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쓰고 싶게 만드는 시집
― 이해인 『내 혼에 불을 놓아』
이해인 수녀님의 시들은 내가 교과서에 나오는 시인의 시를 제외하고 처음 접한 시(라고 기억한)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그러니까 수업마다 다른 선생님이 오시는 것도, 여자애들만 있는 교실도(남녀공학이었으나 남자반 여자반이 따로 구성된 학교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만난 담임선생님 덕분이다. 교사생활에 첫 담임을 맡으셨던 우리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모두 마음을 다해 자상하게 해주셨고, 강압적인 말투도 제스처도 취하신 일이 없었다. 나서거나 눈에 띄는 걸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선생님을 좋아하는 마음은 숨길 수가 없어 방학 때 선생님 댁으로 편지를 보냈다(편지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의사전달 수단이었다). 사실 답장에 대한 기대가 없지는 않았지만, 기대가 낮아야 실망도 작으므로 늘 언제나 가장 나쁜 결과를 예상하는 소심이었던 나는, ‘답장을 받기 위해 쓰는 게 아니야’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생각날 때마다 선생님께 편지를 부쳤다.
그러던 어느 날 우편함에 편지 한통이 눈에 띄었다. 친구에게 온 건가 싶어 꺼내 든 편지에는 담임선생님의 이름이 쓰여 있었고, 설레며 봉투를 열어보니 편지와 엽서가 들어 있었다. 뭔가 방안지 노트를 잘라서 편지지로 쓰신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도 참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동봉된 우편엽서에는 선생님이 손수 그리신 그림과 함께 이해인 수녀님의 시 한편이 적혀 있었다.
얼마나 글씨도 아름답게 쓰셨는지. 국어과 선생님이셨던지라 한문도 같이 가르치셨는데, 위 엽서에서도 조금 느낄 수 있듯 한자의 필치도 유려했다. 아무튼 편지를 몇 통이나 받은 뒤 답장을 쓰는 미안함에 손수 색연필 그림까지 그려 시를 써주신 엽서를 받은 이후 ‘이해인 수녀’를 알게 되었고, 그녀의 시들을 찾아 읽게 되었는데, 또 영성이 바탕에 깔린 데다 고통이나 번민도 청아하게 담아 낸 시들은, 뭐랄까, 나름대로 감성 예민한 중학생을 사로잡았다.
1979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던 이 시집은 내가 살 때도 세로읽기 조판으로, 지금의 책들처럼 왼쪽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넘기며 읽었다. 이 시집에서 처음에 그러니까 중학생 때 좋아했던 시들 중 하나는 아래의 시다.
은밀히 감겨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차라리 입을 다문 노란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솜털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
꽃씨만 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바람한테 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
― 「민들레」 全文
“바람한테 준 마음 후회 없어라”라는 구절을 특히 좋아했던 듯하다. 무엇에든 누구에든 금방 사랑에 빠지는 나이였으니까. 마음을 주는 곳도 참 많았던 것이다.
우산도 받지 않은
쓸쓸한 사랑이
문 밖에서 울고 있다
누구의 설움이
비 되어 오나
피해도 젖어오는
무수한 빗방울
땅 위에 떨어지는
구름의 선물로 죄를 씻고 싶은
비오는 날은 젖은 사랑
수많은 나의 너와
젖은 손 악수하며
이 세상 큰 거리를
한없이 쏘다니리
우산을 펴주고 싶어
누구에게나
우산이 되리
모두를 위해
― 「우산이 되어」 全文
친구들에게도 자주 써주었던 시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문자로 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고 하니), 내가 중학생 때 친구들과의 주된 소통 수단은 쪽지와 편지였다. 물론 나는 그중에서도 꽤 많은 편지를 쓰는 축에 들었지만(탑 쓰리 안에는 들었던 듯…;;;), 성적 고하를 막론하고 눈에 띈 구절이나 좋아하는 대중가요 가사라도 편지에 적어서 주는 걸 즐기던 시절이었다.
저 사진 속의 낙엽들은 최소 25년은 된 것들이다. 아직 저렇게 남아 있는 게 놀랍다. 특히 아래 사진에 있는 나뭇잎에 푸른빛이 도는 것은, 저 나뭇잎을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 때 활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색지 위에 나뭇잎을 놓고 뭔가 색깔이 있는 락카를 뿌렸거나 아무튼….
저무는 가을과 다가오는 겨울을 함께하기에 손색없는 따뜻한 시들과 더불어 소중한 사람에게 문득 문자나 메일 말고 편지 한 통 써보시길….
한밤의 雪風에
내가 앓고 있다
이 목마른 줄기를 축여줄
고운 손길은 없는가
낯익은 四季와의 이별에
해마다 뻗어가는
意志의 뿌리
하늘로 치솟는 고독을
땅 깊이 묻고
황량한 어둠의 들판에 빈 손을 들어
受信人 없는 편지를 쓴다
말로는 풀지 못할
끝없는 思惟에
잠 못 드는 겨울
얼어붙은 심장에 불씨를 당길
산새 같은 마음의
친구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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