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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동아시아 역사책 읽기

김부식에게 한민족은 없었다! - 1

by 북드라망 2016. 5. 24.


〈‘한민족’이 아니라 ‘삼국’이 있었네!〉 1탄




삼국, 다른 기원/다른 천하


『삼국사기』라는 역사책으로 진입해보자. 『삼국사기』는 중국의 역사책인 『사기』의 양식을 모방한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는 황제의 일과 행위를 다룬 본기(本紀), 제후의 일과 행위를 다룬 세가(世家), 기억할 만한 개인들의 행위를 기술한 열전(列傳), 왕력을 연표로 정리한 표(表), 문물·제도·법령을 논술한 서(序)로 구성되어 있다. 이 독창적 역사 양식이 창조된 이래, 동아시아 역사책들은 기전체라 불리게 된 이 양식을 전범으로 삼게 된다. 김부식도 『사기』의 양식에 의거하여 본기·열전·연표·잡지(雜志)의 체제로 역사를 구성한다.


『삼국사기』는 중국의 역사책인 『사기』의 양식을 모방하여 쓰인 책이다.



중요한 것은 김부식이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을 각각 천자의 나라, 즉 독립된 제국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삼국 각각의 역사를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로 배치하고 있다. 참고로 『고려사』 또한 기전체 양식에 의거하였으되, 고려왕조의 역사를 본기가 아니라 세가의 항목으로 기술하고 있다. 김부식은 신라, 고구려, 백제를 천자의 나라로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이 삼국을 통일한 고려에 대해서 두 말 할 것 없이 독립된 천자의 제국임을 과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사』의 편찬자들은 고려를 중국에 대한 제후국으로 격하시켰다. 이럴진대 김부식을 모화사상에 찌든 사대주의자로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중국의 역사양식에 의거하고, 중국의 사료를 참고했지만 적어도 삼국과 고려를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또 하나의 천하로 본다는 점에서 오히려 독립적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민족의 기원이 하나임을 의심치 않듯, 우리는 저 고대의 삼국 즉 고구려, 백제, 신라가 그 기원은 하나임을 철썩 같이 믿어왔다. 한반도상(?)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 그리고 고조선의 시조 단군을 삼국의 기원으로 보는 데 일말의 주저함이 없다. 삼국은 하나의 민족에서 갈라진 것임을, 즉 하나의 민족인데 한반도라는 영토를 분할 통치하면서 삼국으로 찢어졌을 뿐이라는 것을 ‘사실’로써 굳건하게 지켜왔다. 하나의 민족, 세 나라! 이것이 역사적 ‘사실’일까? 『삼국사기』를 보면 그렇지 않다. 고구려, 신라, 백제는 서로 다른 기원과 형성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천하들이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동명성왕(주몽)에 의해 건국되었다. 동명성왕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땅은 동부여지만, 천제의 손자라는 신화의 내용으로 보아 ‘이주민’이다. 그 이주민이 어떤 종족인지 알 수 없다. 추측하자면 ‘맥족’에 가깝다. 동명성왕의 어머니 유화는 부여족이니 유전자 반쪽은 부여족 즉 만주유역 송화강가에 살던 ‘예족’임에 틀림없다. 이와 같은 결연에 의해 탄생한 동명성왕은 동부여에서 살다 이주민(동부여에서부터의 벗인 오이, 마리, 협보와 모둔곡에서 만난 재사, 무골, 묵거)을 이끌고 졸본(홀본/요령성 환인현)으로 이동하여 고구려를 세운다. 고구려는 주몽에 의해 건국되어 송양의 비류국(비류수 근처-혼강), 행인국(태백산 동남방), 북옥저를 정복하면서 요동 일대를 차지한다.



고구려 2대 유리왕은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길림성 집안현)로 옮기고, 유리왕 33년(14년)에 양맥을 정벌하고, 고구려현(현토군에 속함)을 습격하여 탈취한다. 대무신왕 때 개마국, 구다국, 낙랑을 정벌하고, 태조대왕 때 압록강 근처 해두국(부여 대소왕의 동생이 해두국을 점령하고 왕이 됨), 동천왕 때는 양맥, 숙신을 속주로 삼고, 미천왕 대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소멸시켜 평안도, 함경도 일대에 설치되었던 중국의 군현은 사라지게 된다.
『삼국사기』에 의거하여 고구려의 기원과 초기 국가 형성기를 살펴보면, 고구려는 단일 종족으로 이루어진 국가가 아니었다. 부여로부터 이주한 주몽 세력, 그 전부터 존재한 예맥, 고구려가 있기 전부터 요령 일대에 있었던 말갈족, 동옥저 세력 등 여러 종족이 하나의 왕국을 형성한 사회였다.(이종욱, 『고구려의 역사』)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가 건국한 나라다. 주몽이 졸본부여로 도망왔을 때, 부여왕의 둘째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라고 한다. 혹은 비류와 온조는 주몽이 졸본 월군 여자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라고도 하며, 시조 비류왕은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 소서노가 우태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라고 한다. 백제 건국신화는 몇 가지 이본을 통해 시조가 온조거나, 혹은 비류로 달리 전해지지만, 비류와 온조가 졸본땅의 토착민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인 것은 공통된다. 이들은 북부여로부터 온 주몽의 아들, 즉 이복형제 유리에게 밀려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백제의 지배집단은 부여계이거나 혹은 고구려계로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부여계로 추측한다. 더구나 백제라는 이름의 국가가 만주 지역을 할거 통치했다는 중국측 역사 기록들을 보면, 만주 지역의 부여계 이주민들이 백제를 세워 살다가 하남 부근으로 이주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비류와 온조는 한반도 중심부로 내려온 이주민으로, 각기 백성을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정주했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지금의 서울 근처)에 도읍을 정해 나라이름을 십제라 했다. 그러나 비류가 죽자 미추홀에 정착한 부여계 이주민들은 모두 위례로 귀속하여, 온조가 명실상부 부여계 이주민들을 이끌고 나라이름을 백제라 했다. 백제는 처음에 평양 근처에서 살던 말갈, 낙랑과 근접해 있으면서 수시로 침공을 받았는데, 온조왕 13년에 한산 아래로 도읍을 옮겼다. 이 때 백제의 국경은 북으로는 패하(압록강 혹은 청천강), 남으로는 웅천(공주), 동쪽으로는 주양(황북 봉산)이었다.


백제는 부여계 이주민들이 남하하여 서울 근처에 정착한 토착민들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국가이다. 백제가 건국되기 이전 이미 한반도 중북부에는 마한 연맹이라는 여러 소국들의 연합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남하한 부여계 이주민이 건국 주체가 되었던 백제는 마한 연맹의 맹주국인 월지국의 지배를 받다가, 점차 한반도 중북부의 토착민들에 의해 세워진 마한연맹의 소국들을 병합해 갔던 것이다. 온조왕 26년(8년)에는 마한의 국토를 병탄하고, 27년(9년)에는 마한의 원산과 금현(나주?)을 정벌하여 마한을 멸망시켰다. 백제는 부여계이기는 하지만, 주몽은 부여계와 다른 부족의 결합으로 탄생한 존재라는 점에서 동일한 기원으로 보기도 어렵다. 지배계층이 부여계지만 고구려계와는 다르며, 주도적인 지배집단을 제외한 대다수 백제민은 마한의 토착민들이었다는 점에서 고구려와 그 기원이 다르며,  ‘백제’를 형성하는 민족의 기원조차 단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회도〉에 그려진 (왼쪽부터 순서대로) 백제, 고구려, 신라 사신들의 모습.



그렇다면 신라는 어떤가? 신라의 국가 기원을 보면 ‘고구려, 백제’와 전혀 친연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신라는 조선의 유민이 진한의 산곡 사이에 나누어 살며 육촌이라는 각기 독립된 6개의 추장사회로부터 출발한다. 고조선 유역에서 발견되는 지석묘가 신라 지역에서도 발견되는 것은 그 기원이 고조선임을 보여주는 징표다. 그런데 ‘조선’도 고조선의 유민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진한 지역으로 남하한 조선의 유민들은 위만조선 즉 중국인 유망민 집단과 토착 조선인 집단의 연합체를 말한다. 위만조선은 진한 교체기의 전란을 피해 중국의 동북방,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등의 지방에서 조선 방면으로 유입되어온 수많은 피란민과 고조선의 토착민들이 결합된 나라다. 그러니 신라의 기원도 단순하지 않다. 더구나 육촌체제는 기원전 57년 박혁거세에 의해 사로국으로 통합되면서 신라의 지배집단이 또 하나의 기원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육촌의 추장사회 계보와는 다른 박, 석, 김의 세 성씨로 이루어진 외부집단들이 신라의 중심 세력이었음을 신라 건국신화는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가 소속된 진한 연맹은 6국이었다가 12국이 되었다. 신라는 진한 연맹의 맹주국으로 탈해왕 때 즉 1세기경 진한의 소국들을 병합하고(음즙벌국, 실직곡국), 나해니사금 때는 소문국, 첨해니사금 때는 감문국, 골벌국을 복속하고, 차츰 변한 연맹과 가야연맹까지 복속시켜 한반도의 동남쪽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신라의 구성원은 누구인가? 지배집단을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신라민 전부를 가리키는가? 신라는 고조선 유민, 진한시기 중국지역 유민, 진한과 변한의 토착민, 심지어 고구려와 백제민, 읍루, 숙신 등의 말갈까지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신라만 보더라도 우리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고려의 기원, ‘한민족’은 없다!


고구려·백제가 신라에 의해 병합되었을 때, 고구려민과 백제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당나라는 고구려에는 안동도호부를 두어 이곳을 신라와 당나라가 함께 다스렸고, 백제에는 웅진도호부를 두어 신라와 당나라가 함께 다스렸다. 고구려, 백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당나라에 맞서 싸웠으나 금방 진압당하면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우리의 기대와 달리 고구려, 백제민들은 고스란히 신라로 복속되지 않았다. 고구려 사람들은 하남, 농우의 여러 주들을 전전했으며,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평양) 부근에 머물러 있다가 신라로 달아나고, 남은 사람들은 말갈과 돌궐로 뿔뿔이 흩어져 들어갔다. 백제민도 마찬가지다. 신라, 발해, 말갈 등으로 나누어지고 나라 계통이 마침내 끊어졌다. 고구려, 백제의 백성들에게 신라나, 발해나, 말갈이나, 돌궐이나 다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에 민족의식에 의한 어떤 차별성이나 친연성은 없었다. 해동 삼국이 하나라는 의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동북아시아주변국’으로 흡수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삼국은 그렇게 뒤섞이고, 또 그렇게 흩어졌다.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의 국가 기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기원은 없다. 그저 한반도엔 삼국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삼국이 고려에 의해 통일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만이 사실이다. 『삼국사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삼국 이전에는 그저 여러 종족들이 저마다의 작은 나라, 혹은 촌락공동체를 이루고 만주로부터 한반도의 전역에 퍼져 살았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통일신라 이전 하나로 묶인 적이 결코 없었다. 고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그리고 부여, 옥저, 진한, 변한, 마한, 가야가 한반도 전체를 통일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삼국을 아우르는 기원을 찾으려 애쓴다. 찾으려 하면 할수록 상상과 허구의 늪에 빠지게 된다. 한반도의 국가가 하나의 민족단위로 상상되는 것은 적어도 통일신라 이후다. 왕조는 바뀌지만 민족은 그대로 이어지는 구도는 통일신라 이전에서는 찾을 수 없다. 아니 아예 없었다. 고조선은 요동지역을 점거했던 또 하나의 국가일 뿐이다. 고조선이라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이 삼국으로 찢어졌다가 다시 통일된 것은 아니다. 동북아시아 여러 종족들의 이합집산에 의해 이 세 나라가 하나로 통합되었음을 『삼국사기』는 기술할 뿐이다. 삼국 각 나라의 기원을 탐색했음에도 각 기원들이 하나의 정점으로 모아지지 않는다는 것. 한반도가 우리의 영토요, 국토라는 관념조차 삼국의 통일로 인해 생겨난 심상지리라는 것.


통일 신라 이전까지는 한반도-국토라는 관념도 없었다.


『삼국사기』는 제목의 의미 그대로 신라, 고구려, 백제 세 왕조에 관한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삼국사기』를 확인하는 순간 참으로 낯설어진다. 왜 하나의 기원을 가진 삼국을 그리지 않았을까 의구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삼국으로 찢어지기 이전, 한반도는 애초에 하나의 민족 혹은 하나의 국가가 통치했다고 믿었기에, 아니 그것이 당연한 사실이라 여겼기에 각기 다른 기원을 지닌 세 나라의 역사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은 애초에 하나였던 ‘한민족’이 분할된 것이라 여기며, 삼국으로 찢어지기 이전의 하나였던 ‘민족’ 혹은 ‘국가’가 마땅히 기술되어야 한다고 믿어마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 각 나라의 시작부터 멸망까지를 기록하는 것이 제목에 부합하는 데도, 삼국 이전 한반도의 역사를 연속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에 오히려 당황한다.


『삼국사기』는 그 제목에 걸맞게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다룬다. 『삼국사기』는 고려 이전 한반도 상에서 패권을 잡았던, 그리고 고려에 의해 통합된 세 나라의 역사만 기술한다. 따라서 삼국이 건국되기 이전의 역사도 기술하지 않으며, 동시대 이 세 나라 이외의 ‘국가’의 역사도 다루지 않는다. 역사기술의 초점은 오직 삼국이었다. 왜냐? 고려의 기원이 삼국이었기 때문이다.  


김부식에게 고려의 기원은 삼국일 뿐이었다. 삼국 이전, 한반도를 통일했던 제국은 ‘신라’였기에 통일신라 이전의 삼국의 역사와 통일신라의 역사, 그리고 이후 다시 분할된 후삼국의 역사를 고려의 기원으로 본 것이다. 김부식은 한반도의 통일 제국 ‘고려’의 기원을 탐색하는데 목적을 두었지, 민족의 기원을 탐색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김부식에게 ‘민족’ 의식은 없었다. (『삼국사기』는 12세기에 한반도 천하를 차지했던 ‘고려제국’이 자신들의 역사와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그 전사(前史)로서의 ‘삼국’을 왕조별로 정리한 것이다. 고려는 자신들이 어떤 나라들을 통합하고 하나의 제국이 되었는지, 그 통일의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새로운 역사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한반도에 자리 잡고 명멸해갔던 ‘한민족들’의 역사를 기술할 의도는 아예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고려는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이나 유구한 역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한반도를 분할․통치하던 삼국을 아우른 ‘제국’으로서의 표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삼국 이전의 역사에서 고려의 기원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는가? 삼국의 기원을 따져들어가다 보면 어디까지 가야 진짜 뿌리를 발견할 수 있는가? 그런 뿌리가 있기는 한 것인가? 한반도상의 최초의 국가에서 기원을 찾는가? 아니면 한반도 상에 살았던 구석기 이전 원시시대의 종족들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하는가? 『삼국사기』를 기술하는 추동력은 제국 의식이었지, 민족 의식은 아니었다. 고려시대 인종과 김부식에게는 하나의 민족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한반도상의 세 나라를 통일하고 하나의 ‘국가’를 정립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다. 김부식은 한민족의 정체성이 아니라 고려인의 정체성을 그려냈다. 그것은 오로지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 민족의 통합적 구성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김부식은 우리 근대인들이 선험적으로 전제하는 ‘한민족 정체성’에 대해 아마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상상의 공동체 ‘민족’ 그것은 김부식이 말한 바, 증명 불가능한 ‘허황하고도 신이한 세계’에 가깝지 않을까? 


김부식은 삼국시대를 우리들과 다르게 인식했다. 우리는 삼국을 한민족의 분열로 인해 생겨난 삼분의 일 쪽에 불과한 나라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는 원래 혹은 정상 상태가 되고, 세 개의 국가는 이탈 혹은 비정상 상태가 된다. 김부식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삼국은 삼분의 일 쪽이 아니라 각기 다른 기원과 형성의 연원을 가지고 있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나라들이다. 김부식은 삼국의 병립과 역학 관계에 관심을 집중했다. 삼국 사이의 공통의 뿌리의식 혹은 혈연적 연대감은 근대인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지만 삼국시대 사람들과 김부식에게는 상상 밖의 문제였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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