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책 읽기'
연재를 시작하며
― 왜 역사책 읽기인가?
역사 서술, N개의 기원과 목표!
단도직입, 우리는 역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역사책을 읽는 것이다. 과거의 지겹도록 많은 사실들의 가감 없는 나열을 역사라고 생각하지 말자. 역사는 늘 역사가에 의해 선택되고 계열화된 과거 사건들의 서사였다. 그러니까 최대한 객관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나열하겠다는 태도도 역사가 개인의 욕심이자 취향이다!
역사책에 수록된 과거의 사실들이 ‘모두에게’ 사건이거나 ‘모두에게’ 진실일 수 있으려면 수십억만년동안 지구상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해도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기는 언감생심 꿈꾸기 어렵다. 나의 과거조차 내 기억 속에서 왜곡되기 일쑤니까. 역사책에 담긴 역사가 적어도 사건이고 진실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게 역사를 배치한 역사가에게 사건이자 진실이고, 그 역사책의 서사를 신뢰하는 독자들에게 사건이자 진실일 뿐이다. 사건과 진실은 역사책만큼 다르고 많다. 하여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진실은 오직 진실이 변한다는 데 있다!”
왕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사관도 사건을 선별해서 기록했다.
과거에 존재했다면 그 어떤 것도 역사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역사학은 과학이 아니다. … 따라서 역사의 장은 거기서 발견되는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어야만 한다는 한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불확정적이다.
- 폴 벤느, 이상길‧김현경 옮김, 『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새물결, 2004, 36-37쪽.
그러니 역사의 기원과 목표 또한 역사가들의 수만큼 많다. 그래서 역사를 기술하는 이유도 목표도 N개다. 단 하나의 역사의 기원과 목표는 없다. 역사가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과거를 재구성한다. 왜 역사를 기술하는지, 그 답은 역사책을 편찬한 역사가에게 달려있다.
역사가에게 중요한 사건은 흥미로운 사건이다. 중요성이라는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진지한가를 보여줄 따름이다.
어떤 사건은 역사적이고 어떤 사건은 역사적이 아닌가를 구분할 수 있는가? 한계를 알 수조차 없는 비-사건적인 것의 엄청난 면적은 개간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비-사건적인 것은 아직까지 사건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건들이다. … 우리가 역사적이라고 의식하고 있지 못한 역사성이 비-사건적인 것이다.
어떤 사실은 역사적이고 또 다른 사실은 잊혀질 만한 일화라고 단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실은 계열 속으로 들어가며, 그 계열 속에서만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 같은 책, 40-48쪽.
결국 역사를 읽고 공부한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의 혹은 사건들의 집합체로서, 혹은 병렬체로서의 연대기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 아래에서 직조된 역사기술을 이해하는 작업이다. 역사가들은 저마다 무엇을 기억해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함으로써 다른 역사 만들기를 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무엇에 대해. 어떤 식으로 과거를 선별하여 계열화했는가를 살피는 과정, 이것이 진정 탐史의 실질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길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왜 그 길을 택했는가를 살피는 것이 '진정한 탐史'이다.
참을 수 없는 ‘역사주의’의 무게를 넘어
그러나 역사를 접할 때 우리들은 무겁고 엄숙해지기 십상이다. 역사서술의 기원과 목표가 N개임을 망각하거나 모르기 때문이다. 장구한 시간의 궤적들이 주는 무게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과거를 통해 현재의 어떤 것들의, 혹은 현재의 모든 것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욕심 때문이다. 물론 호기심 차원에서 과거를 탐구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일단 역사하면 기원 찾기 혹은 뿌리 찾기를 상상하게 된다. 흔히 전통 혹은 정통을 발견해 내거나, 혹은 어떤 정체성의 지속과 변이를 밝히려는 시도 모두 그 줄기는 한 뿌리에서 만난다. 국가, 민족, 국민, 시민이라는 이름의 현재, 혹은 민족혼, 민족정신, 동아시아의 보편성 혹은 그런 이름들로 불려지는, 나를 찾아가는 과거로의 여정이 역사라는 이름에 담긴다. 이만큼 ‘성숙하고 혹은 완전한’ 나의 현재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어떤 단계를 거쳤는지 찾기 위해 역사 속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책을 찾는 이유도 분명하다. 나는 누구인가? 동아시아인 나는 어쩌다 이렇게 살게 되었고, 이렇게 사고하게 되었는가? 나와 나의 사고, 나의 시대, 환경은 어디에서 기원했는가가 궁금해서 과거를 뒤적인다. 그 기원을 찾는 작업은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라는 시간일 수 있다. 근대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는지 그 근원을 파헤치고 싶은 욕망이 살아 움직인다.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왔는지 그 불변의 본질을 찾으려는, 견고함에의 목마름! 고정된 것은 아름답다 혹은 뿌리는 아름답다, 라는 믿음에 기대어 연어의 회귀처럼 과거로 회귀한다. 물론 이성의 힘으로는 고정된 것을 혐오하며, 기원을 찾아내려는 그 진부함을 경원시한다. 일용하는 물건에 대해서는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낡았다고 취급하며 금방 싫증내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갈구한다.
그 때문에 고대사에서 그 뿌리가 확실하게 발견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그 자리에서 우리의 고대사 텍스트인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만나고, 이것만으로는 미진하여 동아시아인으로서의 ‘나’란 존재의 정체성을 궁금해 하며 『서경』『춘추』『사기』의 세계로 진입한다. 다소 비장하게 고대라는 그 엄청난 시간들과 싸워볼 마음으로 역사라는 타임머신에 탑승한다.
마치 근대라는 지금-여기의 시공간을 예비하기 위해 과거가 존재하는 것처럼, 과거의 시간들이 현재의 상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발전해온 것처럼, 근대라는 시공간을 배태한 ‘씨앗’을 확인하러 과거의 사건들 속으로 기꺼이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역사를 사유할 때 늘 작동하는 바, 근대의 역사주의이다. 예전의 우리들이 지금의 우리와 얼마나 달랐는지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우리들이 어떻게 근대를 향해 진격해왔는지를 확인하는 작업! 이럴 때 과거는 근대의 태아로 취급된다. 그렇지만 이렇게 과거를 바라볼 때 나의 기원이 몇 천 년 전의 그 어디쯤에서 닻을 내렸으리라는 상상만으로 뿌듯해진다. 나는 벌써 뼈대 있는 가문(유구한 역사)의 일원이 된 듯 마음이 흐믓하다.
우리는 그렇게 동아시아 고대의 역사책들과 처음 마주친다. 그러나 이 책들은 녹록치 않다. 국사책이나 세계사책에서 익히 봐왔던 역사적 사건들이 분명 언급되었지만, 이 고대인들에 의해 편찬된 역사책 속에서 이 사건들은 다른 시선, 다른 의미로 계열화되어 있다. 이 책들은 분명 근대의 외부에 놓여 있다.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근대의 삶을 예견하거나 예비하는 어떤 정체성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나’란 존재의 씨앗을 확인하는 일은 더욱 쉽지 않다. 이 역사책들에는 지금-여기의 근대와는 완벽하게 다른 시공간이 존재했으며 그 시공간에 자리한 존재들은 낯설다. 그리고 그 역사책들은 근대의 역사관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 의해 기술되어 있다. 게다가 역사책들마다 과거를 기술하는 목표가 달랐고, 방식도 달랐다. 이렇게 되면 이 탐史는 필연적으로 애초의 목표와는 다른 길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매력적이게도 과거와 현재의 연속과 비-연속의 사이를 유영하게 만든다.
탐史, 역사가의 마음 읽기!
우리의 욕망과 다르게 고대의 역사책을 읽으면 ‘역사주의’의 무게로부터 오히려 해방된다. 국가, 국민, 민족, 나라는 정체성은 다만 상상의 원형질이며, 역사는 전적으로 사실인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전적으로 허구인 것도 아닌 이야기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사실과 진실의 층위는 역사서마다 다르며, 역사는 늘 과거들에 대한 특정한 계열화라는 점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하면 역사주의로부터 해방되고, 역사의 무게로부터 가벼워진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시간을 유영하는 모험!
그대가 태사공의 『사기 』를 읽었으되 그 글만을 읽었을 뿐 그 마음은 읽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항우본기」를 읽고서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장면이나 생각하고, 「자객열전」을 읽고서 고점리가 축을 치던 장면이나 생각하니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늙은 서생들이 늘 해대는 케케묵은 이야기로서, 또한 '살강 밑에서 숟가락 주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린아이들이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간파해 낼 수 있습니다. 앞다리를 반쯤 꿇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발꿈치를 들고서 두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만들어 다가가는데,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나비가 그만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기에 어이없어 웃다가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성을 내기도 하지요.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 』를 저술할 때의 마음입니다.
- 박지원 지음, 「경지에게 답함」, 『연암집 하』, 돌베개, 367-368쪽.
조선후기 최고의 글쟁이 박지원은 말한다. 아슬아슬 나비를 잡으려 애썼으나 나비가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머쓱해진 사마천의 마음을 읽어라. 사건의 진실을 포착하려 애타게 다가가지만, 끝내 사건의 진실을 다 포착할 없음을 깨달아 무색해진 사마천의 마음! 역사책에서 볼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왜 그 사건을 사건으로 기술했는지 역사가의 마음에 접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조차 사건의 진실에 다가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진실은 저만치 달아나버리고 만다니, 그 마음을 알았다면 사마천이 그려낸 역사적 사건에서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마천이 역사적 사건을 그리면서 이미 깨달았고, 박지원이 사마천의 『사기』를 읽고 깨달은 그 경지를 우리도 역사책을 읽으면서 탐험하는 것.
우리가 할 일은 『사기』에 포착된 역사적 진실과 함께 사마천이 놓쳐버린 그 진실을 잡기 위해 과거의 사건들에 살포시 간절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나비를 잡으려면 나비의 리듬을 타야하듯, 역사책의 역사를 잡으려면 그 역사적 사건을 이해한 역사가의 마음 그 너머까지 포착해야 한다. 그래야 그 역사와 가까워진다. 결국 사마천이 보고자했던, 그리고 놓쳐서 무색해진 그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역사책 읽기다.
그러니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동아시아의 역사책이 단 하나의 역사의 기원과 목표로 기술되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자.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라는 시공간에서 배태된 역사관을 전제하고 동아시아 역사책을 읽지는 말자. 즉 근대적 역사주의에 입각해서 동아시아 역사책을 해부하지 말자. 직선적인 시간관으로 모든 과거의 시간들이 근대라는 목표를 향해 진보했고, 과거라는 시공간은 모두 근대를 예비하는 장이었다는 것은 우리의 망상일 뿐이다. 동아시아 고대의 역사책들은 근대의 외부에서 탄생했으며, 역사가에 따라 역사를 기술하는 목표가 달랐다. 하여, 나의 역사관을 내려놓고 경쾌하고 유쾌한 마음으로 역사책들과 대면하자. 고대의 역사적 시간을 재구성하고 역사적 사건들을 계열화한, 김부식, 일연, 공자, 사마천의 마음을 따라가 보자.
하나하나 더듬더듬 길을 찾아가며 따라가 보자.
그 시작으로『삼국사기』를 선택했다. 아니 『삼국사기』를 읽고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나로 결정된 역사는 없다. 역사가에 따라 사건은 다르며, 역사적 시선 또한 다름을 『삼국사기』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적 지식과 『삼국사기』의 역사적 지식은 동일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싶다. 김부식의 마음을 따라가면서 역사서술이란 얼마나 천양지차인가를 통해 오늘날 우리들이 굳게 믿는 역사주의, 그리고 삶의 진실은 그 실체가 없음을, 역사는 연속이기보다 단절임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 때문에 다음 시간엔 『삼국사기』를 위한 변명으로 본격적인 연재의 문을 열까 한다. 『삼국사기』에 대한 오해와 진실, To be continued!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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