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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톡톡] ‘별 탈 없이 무난한 인간’이 우리의 미래이다

by 북드라망 2016. 3. 17.


‘별 탈 없이 무난한 인간’이 우리의 미래이다



임신 톡톡을 통해 동의보감 부인 편의 내용을 거의 다루었다. 이제 이번을 포함해서 2번의 연재를 남기고 있다. 나는 임신을 한 적도 그러니까 아이를 낳은 적도 없다. 그런데도 임신 톡톡을 연재해 왔다. 전혀 출산 경험이 없는 사람이 건방지게 임신에 대해 감히 쓸 수 있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처음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이것을 쓰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인제 와서 그 이유를 찾은들 무엇 하겠는가. 굳이 말하자면 사주팔자에 비겁이라고 부르는 자매들과 인연이 많아서라고 말하고 싶다. 실제로 난 오 자매 속에서 자랐다. 그런 인연이 동의보감 부인편과의 인연을 닿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임신 톡톡을 연재하면서 알게 된 것은 동의보감 부인편이 단순히 임신만을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첫머리부터 인상적인 명제가 있었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법도는 자식을 얻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 즉 사람이 사람이게 하는 것.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의 문제가 자식을 얻는 것과 관계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식이 없는 사람은 존재 자체가 법도에 어긋난다는 말인가. 처음에 읽을 때 좀 발끈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동의보감 부인 편을 찬찬히 읽다 보면 이런 자의식은 저절로 사라진다. 임신은 그렇게 협소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천지와 리듬을 타면서 늘 새롭게 태어나는 흐름 속에 있으므로 ‘삶 그 자체가 매 순간 새로운 나를 낳는 과정’이다. 새로운 나를 낳는 것, 이것이야말로 덕이 있는 아이를 생산하는 과정이자 사람이 살아가는 법도이다.



인간이란 천지와 리듬을 타면서 늘 새롭게 태어나는 흐름 속에 있다.



동의보감 부인 편은 임신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개입하는 방식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생명 창조란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 또한 우주에 편재한 기가 드러난 형체이기 때문이다. 정기신이란 변화의 흐름을 의미한다. 그 흐름은 아주 다층적이다. 다양한 흐름이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함 속에서 ‘덕이 있는 인간’을 만들겠다는 적극적 의지가 솟아난다. 그렇다고 지금의 과학처럼 생명 조작의 의미는 아니다. 천지자연과 공존하는 존재를 위해 적극적인 개입을 벌인다. 오직 덕이 있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렇다면 덕이 있는 아이란 어떤 아이일까.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그 메시지가 통용은 되는 것일까. 여기 덕이 있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어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먼저 자식을 위해 이름을 짓고 글을 쓴 아버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다음 연재에서 자식을 위해 책을 쓴 어머니를 소개하면서 덕이 있는 아이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자식을 위한다면 이 아버지처럼


“바퀴, 바퀴살, 덮게, 수레 뒤턱 나무 이것들은 모두 수레를 위해 그 맡은 일이 분명한데 ‘수레 앞턱 가로나무(軾)만은 그 하는 일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그 수레 앞턱 가로나무를 없앤다면 그것이 온전한 수레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식아! 나는 네가 그 겉을 꾸미지 않을까 봐 두렵구나. 세상의 모든 수레는 ‘바퀴 자국(轍)’을 따라가는데 수레의 공로를 말할 때는 그 바퀴 자국은 들어가 있지 않다. 비록 수레가 넘어져 말이 죽더라도 화가 바퀴 자국에는 미치지 않는다. 이 바퀴자국(轍)이라는 것은 바로 화와 복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철아! 나는 네가 면하리라 본다.”

─명이자설(名二子說) 소순(蘇洵)문집, 425쪽



적벽부를 지은 시인으로 유명한 소동파의 아버지 소순이 두 아들에게 지어준 글이다. 소동파의 진짜 이름은 소식이다. 식(軾)은 수레 앞턱 가로나무의 식자이다. 수레 앞턱 가로나무는 수레에서 뚜렷한 기능은 없지만, 막상 없으면 수레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한다. 왜 ‘식’이라고 지은 걸까. 소식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세게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역할이 거의 없는 수레 앞턱 가로나무일지라도 그 역할을 해야 하듯이 예의를 차릴 것은 차리면서 자신을 표현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소식은 불의를 참지 못하고 돌직구를 날려서 죽음에 처하는 상황까지 가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부친은 그의 운명을 꿰뚫은 듯 그가 평생 견지해야 할 태도를 이름에 담았다. 이름이 바로 그의 부적이었던 셈.


다음은 동생 소철에 대한 이름의 뜻이다. 소철에서 철(轍)은 바퀴자국의 뜻이다. 수레 앞턱 가로나무는 역할은 없지만 수레의 일부분이긴 하다. 그런데 이젠 수레도 아닌 바퀴자국(轍)이 되라고 한다.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다. 그다음 말은 더 당황스럽다. 수레의 공로에는 바퀴자국은 쳐주지 않는다면서 바퀴자국이 되라니. 이게 아버지가 할 말인가 싶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 수레가 넘어지고 말이 죽는 재난이 오더라도 바퀴자국은 어떤 화도 입지 않는다는 말에 다다르면 아버지의 깊은 뜻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소순의 두 아들, 소식과 소철의 이름에 담긴 뜻.



아버지 소순은 아들에게 ‘유용한’ 무엇이 되라고 하지 않는다. 오직 관심사는 화를 입지 않는 것에 있다. 부귀영화에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것일 수도 있지만, 부귀영화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을 담은 것도 같다. 부귀든 빈천이든 타고난 운명은 어찌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화를 면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 그것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눈에 띄지 않는 수레 앞턱 가로나무일지라도 예의를 차릴 것은 차리고, 무용한 수레바퀴의 발자국처럼 살라는 것이다. 그렇게 화(禍)가 두려우면 아예 수레와 무관하게 살면 되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도 나의 단견일 뿐, 수레는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표지이다. 그러니까 욕망의 불구덩이인 세상은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그 속에서 살아가되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화를 당하는 삶은 살지 말라는 것이 아버지 소순의 뜻이다. 화두가 따로 없어 보인다. 수레와 수레 아닌 것 사이, 무용과 유용 사이 등. 이미 이름에서 삶의 균형을 잃지 말라는 당부가 담겨 있다.



부와 명예로 휘청거리는 시대


지금 시대라면 자식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줄까. 돈을 많이 벌거나 출세를 하거나 등등. 이런 기운을 이름에 담고 싶지 않을까. 작명소에서 이름을 짓는 이유가 부귀의 기운을 팍팍 담아달라는 의미가 아니던가.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부귀가 무조건 좋은 것인지. 나 스스로 욕망과 재능을 컨트롤 할 수 없다면 부귀야말로 대재앙이 될 뿐이다. 그러니까 부귀란 내 능력 밖의 세계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중심을 잡는 일이다. 이제야 소순이 아들에게 지어준 글이 새롭게 읽힌다. 여기서 핵심은 부귀영화를 피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당하지 않도록 중심을 잘 잡는 데 있다. 즉, 마음이 불안하고 안정되지 못할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이 능력인 것이다.


연일 매체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부와 권력을 거머쥔 사람들의 추태가 쉬지 않고 이슈가 되고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를 존경하는 시절은 지나가 버렸다. 그러고 보면 사회적 성공이란 돈을 버는 것 외에 다른 가치는 상실된 셈이다. 이런 시대에 임신을 위해 덕이 있는 아이를 강조하고, 화를 피하고자 이름을 짓는 부모의 마음은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는 법.



냉철하게 생각해 보자. 아이를 위한다는 것이 부와 명예라는 함정으로 밀어 넣어 결핍에 몸부림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부와 명예를 얻었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으로 인해 삶은 더욱 휘청거릴 뿐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우린 부와 명예를 향해 달려가라는 명령을 알아도 그것을 얻었을 때 중심을 잡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동의보감 부인 편에서는 아이를 생산하려면 욕망을 줄이고 마음을 맑게 하라고 강조한다. 몸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건강한 아이의 생산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다르겠는가. 소유와 집착은 새로운 삶을 생성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의보감은 아이를 낳는 것과 사람이 살아가는 법도를 동일 선상에서 말하고 있다.



덕이 있는 인간의 귀환 


루쉰의 유언 중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아이들이 커서 그들에게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도록 조그마한 일자리를 찾아 주어라.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허울 좋은 소설가나 예술가가 되도록 하지 마라.”이다. 루쉰이 끝까지 글을 쓴 이유를 찾으라면 아이들을 향한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해 그는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고 난 믿고 있다. 요즘은 더더욱 재능이 없으면 소외되는 시대이다. 특별한 재능이 없는 평범한 자들이 참으로 살기 어려운 세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동의보감은 덕이 있는 아이라는 히든카드를 제시하고 있다. 덕이 있는 아이란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아이가 아니다. 천지의 법도에 맞게 그 흐름을 탈 수 있는 평범한 아이의 탄생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궤도를 가지고 타고난다. 태양이 태양의 길이 있고, 달이 달의 길이 있으며, 지구가 지구의 길을 가듯이 인간도 자신의 궤도가 있고 그 궤도를 돌아야 한다. 그것이 덕이 있는 자의 삶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입된 사회적 욕망은 시선을 계속해서 외부로 향하게 한다. 재능을 가지라는 것은 인정욕망의 화신이 되라고 부추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때 아버지 소순이 지어준 이름을 부적 삼아 살았던 소식이 가장이 되어 자식에게 지어준 글은 자식을 위한 마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남들은 다 자식이 총명하길 바라지만 나는야 총명으로 일생을 망쳤으니 오로지 이 아이가 어리석고 미련하여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잘되기만 바란다.”

─소식평전, 임어당, 283쪽


별 탈 없이 무난하게! 빼어난 재주와 성공을 원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좀 싱거운 바람이 아닐 수 없다. 소식은 천재성 때문에 비방을 받았으니 천재가 하는 투정으로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식이 무능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그의 진심이 아니겠는가. 소식의 논리대로라면 비방을 받을 수 없는 둔재는 복을 타고난 셈이다. 하지만 부득이 총명하게 태어났다면 남의 비방을 피할 수 없으니 화에 노출되지 않는 기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별 탈 없이 무난하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덕이 있는 삶을 타고 났음을 드러내고 있다.





임산부만이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엇을 낳는 행위이다. 그것이 완벽한 생산물이 아닐지라도 끊임없이 낳는 활동만이 삶의 균형을 잡을 기회인 것이다. 이것이 동의보감 부인 편이 나에게 준 메시지이다. 아이를, 삶을 낳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돈과 명예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별 탈 없이 무난하게 되기’ 위해 매 순간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것이 생명인 몸의 원리이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덕이 있는 삶이고, 아이를 만드는 비결이다.



글_박장금(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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