었다. 민족과 자주와 문명의 함수관계를 따지는 입장에서 『삼국사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 역사서에 기대어 민족의식에 흠집을 내고, 민족의 역사를 왜곡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신채호는 『삼국사기』라는 책의 존재를 견딜 수 없었다. “『삼국사기』를 지을 때 김씨의 마음은 이를 독립의 조선사로 지은 것이 아니라 지나[중국]역대사 가운데 동이열전의 주석으로 자처함이 명백하도다”(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선유들이 말하되 3국의 문헌이 모두 병화에 없어져 김부식이 고거할 사료가 없어 부족하므로 그가 편찬한 『삼국사기』가 그렇게 소루함이라 하나, 기실은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분멸한 것이며, 김부식의 이상적 조선사는 1.조선의 강토를 바싹 줄여 대동강 혹 한강으로 국경을 정하고, 2.조선의 제도 문물 풍속 습관 등을 모두 유교화하여 삼강오륜의 교육이나 받고, 3.그런 뒤에 정치란 것은 오직 외국에 사신 다닐 만한 비열한 외교의 사령(辭令) 이나 감임(堪任) 할 사람을 양성하여 동방군자국의 칭호나 유지하려 함이었다.”(조선사연구초, 『단재신채호전집』. 형설출판사, 1982)
신채호(사진 왼쪽)와 최남선(사진 오른쪽)은 모두 『삼국사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같은 시대 최남선도 신채호처럼 『삼국사기』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삼국사기』는 사실에 충실하기보다는 문사(文辭) 에 치중하였고, 원상(原相)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관에 따라 개작을 서슴지 않았다고 보았다. 또 『삼국유사』에 비교하여 평하기를 “만일 본사와 유사의 양자 중에 어느 하나밖에 지니지 못할 경우가 있다하면 대부분이 한토(漢土)의 문적을 인입한 것이요, 그 약간의 국전(國傳) 이란 것을 명과 실을 대개 한화(漢化)한 『삼국사기』를 내어놓고 단락(斷落) 하고 착잡(錯雜) 하고 조루(粗陋) 하고 궤탄(詭誕) 할망정 일련(一臠:살 한 점) 이라도 本味(본미) 를 전하는 『삼국유사』를 잡을 것이 고당하다 할지니라"고 했다.(최남선, 『신정 삼국유사』, 민중서관, 1914. 「삼국유사해제」)
근대사가들은 김부식을 중국의 전적만 신빙하고, 역사 이래 우리의 역사서를 말살한 일개 사대주의자로 치부했다. 김부식은 근대 민족주의의 적이었다. 급기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 택일해야 한다면 『삼국사기』는 버리고, 『삼국유사』는 잡아두겠다고 한다. 근대 제국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던 20세기 초, 『삼국사기』는 폐기되어도 아쉬울 게 없는 책으로 전락했다. 역사적 가치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모화와 사대로 점철된 책으로 완전히 찍혀버렸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 학자들에게 황탄하기 이를 데 없다고 비판받았던 『삼국유사』는 민족의 기원인 단군으로부터 상고사를 기록했다는 이유로, 중국의 유교 정치와 정치사상에 기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우 중요한 역사 사료가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운명은 이렇게 엇갈렸다.
조선시대까지는 『삼국사기』가 고증이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은 받았을지언정, 심지어 고증할 수 없는 허탄한 사실을 기록했다고 지적받았을지언정, 한민족의 영토를 줄이고 한민족의 기원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렇게 엄청나게 욕먹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당태종에 대항했던 ‘안시성’의 전투를 고증이 어렵고 자료가 인멸된 와중에도 중국 사료를 증거 삼아, 심지어 유공권의 소설에서까지 인용하여 전했다는 점에서 김부식의 기록정신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근대의 민족주의 도래와 더불어 추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이했던 것이다.
단군의 얼을 이어받은 한겨레라는 뿌리의식은 『삼국사기』를 불편하게 여기게 한다. 상고사를 저버리다니!! 상고사를 의도적으로 말살했다고 보진 않더라도 민족의식이 심각하게 결여되었다고 보는 것은 보편적 시선이다. 중세 동아시아의 보편지식 즉 중국의 지식을 학습했던 고려제국의 지식인 김부식이 중세 보편적 역사의식에 충실한 『삼국사기』를 지었다는 사실은 근대사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원죄라면 원죄였던 것이다. 조선을 야만에 빠뜨린 망령 ‘중국’에 대해 어찌 한 치의 너그러움를 발휘할 수 있었겠는가?
근대사가들이 『삼국사기』에 새겨놓은 낙인은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다. 거기에 관찬역사서에 대해 갖는 반감이 더해져 『삼국사기』는 읽지는 않지만 비난할 수 있는 역사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그저 사대에 찌든 역사서로, 관변적인 역사서로 매도하는 것은 또 하나의 편견이다. 김부식에게 역사는 근대 사가들이 생각하는 역사와는 다른 것이었다. 『삼국사기』는 근대인들의 역사 관념과는 다른 지점에서 역사를 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사기』는 역사로 나아가는 또 하나의 출구다. 벤야민은 말한다. 역사의 다수성은 언어의 다수성과 유사하다고.
3. ‘삼국’의 기원과 종말에 관한 기록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라는 세 나라의 기원과 종말에 관한 기록이다. 삼국의 생장소멸을 다룬 역사책이다. 즉 김부식의 나라 '고려'가 세워지기 이전의 기원, 즉 '고려'라는 하나의 국가로 병합된 '세 나라'에 관한 이야기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혁거세니서간에서부터 경순왕까지, 고구려의 동명성왕부터 보장왕까지, 백제의 온조왕부터 복신의 백제회복운동까지를 기록했다. 우리가 기대하다시피 『삼국사기』는 한반도라는 심상지리 안에 구축된 '우리 민족'의 기원을 다룬 역사책이 아니다. 김부식은 삼국보다 앞선 시기의 역사를 기술할 생각을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김부식의 입장에서 보자면 근대사가들의 폄하는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김부식은 인종의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고 『삼국사기』를 편수했는데 말이다.
“오늘날의 학사(學士) 대부(大夫) 가 오경(五經) 제자(諸子) 의 서적과 진(秦) ㆍ한(漢) 역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간혹 두루 통하고 자상히 설명하는 자가 있으나 우리나라 사적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아득하여 그 시종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한탄스러운 일이다. 신라ㆍ고구려ㆍ백제는 나라를 세워 솥발처럼 맞서서 능히 예로써 중국과 상통하였다. 그러므로 … 군왕(君王) 의 선악(善惡) 과 신자(臣子) 의 충사(忠邪) 와 국가의 안위(安危) 와 백성[人民]의 치란을 모두 들추어내어 권계(勸戒) 를 삼을 수 없으니, 마땅히 삼장(三長 재주ㆍ학문ㆍ식견) 의 인재를 구하여 일가(一家) 의 역사를 이루어서 만세에 물려주어, 일성(日星) 과 같이 빛나게 해야 하겠다.”
『삼국사기』는 중국에 대한 고려제국의 자존심이었다. 중국과 상통하는 삼국의 역사가 있었다는 자긍심을 역사서로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역사서를 정리하고 싶었던 인종과 김부식은 한반도의 기원을 통해 세계제국으로 나아가고 싶어 했던 근대계몽적 지식인들의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기원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김부식은 한반도의 기원이 아니라 고려의 전사를 정리했다. 증거를 인멸했다고 욕먹었던 부분도 김부식 입장에선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앞서 편찬되었던 삼국의 『고기』는 김부식의 관점에서 봤을 때 허탄한 사실이 많았다. 역사는 고증 가능해야 기록한다.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허황한 이야기들을 담는 것은 ‘정사’가 아니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건만을 기록하겠다는 의식에 입각해서 김부식은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 했던 것이다.
"일가(一家) 의 역사를 이루어서 만세에 물려주어, 일성(日星)과 같이 빛나게 해야 하겠다."
김부식은 12세기 고려에서 활동했던 지식인이다. 그가 활동했던 시대는 정사에 대한 정리가 필수라고 생각했다. 중국 제국에 비견되는 역사서의 찬진은 그가 맡은 과업이었다. 증험할 수 있는 범위에서 역사서를 정리한 김부식은 분명 유학적 사가의 표본이다. 중세 보편주의 문화는 중국의 문화다. 중국의 문장, 문화에 경도되어 정사의 원칙을 세워나간 방식이 『삼국사기』의 한계라면 한계지만, 새로운 방식의 역사서술이었다는 점에서 『삼국사기』는 12세기 고려적인 산물이라 할 것이다.
일연은 13세기의 지식인이다. 약 백여 년의 거리를 두고 『삼국유사』가 탄생했다. 고려제국의 역사의식도 변화했을 것이다. 13세기 단군에 대한 관심, 동명왕에 대한 관심 등은 역사를 좀 더 상고시대로 올리고자 하는, 비록 황탄하지만 신이한 시조에 대한 기대가 증폭되던 시대였다. 더구나 괴력난신을 역사의 한 장으로 끌어올 만큼 사람들의 인식은 변하고 있었다. 『삼국유사』에서 주로 기술하고 있는 불교적 이적은 중국에서 유행하던 ‘지괴(志怪) ’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다. 인간 세계 너머의 존재들을 증명하고자 하는 의식이 또 하나의 문화로서 자리 잡았던 시기다. 역사적 사실에 포섭되지 않는 황탄함을 역사 이면의 진실로써 받아들이려는 인지의 변화가 『삼국유사』의 편찬에 작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삼국유사』도 홀로 편찬된 것이 아니다. 중국불교의 영향과 함께 중국문화의 감수성에 공명했던 문화적 접속의 결과인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편찬의식 중 어떤 것이 옳은지를 판정하기 어렵다. 게다가 한 시대의 이념에 따라 책에 대한 포폄도 달라지니, 이걸 책의 운명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지난 연재 ▽ > 동아시아 역사책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속의 광개토대왕의 모습은?! (0) | 2016.06.21 |
---|---|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 - 아직 서로가 '원수'이던 때의 역사 (0) | 2016.06.07 |
김부식에게 한민족은 없었다! - 1 (0) | 2016.05.24 |
김부식, 역사는 고증 가능해야 한다 vs 일연, 허탄한 이야기도 역사다 (0) | 2016.05.10 |
역사 속의 김부식 - 위대한 역사가에서 치졸한 사대주의자까지 (0) | 2016.04.12 |
[새연재] 동아시아 역사책 탐史를 시작하며! (0) | 2016.03.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