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
(호이지기악, 오이지기미)
좋아하면서 그것의 악함을 알고,
미워하면서 그것의 선함을 안다.
연재를 하면서 한문을 원문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영 신경이 쓰였다. 대학을 원문으로 읽지 않은 독자가 태반일 텐데, 군데군데 툭툭 튀어나오는 한문 때문에 읽기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문 인용을 계속 한 것은 뜻글자가 주는 압축적인 리듬감을 조금이라도 맛보시기를 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제목을 好而知其惡(호이지기악), 惡而知其美(오이지기미)라고 문장의 한 구절을 따와 버렸다. 이 구절은 좋을 好(호), 미워할 惡(오), 악할 惡(악), 아름다울 美(미)가 서로 대구(對句)를 만들고 있다. 번역하자면, 좋아하면서 그 악함을 알고, 미워하면서 그 선함을 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번역문 역시 의미상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지만 한문 문장이 주는 압축적인 느낌은 전혀 살지 않는다. 비록 초학자이지만, 뜻글자가 주는 묘미를 즐기는 것도 한문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다. 그래서 여러분도 뜻글자의 세계에서만 맛볼 수 있는 강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문장의 맛을 느껴보시면 좋겠다. 나지막이 한번 소리 내어 읽어 보시라. 好而知其惡(호이지기악), 惡而知其美(오이지기미).
아마 이 문장의 글자 중에 모르시는 글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장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보자. 好而知其惡(호이지기악), 惡而知其美(오이지기미), 두 대구의 맨 처음에 각각 나오는 好(호)와 惡(오)는 동사다. 아시다시피, 좋아한다, 미워한다는 뜻이다. 그 다음의 而(이)자는 ‘~하면서’ 라는 연결사이다. 그 다음 다시 동사, 知(지)가 각각의 댓구에 나온다. 그러면 好而知(호이지)는 좋아하면서 안다가 되고, 惡而知(오이지)는 싫어하면서 안다는 뜻이다. 이때 안다, 즉 知(지)의 목적어는 무엇일까? 其惡(기악), 其美(기미)가 각각의 목적어이다. 其惡(기악)은 ‘그(것의) 악함’이다. 이때 惡(악)자는 ‘오’로 읽지 않고, ‘악’으로 읽는다. 그래서 ‘미워하다’가 아니라 ‘악함’이다. 其美(기미)는 ‘그(것의) 선함’이다. 이때에도 아름다울 美(미)는 착할 善(선)의 의미로 쓰인다. 그러니까 한자 문화권에서는 善(선)이 곧 美(미)인 것이다. 그래서 知其美(지기미) 하면, ‘그 선함을 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好而知其惡(호이지기악), 惡而知其美(오이지기미). 이 문장의 묘미가 느껴지시면 좋겠다. 이 구절은 '수신제가'를 해석한 『대학』의 전(傳) 8장의 첫문장의 일부다. 好而知其惡(호이지기악), 惡而知其美(오이지기미)가 들어 있는 전체 문장은 이렇다.
이른바 집을 평안케 한다는 것이 그 몸을 닦는 것에 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은 가까이하고, 좋아하는 바에 편벽됨이 있으며, 천히 여기고 미워하는 바에 편벽됨이 있으며,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바에 편벽됨이 있으며, 가엽고 불쌍하게 여기는 바에 편벽됨이 있으며, 오만하고 태만한 바에 편벽됨이 있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그것의 악함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것의 선함을 아는 자가 천하에 적은 것이다.
所謂齊其家이 在脩其身者는 人이 之其所親愛而辟焉하며 之其所賤惡 而辟焉하며 之其所畏敬而辟焉하며 之其所哀矜而辟焉하며 之其所敖惰而辟焉하나니, 故로 好而知其惡하며 惡而知其美者가 天下에 鮮矣니라。
(소위제기가, 재수기신자, 인, 지기소친애이벽언, 지기소천오이벽언, 지기소외경이벽언, 지기소애긍이벽언, 지기소오타이벽언, 고호이지기악, 오이지기미자, 천하, 선의。)
齊家(제가)의 齊(제)는 ‘가지런히 하다’라는 뜻인데, 집안을 가지런히 한다는 것은 모두 똑같이 만드는 무차별적인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집안사람들 모두를 각각의 위치에 걸맞게 대우하지만, 그것이 존재론적인 위계는 아니기에 가지런히 하다라는 의미의 齊(제)를 쓴다. 그런데 齊家(제가)는 가족들이 모두 지켜야 하는 법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齊家(제가)하고자 하는 나의 脩身(수신)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지난 연재에서 살펴본 것처럼 正心脩身(정심수신)의 핵심 키워드는 외물을 대함에 지나침이 있으면 바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집안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매일 함께 사는 사이니, 한쪽으로 지나치게 쏠릴 가능성이 가장 큰 집단이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 부모님에 대한 불만은 왜 동생을 나보다 더 예뻐할까 하는 것이었고, 가족 간에는 약간의 섭섭함도 곧장 분노나 깊은 슬픔으로 기울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니 齊家(제가)에서 요구하는 수신은 그 편벽됨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 방법이 다름 아닌 好而知其惡(호이지기악), 惡而知其美(오이지기미) 이다.
가족 간에는 편벽되지 않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중에서도 치우치거나 지나치지 않게 사랑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 자기 자식이 남의 자식보다 귀하고 예쁜 것은 인지상정이다. 대학에서는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민을 평등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그럴싸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다. 아무리 못난 녀석일지라도 내 자식은 그 어떤 자식보다 소중한 것을 잘못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경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즉 好而知其惡(호이지기악)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자식이라 해서, 온 세상이 내 자식을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면, 그것은 惡(악)이라는 것이다. 너무 좋아서 사리분별이 안 되면 좋아하는 것도 악이다.
오누이간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지나치면 악(惡)이다.
사랑만큼이나 쉽게 지나치게 되는 것이 미움이다. 이것은 대개 높은 기대를 일방적으로 정해놓고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천시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영화 <사도>에서 보여주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그렇지 않을까? 영조는 「대학」의 서문도 직접 썼지만, 惡而知其美(오이지기미)는 체득하지 못한 듯하다. 자신이 싫어하는 아들의 단점 속에서 선한 부분을 찾는 것에는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좋은 부분을 발견해서 싫어하는 부분을 상쇄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신이 싫어하는 바로 그 점. 영조라면 자식의 미욱한 점, 바로 그 미욱함이 선으로도 작동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 惡而知其美(오이지기미)다. 그러니까 惡而知其美(오이지기미)는 자신이 미워하는 것이 전적으로 악이 아니라, 미워하는 자의 취향임을 알라는 것이다.
두려워하고 공경함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치우치기 쉬운 것이다. 이는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공경하지만 정도가 지나쳐서 사리분간이 안 되는 경우다. 특히 가족관계에서는 잘난 부모와 그것을 흠모하는 자식과의 관계가 그럴 것이다. 우리는 이 생생한 사례를 정치권에서 목도한다. 이 또한 好而知其惡(호이지기악)이 안 되서 발생하는 문제다. 마찬가지로 불쌍해하고 슬퍼함도 지나치기 쉬운 관계가 가족관계다. 늘 보는 관계라면, 그 불쌍함이 익숙해져서 무덤덤해질 만도 하지만, 가족의 경우에는 그 애잔함이 오히려 더욱 증폭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것은 가족이기에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나치게 불쌍해하는 것은 불쌍해하는 대상을 정말 불쌍하게 만들어 버린다.
마지막으로 이 문장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 오만하고 태만한 바에 편벽됨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오만함과 태만함의 짝이다. 태만함은 오만함에서 나온다. 오만하기에 설렁설렁 게으름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이 가족관계에서 특히 경계하게 되는 항목일까? 이것도 역시 친한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문제다. 자식 기 살려 준다고 응석받이로 키우면 기고만장해서 부모와의 관계 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도 게으르기 짝이 없게 되는 예는 부지기수다. 바깥에서 빌빌거려도 집안에서는 기 좀 펴고 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 이것 역시 好而知其惡(호이지기악)해야 하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서도 오만함과 태만함 대신 사랑과 그에 걸맞는 예의가 필요하다.
이 모두 친한 사이의 좋아함에서 발생할 수 있는 편벽됨이다. 친한 사이에는 싫어함조차 지나친 애정이 그 원인이다. 집안을 가지런히 한다는 것은 이 편벽됨을 잘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해서 수신이 핵심이고, 수신은 또 정심이 관건이다. 늘 好而知其惡(호이지기악), 惡而知其美(오이지기미) 할 일이다.
글_최유미
☆ 오늘의 『대학 』 ☆
* 『대학』 전 8장
所謂齊其家이 在脩其身者는 人이 之其所親愛而辟焉하며 之其所賤惡而辟焉하며 之其所畏敬而辟焉하며 之其所哀矜而辟焉하며 之其所敖惰而辟焉하나니, 故로 好而知其惡하며 惡而知其美者가 天下에 鮮矣니라。
(소위제기가, 재수기신자, 인, 지기소친애이벽언, 지기소천오이벽언, 지기소외경이벽언, 지기소애긍이벽언, 지기소오타이벽언, 고호이지기악, 오이지기미자, 천하, 선의。)
이른바 집을 평안케 한다는 것이 그 몸을 닦는 것에 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은 가까이하고, 좋아하는 바에 편벽됨이 있으며, 천히 여기고 미워하는 바에 편벽됨이 있으며,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바에 편벽됨이 있으며, 가엽고 불쌍하게 여기는 바에 편벽됨이 있으며, 오만하고 태만한 바에 편벽됨이 있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그것의 악함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것의 선함을 아는 자가 천하에 적은 것이다.
'지난 연재 ▽ > 나의 고전분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증자가 말하는 효 - 부모님을 걱정시키지 않기위한 '전전긍긍' (0) | 2016.03.02 |
---|---|
[대학] 치국, 비록 적중하지는 못할지라도 과히 멀지는 않은 것 (3) | 2016.02.24 |
공자의 후기 제자, 자장과 자하 - 과하거나 혹은 미치지 못하거나 (1) | 2016.02.17 |
"스승님의 가르침은 너무 이상적" - 공자에게 쫒겨난 제자, 염유와 재아 (0) | 2016.01.27 |
[대학] 수신(修身)이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 (6) | 2016.01.20 |
공자의 제자 중 가장 성공한 자공의 공부법, '절차탁마' (2) | 2016.01.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