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전분투기 - 『대학장구』]
신(新)은 혁(革)이다
새로움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서 마침내 새로워질 수 있을까?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처럼, 매일 한 지게씩 흙을 옮긴다면 언젠가는 산을 옮기게 되지 않을까? 점진적 변화론은 진화론이나 과학사에서도 한때 주류를 차지했던 관점이고, 지금도 만만찮은 세를 가지고 있다. 허리 굽은 유인원에서 점점 허리를 꼿꼿이 세우게 되는 호모사피엔스까지의 진화론적 해석, 과학은 자연에 대한 앎의 점진적 축적 과정이라는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관점들이 그것이다. 점진적 변화라는 관점에서는 현재가 언제나 최상의 진보된 상태다. 뭔가 구린내가 나는 것 같지 않은가? 점진적 변화라는 관점에서는 혁명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어진다. 지금까지는 현재가 최상이고, 미래는 나날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을 상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의 내'가 가장 최상의 상태라는 말씀이시죠?;;;;
주자는 변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대학의 첫 문장은 이렇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 대인의 학문하는 도는 하늘에서 인간에 부여한 허령불매한 인식능력을 밝히는데 있고, 백성을 친히 하는데 있고, 지극한 선을 유지하는 데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자는 자신의 『대학장구』의 첫 번째 주석을 이렇게 쓴다. 程子曰。親。當作新(정자왈, 친, 당작신)。정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친(親)은 당연히 신(新)으로 해야 한다. 즉 백성을 친히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주자의 구분에 의하면 경1장에 해당된다. 당시에 경(經)이란 성인의 말씀으로 함부로 고치거나 하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주자가 정자를 등에 없고 제기한 當作新 (당작신, 신으로 해야 한다)은 공자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오자(誤字)의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오자나 착간(錯簡, 죽간의 순서가 뒤바뀜)의 가능성은 근거가 있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많은 책이 소실되어 후대에 선비들의 기억에 의존해서 복원을 거쳐야 했기에, 오기가 있을 수 있다. 또한 冊(책)이라는 글자 모양이 보여주는 것처럼, 당시의 책은 죽간을 가죽 끈으로 죽 이어 묶은 것이니 책을 펼치고 말고를 여러 번 하다보면, 가죽 끈이 끊어져서 새로 묶는 과정에서 죽간의 앞뒤가 뒤바뀌기도 한다. 게다가 원래의 기록조차 술(述)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니, 텍스트는 언제나 논란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대단한 것 아닐까? 오자나 착간을 주장하면서 개념의 새로운 배치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항상 열려있었던 셈이었으니 말이다. 주자는 신민(新民)이 공자의 본의(本意)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술(述)이 가진 잠재적 탈주의 벡터는 성인의 본의를 주장할 때조차 작동하고 있다.
주자가 말하는 신(新)은 어떤 것일까? 주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新者, 革其舊之謂也(신자, 혁기구지위야)。 새로움이라는 것은 그 낡은 것[舊]을 혁하는 것을 이른다. 혁(革)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에 확 바꾸는 것이다. 티끌이 모여서 태산이 된다는 그 소박한 변화에 대한 관념은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를 한 지게의 흙더미가 점차 모여서 산을 이룬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본말을 전도하는 일이다. 분명 한 지게의 흙더미가 수세대가 지나서 산을 옮긴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겉모습이다. 아흔의 늙은 나이에, 자신은 아무런 득이 없을 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뭔가에 홀린 듯이 지게를 짊어질 수 있었던 것. 그 지게질이 멈추지 않고 수세대를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진정한 의미다. 그것이 혁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혁이 있었기에, 아니 매일 매일이 혁이었기에 한 지게는 두 지게, 세 지게....그리고. 산이 될 수 있다.
우공이산, 매일 매일이 혁이었기에, 산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신민을 해석하는 전 2장의 첫 문장은, 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탕지반명왈,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이다. 이 문장은 탕임금의 목욕대야에 새겨져 있는 글귀인데, 참으로 오늘 하루 낡은 것을 청산하고 스스로 새로워졌거든, 그 새로워짐으로 해서 다음날도 자신을 새롭게 하고 또 그다음날도 새롭게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매일 매일 조금씩 새로워지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매일 매일이 혁명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가망 없는 지게를 다시 질수 있겠는가. 그 혁의 맥락을 다 빼고, 한 지게씩 모이면 저절로 산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세상을 혁하기 싫어하는 자들의 속임수일 것이다.
그런데 명명덕(明明德)이 왜 신민(新民)으로 이어질까? 탕왕의 신(新)은 자신을 새롭게 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자는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연결시키고 있다. 위 문장 다음에 이어지는 作新民 (작신민, 백성을 새롭게 한다)에 대한 주자의 주석은 鼓之舞之之謂作, 言振起其自新之民也(고지무지지위작, 언진기기자신지민야)。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군주가 새로운 지배이데올로기로 백성들을 철저하게 정신교육 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백성들이 스스로 북치고 노래하게 하는 것. 백성이 기뻐서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것이 신민의 뜻이다. 그렇지만 군자(혹은 군주)가 자신이 새로워지는 것과 백성이 스스로 새로워지게 하는 것 사이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안 잡힌다. 주자는 신은 혁이라고 말한 주석에 덧붙여 이렇게 설명한다.
言旣自明其明德, 又當推以及人, 使之亦有以去其舊染之汚也。
(언기자명기명덕, 우당추이급인, 사지역유이거기구염지오야。)
이미 스스로 자신의 명덕을 밝혔으면, 또한 마땅히 확장하여 남에게까지 미치게 하여서 그로 하여금 옛날에 물들었던 더러운 것을 제거하게 함을 말한다.
그러니까 신(新)은 자신만 새로워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새로워지는 것이 명덕을 밝히는 것이요, 명덕을 밝히는 것이 수신이다. 수신은 탕왕의 목욕대야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매일 매일의 혁명이다. 그 혁명을 확장하여 남에게까지 미치게 한다. 그것이 대학의 주제인 추기급인(推己及人)이다. 남에게 미친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국민교육헌장을 억지로 암송하게 하는 야만의 극치가 아니다. 백성은 왜 스스로 춤추는가? 군자는 왜 스스로 명덕을 밝히려고 하는가? 이것은 다음 연재에서 중요하게 던질 질문이다.
다다음 주에는 왜 '스스로 춤 추는지' 배워보아요~
글_최유미
☆ 오늘의 『대학 』 문장 ☆
* 경 1장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
대인의 학문하는 도는 하늘에서 인간에 부여한 허령불매한 인식능력을 밝히는데 있고, 백성을 친히 하는데 있고, 지극한 선을 유지하는 데 있다
* 주자 주
程子曰。親。當作新。
(정자왈, 친, 당작신。)
백성을 친히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새롭게 해야한다
新者, 革其舊之謂也。
(신자, 혁기구지위야。)
새로움이라는 것은 그 낡은 것을 혁하는 것을 이른다.
* 전 2장
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탕지반명왈,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
참으로 오늘 하루 낡은 것을 청산하고 스스로 새로워졌거든, 그 새로워짐으로 해서 다음날도 자신을 새롭게 하고 또 그다음날도 새롭게하라
* 주자 주
鼓之舞之之謂作。言振起其自新之民也。
(고지무지지위작, 언진기기자신지민야。)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백성들이 스스로 북치고 노래하게 하는 것. 백성이 기뻐서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言旣自明其明德。又當推以及人。使之亦有以去其舊染之汚也。
(언기자명기명덕。우당추이급인。사지역유이거기구염지오야。)
이미 스스로 자신의 명덕을 밝혔으면, 또한 마땅히 확장하여 남에게까지 미치게 하여서 그로 하여금 옛날에 물들었던 더러운 것을 제거하게 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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