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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동아시아 역사책 읽기

김부식, 역사는 고증 가능해야 한다 vs 일연, 허탄한 이야기도 역사다

by 북드라망 2016. 5. 10.


역사가 김부식

: 일연과의 대결




김부식, 역사는 고증 가능해야 한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의 역사서를 말하려면,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를 비교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는 정사요 하나는 야사, 김부식은 유학자요 일연은 불승, 하나는 문헌 조사를 중심으로 하나는 현지조사를 중심으로 기술되었다는 점에서 두 역사책은 대칭을 이룬다. 이 때문에 『삼국사기』를 읽으면 『삼국유사』가 궁금해지고, 『삼국유사』를 읽으면 『삼국사기』가 궁금해진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있어 '짬짜면'은 불가능^^;;



우리에게 삼국 역사를 알려준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는 점에서, 안타깝지만 우리나라에서 삼국의 역사에 관한한 이 두 권밖에는 전해지는 역사책이 없다는 점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김부식의 역사의식을 이야기하려면, 김부식과는 다르게 역사를 구성했던 일연의 역사의식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비교 속에서 김부식은 중국 사대주의자로 일연은 우리문화의 수호자로 일컬어졌으며, 김부식은 국가주의자로 일연은 민중주의자로 대별되었다. 김부식과 일연이 이렇게 극명하게 다르게 평가된 이유는 두 사람의  역사의식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김부식과 일연을 과연 이렇게 변별할 수 있는 것인지는 다시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고려사』 「열전」에 기술된 김부식은 조정에서 예의규범에 관한 의견을 제안할 때도 중국의 역사와 제도를 기준으로 삼았다. 인종 연간에 이인겸이 왕의 장인으로서 국권을 잡았을 때 이인겸에게 아부했던 정극영, 최유, 박승중 등의 신하들은 왕에게 건의를 올린다. “왕후의 부모는 신하의 예로서 대우하지 않으니, 이자겸이 주상에게 올리는 글에는 신(臣)이라고 쓰지 않으며, 군신의 연회에서 이자겸은 백관들과 같이 뜰에서 하례할 것이 아니라 왕이 계신 막차에 올라 배례하고 전에 앉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또 이들은 “이인겸의 생일을 인수절이라고 칭하자”는 제의를 하기도 했다. 이런 제안에 반대했던 신하가 김부식이었는데, 김부식이 의거한 바가 중국 한나라, 위나라의 사적과 예기였다. 김부식이 의리를 밝히고, 제도를 만들어가는 기준은 중국의 사적과 문물제도였다.


김부식에게는 역사 서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역사서술이 중국 역사에 비견하여 손색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삼국의 역사를 기술할 때 중국의 역사기술이 척도가 되었던 것은 중국을 보편문명으로 여겼던 지식인에게 있어서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김부식은 “범엽(范曄)의 『한서(漢書)』, 송기(宋祁)의 『당서(唐書)』에 모두 열전이 있기는 하나, 내부의 일은 자상하게 다루고 외부의 일은 허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갖추어 싣지 아니하였고, 『고기(古記)』는 문자가 너무 졸하고 사적도 빠진 것이 많은 까닭으로 군왕의 선악과 신자의 충사와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치란이 모두 정확하게 드러나지 못하여 근계(勤戒)를 남길 수 없기 때문에”(「진삼국사기표」) 『삼국사기』를 편찬했던 것이다.


김부식은 고려시대에 편찬되었던 『구삼국사기』 혹은 『고기』라 불렸던 역사책의 폐단을 보완하는 새로운 역사책을 만들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의 역사 기술 특히 『춘추』와 『사기』에서 배워온 바, 고증된 역사 그리고 권계와 징험이 가능한 포폄(褒貶)의 역사를 쓰겠다는 새로운 역사의식 때문이었다. 『구삼국사기』는 이러한 중국의 역사기술 의식에 의거해서 편찬된 책은 아니었던 듯하다. 『구삼국사기』에는 한반도에서 시작된 ‘국가’의 시조에 관한 일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김부식은 증험할 수 없다 하여 삼국 이전의 역사는 『삼국사기』에서 제외하고 중국에 비견하여 부끄러울 것 없고 고증 가능한 ‘삼국’으로부터 우리의 역사를 구성하였다. 김부식으로서는 다른 역사를 구성하여 『구삼국사기』를 넘어서고 싶었던 것이다. 김부식은 ‘증험할 수 있는 사실’만을 역사로 다루는 새로운 시각을 지녔던 것이다. 





일연, 허탄한 이야기도 역사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사건을 담아낸 역사책 『삼국유사』. 승려 일연(1206-1289)은 기이하고 허탄하다는 이유 때문에 버려진 이야기들을 수습하여 『삼국사기』와는 다른 ‘또 하나의 삼국 역사’를 구성한다. 증명하기 어렵고 경험의 세계로는 설명이 안 되는, 기껏 설화로나 취급될 법한 이야기들에서 역사의 진실을 보았던 일연. 일연이 아니었다면 ‘괴력난신’의 이야기들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마치 가공한 듯한 신이한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찾아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일연이 전하고 싶었던 바, 역사적 진실과 삶의 역동성을 우리의 현실로 만드는 것. 이것이 『삼국유사』와 만나는 방법이 아닐까?


13세기의 일연은 『삼국사기』를 넘어서고 싶었다. 『삼국사기』가 그어놓은 역사의 경계를 뛰어넘고자 했다. 앞서의 역사서를 뛰어넘어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어보려고 했다.


대개 옛 성인이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가르침을 베풀 때에는 괴이한 일과 헛된 용맹, 그리고 어지러운 일과 귀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날 때에는 부명과 도록을 받들어, 반드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은 뒤에야 큰 변화를 타서 천자의 지위를 얻어 왕업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에서 글씨가 나타나 성인이 태어났다. 심지어는 무지개가 신모를 둘러 복희를 낳았고, 용이 여등과 교접해 염제(신농씨)를 낳았다.
…이 뒤의 일들을 어찌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하고 기이한 데서 나왔다 한들 어찌 괴이하랴. 이것이 기이를 여러 편 앞에 두는 까닭이다. 나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삼국유사』


김부식은 건국신화와 같은 괴이한 일들을 믿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명왕신화, 혁거세신화 등 삼국의 건국신화가 전해진 것이 오래되어 실제의 일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록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반면 일연은 제왕이나 고승 또는 치열하고 강도 높은 신앙심을 가진 존재들 즉 성인에 준하는 인물들은 분명 하늘이 내렸기 때문에 보통사람과 다르게 이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혹은 남다른 행위를 하면 그에 합당한 이적이 뒤따른다고 생각했다. 일연이 보기에 이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이었다. 일연에게 역사적 진실은 객관적 사실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었다. 사건이 전하는 바, 신성함과 감동과 기대(희망)가 역사의 심급(審級 instance)이라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일연은 괴력난신의 이야기들 중에 왕조와 관련된 이적들, 종교적 이적들을 기록했다. 김부식이 유가적 합리주의에 입각해서 역사를 기록했다면, 일연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신비, 종교적 경이에서 역사 기술의 의미를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신비, 종교적 경이에서 역사 기술의 의미를 찾아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까지 『삼국유사』는 역사가들에게 “허탄하다” 혹은 “황탄하다”고 평가받았다. 한반도의 고대사를 고증하기 위해 『삼국유사』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더라도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대체적 반응은 『삼국유사』속의 허황한, 검증되기 어려운 괴이한 사건들은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근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삼국유사』는 대단히 호평 받았다. ‘단군조선’이라는 우리의 뿌리를 수록한 일연의 역사기술 때문이었다. 단군조선은 조선시대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계속 주목받은 부분이지만, 근대사가들에 의해 격찬되었다. 이들에 의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전적으로 비교 당했다. 『삼국유사』가 지식인의 역사에서 민중의 역사로, 사대의 역사에서 자주의 역사로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삼국유사』가 재발견된 것은 우리 학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다. 도쿄제대 사학과의 시라토리 구라기치(1865-1942)가 「단군고」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이 1894년 1월이었다.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도쿄 제대로 가져간 장본인이 시라토리. 시라토리는 “『삼국사기』는 중국의 사적에서 거의 절반 이상을 표절했다. 『삼국유사』는 오리지널 현물을 가지고 있으나 가치는 그다지 크지 않다. 『삼국사기』보다는 이 『삼국유사』가 조선 고유의 것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 점에서 나는 『삼국사기』보다는 『삼국유사』 쪽이 가치 있다고 받아들이고 있다.”(고운기,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현암사) 라고 썼다.


그리고 1904년 8월 도교제국대학에서 『삼국유사』가 출판되었다. 일본에 공부하러 갔던 최남선은 이 책을 샀고,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에다 일연의 『삼국유사』를 실었다. 시라토리는 『삼국유사』를 조선의 고유함을 담은 역사서로 『삼국사기』보다는 가치있게 받아들였고, 우리의 근대사가들도 이와 같은 평가의 연장선상에서 더 적극적으로 『삼국유사』를 긍정했던 것이다.


우리 한반도는 단군의 고조선으로부터 시작된다. 『고기』에는 실렸지만, 『삼국사기』에는 없는 이야기. 일연은 한반도의 국가 기원을 확실하게 못 박았다. 일연은 신채호와 최남선에게 구세주였고, 우리에겐 조상의 뿌리를 알게 한 은인이다. 이런 상고사를 싣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지나치게 평범하고 지나치게 현실적일 뻔했다. 신비와 고증을 오가는 『삼국유사』의 기술 덕택에 우리는 고대와 현재를 환상적으로 넘나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단군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실려 있지 않다. 그림은 조서 후기 초상화가 채용신(1848~1941)이 그린 단군.




야사는 민중적인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근대초기의 평가를 이어받아 『삼국유사』의 서민성을 적극적으로 호평했다. “이민족의 침입 및 문무 귀족의 횡포에 의해 야기된 자주성의 상실, 서민의 혹독한 고통에 대한 자각으로 민족사의 자주성 강조와 강렬한 서민의식이 담겨져 있다. 단군신화, 불국토사상, 풍부한 민중관계 설화가 이를 대변한다.”


『삼국유사』는 관찬이 아니라 개인이 편찬한 것이고, 유학적인 역사의식에 입각한 정통 역사 기술이 아니라 야사 즉 설화적인 기술이라 더 각광받았으며, 이 덕분에 자주적·민중적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까지 받았다. 이런 평가는 전적으로 옳은가? 정사에는 수록하기 어려운, 떠도는 이야기를 담았다고 민중의식이라 말할 수 있는가? 단군조선부터 시작하여 신라, 고구려, 백제 이전의 나라들의 실체를 인정하고, 신라 불국토사상을 담고 있다고 하여 민족혼을 일깨우는 자주의식이라 말할 수 있는가? 『삼국사기』에 대해 그랬듯이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부분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설화를 수집하여 역사를 구성한 일연이 서민적인 고증이었으리라고 종종 상상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착각이다. 일연은 김부식과 마찬가지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던 최상층 지식인이었다. 조선시대와 다르게 신라, 고려의 승려들은 학식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신분적으로 최상위 계층이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승려들은 조선시대 사대부 문인들만큼이나 높은 학식과 문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 예로 박을 두드리며 노래했던 거리의 승려, 원효대사는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를 지은 이론가였다는 사실.


작년에 가장 오래된 원효의『대승기신론소』가 독일에서 발견되었다. 북드라망 출판사에는 『낭송 대승기신론』이 있다^^



일연은 무신집권기, 무신정권에 반발해 신라부흥운동을 기도하거나 몽고에 대한 저항의식을 보여준 적이 없다. 『삼국유사』가 경상도를 기반으로 한 반무신파(反武臣派)들에 의한 신라정통의식의 산물이자, 몽고 침입에 항거한 민족의식의 소산이었다는 것은 그 시대사를 견강부회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일연은 경주의 장산 출신으로 14살에 출가하여 선문(禪門)의 하나였던 가지산문파로 불도를 수행했다. 가지산문파는 통일신라 헌덕왕 때 보조선사 체징이 남종선의 도의를 종조로 삼아 가지산 보림사에서 일으킨 선문(禪門)의 하나다. 가지산은 경남 울주, 밀양, 청도에 걸쳐 있는 산이다. 가지산문파는 일연의 활약 이전에는 고려의 불교종단 내에서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무신란 이후 신앙결사운동으로 불교 대중화에 힘썼던 지눌의 수선사와 요세(了世)의 백련사가 고려 승단의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가지산문파가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일연이 충렬왕의 총애를 받게 된 이후였다. 일연은 박송비, 나유와 같은 무신귀족, 이덕손, 민훤, 염승익과 같은 문신귀족들의 비호을 받으며 부각되었다. 나중에 국존(國尊)에 임명되는 것도 이들의 주선에 의해 가능했을 것이다. 이들 세력은 친원적이고 보수적이던 당시의 권문세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가지산문의 부흥은 일연의 제자인 무극, 보우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삼국유사』편찬에도 관여했던 무극은 충숙왕 1년 왕사로 봉해지고, 보우 역시 국사에 봉해져 광대한 농장을 확대하는 한편 원나라에 드나들며 임제종을 도입했던 인물이다.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고승 일연이 신이한 이야기에 관심을 지녔던 것은 당대의 문화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일연이 설화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이 시대 지식인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일정한 ‘양식’과 관련된 것이었다. 고려 문종(11세기) 때 박인량이 설화집 『수이전』을 이미 편찬했고, 이규보(1168-1241)는 1193년에 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었으며, 이승휴(1224-1330)는 일연의 『삼국유사』가 완성된 1289년보다 2년 앞선 1287년에 『제왕운기』를 지었다. 이 시대 지식인들은 괴이한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지괴류(志怪類)와 설화에 대한 관심. 1080년 북송 때 이방이 편찬한 『태평광기』가 고려의 정식 요청으로 수입되었고, 그 이후 고려 지식인들에게 익숙한 책이었다.(『한림별곡』의 태평광기 400여권) 이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이계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계의 동물, 귀신들이 인간과 소통 가능하다는 점. 인간세계에 일어나는 많은 이적들. 불가사의한 현상들이 있음직한 일이라는 믿음!  


동명왕에 대한 신기한 이야기는 세상에 널리 전파되어 아무리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이라도 이 이야기만은 잘할 줄 안다. 나도 일찍 이 이야기를 들었건만 그때 나는 웃고 말았다. 공자가 괴상하고 요란한 귀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기에 이 역시 황당하고 괴이한 이야긴지라 우리들이 즐겨 말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 <위서>와 <통전>을 읽으니 거기에 또한 이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내용이 간략하여 상세하지 못했다. 자기네 중국 이야기라면 자세히 썼으련만 다른 나라 이야기라 이다지 간략하게 쓴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 계축년(1193) 4월 <구삼국사>를 구했는데 거기에 실린 ‘동명왕본기’를 보니 신비로운 사적이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역시 잘 믿기지 않아 그저 괴상하고 황당한 이야기려니 하였다. 그러다가 여러 번 거듭 읽으면서 참뜻을 생각하고 그 근원을 찾아보니, 이것은 황당한 것이 아니요 성스러운 것이며 괴상한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것이었다. 하물며 나라 역사의 정직한 필치에 무슨 거짓이 있겠는가!

김부식 공이 다시 <국사>를 편찬하면서 동명왕의 사적을 자못 간략하게 다루었는데, 공은 아마 국사란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라 매우 이상한 이야기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함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생각건대 당나라 ‘현종본기’와 양귀비전‘을 보면 방사가 하늘과 땅을 오르내렸다는 이야기가 없는데, 시인 백낙천이 그러한 이야기가 희미해져 없어질까 봐 ’장한가‘를 지어 그 사연을 밝혀 두었다. 실상 그 이야기야 거칠고 음탕하며 황당한 것이지만 그래도 시로 노래하여 뒷세상에 전하였거늘 하물며 우리 동명왕의 이야기랴. 동명왕의 이야기는 변화무쌍한 신비한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로 나라가 처음 창건되던 때의 신성한 자취를 나타내려 한 것이다. 이것을 이제 서술해 두지 않으면 뒷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므로 내 노래로 이 사적을 기록하는 것이니 우리나라가 본디 성인이 이룩한 나라임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다.

내 성질이 본디 소박하여
신기한 이야기 좋아하지 않아
처음에 동명왕의 사적을 보고
황당하고 괴이한 일이라 하였노라
그 다음 천천히 살펴보니
그 변화란 헤아릴 수 없구나.
역사에 기록된 바른 필치라
글자 한 자인들 헛될 수 있으랴.
신성하고 또 신성하도다
만세에 길이 법이 되리라.
생각하면 나라를 처음 세우신
임금이 성스럽지 않을 수 있으랴.
......
예부터 제왕이 일어날 때는 상서로운 징조 이렇게 많았지만
그다음 자손들이 게으르고 거칠어
조상의 업적을 잇지 못하나니
옛 법을 잘 지키는 임금은
어려움 겪을수록 스스로 경계하도다.
임금은 언제나 너그럽고 어질어
예절과 의리로 백성을 다스리며
이 법 자자손손 전하여
천만년토록 나라를 편히 하리.


- 이규보, 「동명왕편」


이렇듯 지괴류나 설화집의 유행 속에서 『삼국유사』는 탄생했다. 객관적 사실도 역사의 구성물이지만, 기괴하고 신이해서 버려진 이야기들도 역사구성물이 될 수 있다는 각성에 의해 야사 『삼국유사』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설화집의 유행 속에서 『삼국유사』는 탄생했다." 그림은 고려인 귀족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아집도대련〉


그렇다고 “이야기에 의한, 이야기를 위햔” 역사 서술을 통해 역사의 개념을 변주시킨 일연의 공로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고증되지는 않았지만 괴력난신의 이야기도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일연의 의식은 분명 『삼국사기』의 역사의식을 뛰어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무조건 자주적이고, 무조건 민중적일 거라는, 혹은 우리 고유의 혼을 담아냈을 거라는 확대해석은 경계하자는 말이다.


일연의 『삼국유사』가 우리에게 여전히 감동적인 것은 ‘민중적이거나 자주적인 면에 있지는 않다. 『삼국사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삼국사기』가 쓸 수 없었던 신이하고도 허탄한(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를 역사의 자리에 들여온 데 있을 것이다. 즉 『삼국사기』가 ‘국가’ 내부의 역사를 기술했다면, 『삼국유사』는 ‘국가’ 외부의 역사를 기술했다. 다양한 시각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역사 텍스트인 것이다. 



김부식과 일연, 운명공동체


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 어떤 것이 진실한 역사인지를 따지기는 어렵다. 어느 것을 믿느냐는 역사서를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진실은 그 자체로 명백한 지표가 아니라 가장 가변적인 척도이다.“ ”진실은 진실이 변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연역적이고 양자화된 물리학이라는 하나의 진실 프로그램 안에서 진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일리아드를 믿는다면 이것은 신화적 프로그램 안에서 그에 못지않게 진실인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그렇다. 우리가 설령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라신의 비극을 허구로 여긴다 하더라도 그것을 읽는 동안은 그것을 믿으며 극장 좌석에서 눈물을 흘린다. 엘리스의 세계는 그 마법 세계의 프로그램 안에서 일상 세계만큼 수긍이 가고 진실되며, 하나의 세계로서 현실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주의 문학이 가장 그럴듯한 꾸밈이고(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쓸데없는 열정이고(마법세계가 그만 못지않게 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 가장 극단적인 궤변이다.(현실을 가지고 현실적인 것을 만드는 작업, 얼마나 세련된 기교인가!) 허구는 진실의 대립항이 아니라 진실의 부산물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여전히 그것을 믿는 사회가 있고, 믿기를 그치는 다른 사회가 있다.”(폴 벤느,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43쪽)  


『삼국사기』가 ‘국가’ 내부의 역사를 기술했다면, 『삼국유사』는 ‘국가’ 외부의 역사를 기술했다. 다양한 시각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역사 텍스트인 것이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김부식과 일연. 서로가 삼국역사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역할을 했던 두 사람. 우리에게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전해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운명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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