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나의 고전분투기

위대한 스승 공자, "내 대답이 모두 다른 이유는…"

by 북드라망 2015. 11. 25.



공자(孔子)가 위대한 스승인 이유




동아시아 전체에 가장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 중에 하나가 『논어(論語)』이다. 한 때 우리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둥,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둥, 『논어』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가 있었다. 그리고 2,500년이라는 세월을 넘어서 여전히 우리에게 『논어』가 의미가 있다는 것은 공자라는 인물이 대단한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논어』는 참 별 이야기가 없는 책이다. 새로울 것 하나도 없는 이야기 속에서 도대체 공자의 어떤 면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그를 동양 최고(最高)의 스승으로 만들었을까?


"최고(最高)의 사부는 바로 '공자님'이시다!"



공자는 그가 살아생전에 공부한 것을 제대로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공자의 정치적 이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 받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그는 노나라의 관문지기에게 “할 수 없음을 알고도 하는 분이 아니십니까?”라는 말도 듣는다. 당시 사람들은 공자를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의 벽에 갇힌, 들어 주지 않는 이야기를 끝없이 하는 불운한 사람으로 보았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공자가 생전에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불행한 천재의 인상이 깊다. 하지만 당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그렇지 그가 중국 전역을 주유하는 중에 그는 각 나라의 제후들을 만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인사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을 뿐, 스승으로서 그는 3,000명의 제자를 거느린 명망 있는 스승이었다. 아마 그의 제자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며 스승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졌을 것이다.


단순히 이런 이유 때문일까? 마치 서울대 많이 보낸 입시 학원 유명 강사처럼 공자의 명성도 그런 유(類)의 것이었을까? 하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엔 공자 사후 너무 오랫동안 그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1, 나는 곤궁하여 이것저것 배웠다


기원전 551년 노(魯)나라 곡부에서 공자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인 구(丘)는 머리 모양이 위가 불룩 솟아 나와서 그렇게 붙여졌다고도 하고, 그의 어머니가 니구산에서 기도하여 낳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하급 무관이었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환갑을 넘은 나이에 공자의 어머니 안씨와 결혼했다. 숙량흘은 결혼 후 곧 아들을 낳았고, 구가 3살 때 죽었다. 구는 젊은 홀어머니와 함께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구의 아버지는 원래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결혼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고 구와 안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사기(史記)』는 공자가 어릴 때 조두와 같은 제기(祭器)를 가지고 놀았다고 기록했는데 이를 두고 공자가 어릴 때부터 예(禮)를 좋아하는 비범한 아이였다고도 하지만 버려진 제기를 가지고 놀아야 할 만큼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나마 어머니 안씨도 그가 17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생계를 위해 일을 했던 공자, 15살이 되자 학문에 뜻을 두고 배움에 매진한다. 10여 호가 사는 마을에서 자기만큼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고 자부했을 만큼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러나 곤궁한 살림으로 그는 일정한 스승을 정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배움은 거리에서 시장에서, 그가 있는 어느 곳에서나 이루어졌다. 길을 가는 사람도 그에게는 스승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도 관직에 올랐다. 하지만 말단 사(士) 계층의 공자가 얻을 수 있는 관직은 당시 노나라 세력가였던 계씨의 목장을 관리하거나, 밭을 관리하는 창고지기정도의 일이었다. 그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턱도 없이 낮은 자리였지만 공자는 자기가 맡은 일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해 냈다.


후에 제자인 자공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다. “공자께서 성인이신가요?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으신가요?” 자공은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공자는 자신이 어릴 때 가난해서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것이 많을 뿐, 군자가 꼭 다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달인은 모든 걸 잘 해야하지만, 군자는 모든 걸 잘 할 필요는 없지요.




2, 내 대답이 다 다른 이유는


『논어』를 잘 보면 공자는 제자들의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하는 경우가 없다. 안회가 인(仁)에 대해서 스승에게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자기를 이겨서 예(禮)로 돌아가는 것을 인이라고 한다.”고 대답해 주었다. 얼마 뒤에 중궁이 인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는 “문을 나서면 큰 손님을 뵙는 듯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모시는 듯해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으면 나라와 집안에 원한이 없게 된다.”고 말했다. 또 하루는 사마우(司馬牛)가 인에 대해서 물었다. 이번에는 “인이라는 것은 말을 참는 것이다.”라고 알려 준다. 똑같이 인(仁)에 대해서 질문했지만 공자는 각각 다 다른 대답을 해 준다. 그냥 딱 부러지게 ‘인은 이것이다.’라고 대답해 주면 간단할 것 같은데 뭐 이렇게 복잡하게 대답해 주는 걸까?


그러나 간단하게 ‘이것이다.’라고 대답해 주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공자 스쿨’의 특징이다. 공자의 배움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능력이다. ‘공자스쿨’은 처지나 나이, 성격 등이 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곳이다. 배움의 정도도, 이해의 폭도 할 수 있는 일도 다 달랐을 것이다. 공자가 그 사람됨에 맞게 다르게 대답을 해 주는 것은, 인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을 실천하는 방도를 알려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공자는 그 제자들의 사람됨에 대한 관찰을 게을리 하면 안 되었다. 그래서 공자는 “그 사람이 하는 바를 보고, 그러한 이유를 잘 살펴보고, 그가 편안히 있을 때를 관찰하면 사람됨을 숨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제자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자는 제자들의 질문에 두루뭉술하게 대답해 주는 법이 없었다. 그가 제자들의 잘못에 따끔하게 혼을 낼 수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자공과 같은 제자가 자기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질문에 “너는 그릇이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3, 나는 하나로 꿰는 것이 있다


스스로 호학자(好學者)라고 칭한 공자, 그러나 어느 날 제자 자공에게 묻는다. “자공아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다고 대답하는 자공에게 “그렇지 않다. 나는 하나로 꿰는 것(一以貫之)이 있다.”고 말한다. 『논어』의 첫 문장이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로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공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움이었다. 그런데 ‘많이 배워서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로 꿰는 것’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다들 어려웠는지 후에 제자 증삼(曾參)과의 대화에 다시 등장하는 이 물음은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를 충(忠)과 서(恕)로 말하고 있다.


“자공아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공자가 스스로 자신의 배움을 하나로 관통하는 것이라고 말한 충과 서는 공자의 삶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心)의 가운데(中)를 나타내는 충(忠)은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공자는 ‘공자 스쿨’을 연 후에는 배움을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오랜 시간 주유하며 자신을 받아주는 곳을 찾아 다녔다. 그러한 공자를 사람들이 안 되는 일을 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다. 그래도 그는 그것이 자신의 천명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다 하는 것, 그것이 학(學)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고, 자신의 삶 역시 그렇게 살고자 공자는 노력했다.


(恕)는 마음(心)을 같게 하는 것(如)이다. 다른 사람과 마음을 같게 하는 것, 이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것이 앞서 제자들이 공자에게 묻던 인(仁)이다. 공자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타인과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이 공자가 이루고자 했던 정치적 이상의 핵심이다. 공자가 시(詩)를 배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도 시에 드러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감정과 삶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었다. 공자가 인을 행하는 방법으로 제일 먼저 효(孝)와 제(弟)를 손꼽은 것도 인간이라면 가장 자연스럽게 자기 부모와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를 미루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그래서 공자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켜서는 안 되고, 내가 서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을 먼저 세워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어릴 때 가난하게 살았고, 그 때문에 다양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가 다양한 인간을 경험하도록 만들었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제자를 대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보다 공자가 위대한 스승이 될 수 밖에 없던 이유는 그가 말했듯이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 바로 충실한 삶에 태도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그러한 태도를 진실하게 먼저 행하는 그가 보여주는 삶이 바로 제자들에게 가장 깊은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배움은 항상 실천의 문제이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공자는 솔선수범하는 스승이었다. 자신의 태도가 바르면 당연히 제자들이 따르게 되고, 그렇게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에 서로의 배움이 커 나간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공자가 하루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내가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말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 나는 너희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게 바로 나, 구(丘)다” 공자의 위대함은 바로 이것에 있다.
 


글_진달래(문탁네트워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