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이 아니라 삼국이 있었네! #2
삼국,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
우리가 늘 생각하는 가깝지만 먼 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이다. 적국이기도 하고 협력국이기도 한 이웃 나라. 중국에 대해 신라, 고구려, 백제는 ‘해동(海東)’ 혹은 ‘동이(東夷)’로 묶여서 지칭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신라, 고구려, 백제는 ‘우리는 하나’라고 의식하지 않는다. 지금의 남한과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처럼 ‘분열되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통일되어야 할’ 한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삼국의 기원과 형성이 다르듯 민족이라는 공감대는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신라, 고구려, 백제의 관계는 동북아시아 주변국 즉 중국, 돌궐, 말갈, 왜국과의 관계처럼 서로에 대해 ‘냉정’했다.
삼국은 서로에 대해 냉혹한 이해관계 위에서 움직일 뿐이었다. 혈연적 유대감이 있어야 한다는 건 우리들이 한민족에 부여하는 당위적 윤리에 기초한 것이다. 애초에 다른 나라라 인식하고 그런 상상을 해본 적 없는 삼국시대 사람들에게 그 이상을 기대하는 건, 상상의 공동체 민족관념에 투철한 우리들의 욕망의 투영일 뿐이다.
영화 <황산벌>을 보면 삼국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백제와 신라는 속국?
고구려는 유리왕 때부터 요동을 차지하려는 중국과 대치하고 있었다. 한나라 왕망은 고구려왕의 이름을 하구려후라고 고치고 천하에 포고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와 한나라는 요동과 현도를 경계로 빈번하게 전투를 벌였다. 고구려는 주변에 이웃한 선비족, 말갈족, 예맥족들을 제압하여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들을 전쟁에 동원했다. 고구려 초기 부여는 고구려의 적대국으로 한나라를 도와주면서 호시탐탐 고구려 영토를 노리다가, 대무신왕 때 멸망하고 만다. 동천왕 이후 중국의 위나라(한나라가 위촉오 삼국으로 분열)는 환도성을 공격하면서 고구려를 압박했고, 동북쪽의 중국 연나라도 요동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를 침공한다. 고구려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 진나라에는 사신을 보내 조공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위나라 연나라와는 끊임없이 전투를 치러야 했다.
고국원왕 때부터 고구려는 백제와 영토 싸움을 본격화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그 뿌리로 보자면 부여로부터 분리되어 나왔지만 서로에 대해 격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적개심은 북쪽의 이웃 나라 중국에 대한 것보다 더 심했다. 고국원왕 41년 백제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을 공격하므로 왕이 방어하다 화살에 맞아 죽는다. 물론 백제가 고구려에 갖는 적개심도 그에 못지않아, 위나라에 보낸 표문에서 ‘쇠(고국원왕의 이름)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다’고 표현한다. 고국양왕 때 백제는 도압성을 쳐부수고 고구려 백성 2백 명을 사로잡아 간다.
광개토대왕은 북쪽으로는 거란을 치고, 연나라의 요동 정벌을 막아내면서 백제의 영토를 차지하여 한반도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백제의 관미성을 함락시키고, 패수가에서 백제군사 8천명을 사로잡는 등 백제와의 싸움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운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아들 장수왕은 위나라에는 신하의 자세로 조공을 바치며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연나라와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는 토벌 전략을 구사한다. 북쪽 위나라에 대해서는 수비를, 남쪽으로는 영토확장을 꾀했던 것이다. 결국 475년 백제의 한성까지 함락시키고 백제왕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사로잡아 돌아온다. 고구려는 이때에도 말갈과는 친선을 유지하면서 말갈의 군사원조를 통해 주변국들을 정리하는 정책을 펼친다.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관해 적혀있는 광개토대왕릉비.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무덤에 세운 비문에 의하면,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취급된다. 고구려는 신라, 백제를 동쪽 오랑캐 즉 ‘동이’라 지칭하며, 자신들의 나라가 천하의 중심임을 천명한다. 고구려는 동이족 백제와 신라를 정벌의 대상으로 보면서, 일본이나 중국보다 훨씬 적대적으로 취급한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신라, 고구려, 백제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멀어도 너무 멀었다. 이 세 나라는 연나라나 왜국과 마찬가지로 원수요, 적대국일 뿐이다.
장수왕 이후로도 백제에 대한 침공은 그치지 않는다. 양원왕 때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에 대하여 연합정책을 펼친다. 신라는 백제에 군사를 원조하기도 하고, 백제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사이 고구려의 성을 빼앗는 등 실속을 챙긴다.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에 조공도 바쳤지만 동시에 그들의 침공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방어했다. 그러나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수차례 막아내면서 국력이 휘청거리게 된다. 더구나 당나라 중심으로 재편된 동아시아 세계 질서를 읽어내지 못해 나당 연합군에게 밀려 끝내는 나라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는다.
『삼국사기』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보면 신라나 백제나 중국이나 왜나 모두 똑같은 비아(非我)일 뿐이다. 한반도 상에 이웃해 있다고, 민족적 동질감(?)이 있다고 신라와 백제가 더 가까울 이유는 없었다. 고구려와 경계하고 있던 한나라, 연나라, 수나라, 당나라가 중국이라 특별히 더 적대적일 이유는 없었다. 신라나 백제나 중국이나 고구려 입장에서는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위험한 이웃나라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구려는 선비족, 말갈족, 양맥, 숙신족에게 더 동족과 같은 친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시대의 고구려는 그냥 동북아시아의 독립된 한 나라로, 통일신라 혹은 고려의 전사가 되는 나라이다. 김한규의 말대로 중국문화권에도, 한반도 문화권에도 귀속되지 않는 요동공동체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니 삼국시대의 고구려를 그대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 삼국시대의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서 중국과도 다르고, 삼한의 민족과도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시간을 일구며 살아갔던 것이다.
고구려가 남하 정책을 펼치며 한반도 전역을 노린 순간부터, 그리고 고구려의 유민들이 신라에 병탄된 순간부터 한민족의 역사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발해와 말갈, 돌궐에 편입된 고구려 유민은 그들만의 계보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발해와 말갈과 돌궐에 대한 동족적 친연성을 유지하며 그들의 역사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이들은 삼한에 통합된 고구려 유민들과는 다른 시간과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기원을 따지면 합해지는 지점이 있다하더라도 공동체가 갈리고, 또 다르게 섞이면서 그 이전의 고구려족이라는 원형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러니, 그 시절, 그 땅의 현재를 실감하는 게 중요하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먼 나라 원수 나라로 여겼다. 중국과 왜를 그렇게 취급했듯.
당시 고구려 군인들은 "에잇, 백제놈들, 에잇, 신라놈들!" 그랬을지도 모른다.
신라와 백제, 먼 나라 원수 사이?
백제는 지정학적으로 말갈, 고구려, 신라의 국경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중국과의 대치가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인접한 낙랑의 침입이 골칫거리였을 뿐, 중국은 고구려가 막아주고 있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고구려를 막기 위해 중국과의 선린관계에 신경을 쓸 따름이었다. 위나라와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 정벌을 부추겼으나 백제의 계략은 번번히 실패한다. 백제는 이 일로 위나라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기도 한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주로 말갈의 침략과 신라에 대한 백제의 침공이 주로 서술된다. 백제는 신라를 수시로 침공하여 약탈하고 백성들을 잡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적으로 왜국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왕자를 볼모로 보내거나 사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보냈다. 백제 입장에서 왜국의 협력도 필요했고, 만만히 제압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선린 외교를 펼쳤던 것이다.
이에 비해 신라는 말갈, 왜, 백제, 고구려의 침공을 자주 받았다. 고구려와 백제보다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방어에 힘을 써야만 했다. 동시에 약소국으로써 고구려에 혹은 왜국에 왕자를 볼모로 보내는 등, 굴욕적인 외교를 펼치는 상황이 오래갔던 것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원수의 나라로 여긴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듯하다. 신라인들이 백제나 고구려에 대해 갖는 적개심은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갖는 적개심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 뿌리 깊은 것이었다.
17살의 김유신이 중악 석굴에 들어가서 몸을 정결히 하고 신에게 맹세한 바가 이것이었다. "적국들이 무도하여 이리나 범과 같이 우리나라의 영역을 소란케하여 무사한 해가 거의 없습니다. 내가 한갓 미약한 몸으로 재능과 역량을 짐작하지 않고 환난을 숙청하기로 결심했으니 하늘은 굽어살펴 나를 도와주소서." 김유신의 원한과 신라인들의 피해의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된다. 신라, 고구려, 백제는 빼앗고 뺏기고, 죽이고 죽는 관계 속에 놓여 있었다. 어떤 나라도 동류의식 속에 연대하거나 양보하는 경우란 없었다.
신라와 백제 역시 한민족이라는 의식이 아니라 국경을 맞대고 시도때도 없이 전쟁을 벌이던 '적국'이라고 보아야 맞다.
신라, 고구려, 백제가 대치했을 때 백성들은 어떠했을까? 사실 신라, 고구려, 백제가 국가의 기틀을 잡고 강대해지기까지는 한반도상에 수많은 작은 나라들이 존립하고 있었다. 이들을 병합하면서 신라, 고구려, 백제라는 삼국이 정립되었던 것인바. 백성들에게 내 나라라는 개념이 얼마나 강고했을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영역에서 살고 있느냐가 중요했을 터, 떠나기도 쉬운 게 백성이었다. 나물니사금(신라 17대왕, 奈勿王) 18년에 백제의 독산성주가 3백 명의 무리를 이끌고 신라에 귀순했다. 백제왕이 화친하는 입장에서 도망간 백성을 받아들인 것은 도리가 아니니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나물니사금은 이렇게 화답했다.
“백성이란 것은 일정한 지향이 없기 때문에 생각이 있으면 오고 싫으면 가나니 본시 그들의 처지가 그러한 것이다. 대왕이 백성들의 안착되지 못한 것은 근심하지 않고 나에 대한 책망이 어찌 이다지 심할꼬?”
- 신라본기, 나물니사금 18년. 『삼국사기』 상, 신서원, 73쪽
백제왕이 이 말을 듣고 말을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공동체적 연대감, 민족적 연대감, 국경이란 신기루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굉장히 견고하다고 믿지만 무너지기 쉬운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무력에 의해 영토가 나눠지고, 무력에 의해 영토가 합해지는 것은 자명한 현실이다. 민족이라는 동질감이 통일을 부추기는 것도 아니고, 분열을 막는 것도 아니다. 편하게 살기 위해, 혹은 이익을 위해 우리는 나뉘고 합치고 하는 게 아닌지.
이렇게 신라, 고구려, 백제는 서로 대치했다. 신라의 전세가 진평왕 이후 서서히 역전되기까지 삼국은 아와 비아라는 대립적인 관계로서 약탈과 병탄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진평왕 즈음부터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요청하여 군사를 동원한다. 이후에는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토벌을 요청한다. 동아시아 패권은 당나라가 좌지우지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어낸 신라는 당나라를 이용하여 고구려, 백제를 물리치고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가 된다. 사실상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한반도라는 심상지리는 신라의 통일 이후에 만들어진다. 하나의 통일국가와 통합된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제공하는 계기도 ‘통일신라 이후’이다. 통일 신라 이전 한반도에는 삼국이 있었다. 그것도 다원적인 종족의 구성체로 이루어진 서로 다른 나라인 삼국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에 대해 결단코 연대감 내지 동류라는 상상을 한 적이 없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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