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대학] 격물치지의 진정한 뜻, 아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나의 고전분투기 - 『대학장구』]

시작이다




서양근대 철학은 과학주의와 잇닿아 있다. 근대철학의 비조라 불리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명제는 능동적인 인식주체라는 개념을 확립했다. 물론 이때의 인식주체는 인간이고, 인간이 아닌 자연은 인식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구도에서 중요한 문제는 인식한 것의 진리성을 어떻게 판별 하는가이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 하는 대상과의 일치라는 진리개념은 인식주체의 출현과 함께 근대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인식주체 혼자서는 진리 여부를 결론지을 수 없다는 근본적인 난점을 가진다.


예컨대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본적이 없는 사람이 처음 거울을 봤다면, 옆에서 누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해 주기 전에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의 얼굴인지 알지 못한다. 근대철학은 이 딜레마를 신의 말씀에 의존하지 않고 해결하려 했기에 과학은 중요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갈릴레오의 과학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했고, 칸트는 뉴튼의 과학을 철학적으로 정초하려 했다. 이는 과학이 예측을 통해 인식이 진리임을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오늘날 과학이 다시 신학의 위치에 오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과학도 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제까지 동쪽에서 해가 떴고 오늘도 역시 동쪽에서 뜬다는 걸 과학이 예측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내일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여전히 신은 진리의 보증자로서 요청되었고, 이는 근대철학의 대표적인 딜레마였다.



처음 거울 속에 나를 처음 봤다면 이게 나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내가 읽은 『대학』에서 진리는 증명해야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초월적인 신에게, 혹은 현자에게 진리를 전적으로 기대는 도그마적인 무엇을 전제하지도 않는다. 증명을 요구하는 문제 설정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은 참, 거짓의 판별은 언제나 그것을  판별해줄 제3자를 요청하는 것이기에 스피노자는 이를 ‘무지로의 도피’라고 비판하였다. 데카르트와 동시대에 살았지만 근대적인 진리개념을 완전히 전복시킨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한다. “참된 관념을 소유한 자는 동시에 자기가 참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며, 그 사실의 진리를 의심할 수 없다.”(에티카, 정리 43)진리는 누가 판별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참, 거짓 대신 적합성을 기준으로 삼았다.


『대학장구』에서 주자는 스스로 格物(격물)에 대한 글을 지어 끼워 넣을 만큼 사물에 대한 앎을 강조했다. 하지만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추구한다는 의미의 格物致知(격물치지)는 내가 인식하고 있는 것과 실제 그 대상의 일치라는 진리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주자는  格物(격물)에 대해 논한 문장에서 사람은 이미 그 인식능력을 다 가지고 태어나고, 천하 만물은 모두 이치를 갖추고 있기에,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더욱 이치를 궁구하기를 오랫동안 힘쓴다면, 豁然貫通(활연관통)하게 된다고 말한다. 한눈에 이치를 훤히 꿰뚫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豁然貫通(활연관통)하면 사물의 表裏精粗(표리정조), 즉 사물의 겉과 속, 정밀함과 거칢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물의 겉과 속, 정밀함과 거친 것은 서로 대립되는 것들의 쌍들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가 대립되는 다른 것보다 우위를 주장할 수 없고 함께 物(물)과 事(일)을 이룬다. 격물하여 이치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 대립되는 것들의 작용을 아는 것이다. 겉과 속으로 하나의 物(물)이 구성되고, 정밀할 때 정밀하고, 거칠 때 거칠 수 있어야 일이 제대로 될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는 것이 격물을 하는 이유이고, 이런 이치가 적용되지 않는 것은 하늘아래 어떤 것도 없음을 터득하는 것이 그 격물의 목표다. 격물을 통해 사물의 表裏精粗(표리정조)의 이치를 알게 되는 것은 스피노자의 적합성에 대한 인식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보인다, 보여!, 사물의 표리정조가 보인다



정밀한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이 아니다. 정밀해야 할 때 정밀한 것이 좋은 것이고 적합한 것이다. 겉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고, 내면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겉은 겉대로, 속은 속대로 모두 적합해야 하나의 物(물)을 이룰 수 있다. 문제는 진리를 고정된 것으로 간주해서 참, 거짓을 판별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고, 봄에 싹이 나서, 가을에 열매를 맺고, 겨울에 초목이 얼어붙는 往來屈伸(왕래굴신)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터득하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떻게 그 흐름을 타면서 편안해 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자신에게 좋은 것은 영원하기를 원하여서 그것이 변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은, 옛사람이나 지금의 우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격물치지는 하늘아래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터득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주자가 중시하는 격물은 서양근대의 과학주의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동양의 사유에서는 자연과 분리된 인식주체란 없다. 그렇기에 능동적인 인식주체와 피동적인 인식대상으로서의 자연이라는 구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격물치지는 자연의 이치와 인간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배우는 과정이다. 근대 서양의 앎이 대상과의 일치라는 불변의 진리를 얻고자 했다면, 유가의 앎은 어느 것도 변화의 외부에 위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목표가 아니라 진실한 삶을 위한  출발점이다. 


격물치지가 언급되어 있는 『대학장구』의 8조목은 강령인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新)民 在止於至善(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신)민, 재지어지선)”의 방법론인 셈인데, 格物(격물), 致知(치지), 誠意(성의), 正心(정심), 修身(수신), 齊家(제가), 治國(치국), 平天下(평천하)로 이어진다. 明明德(명명덕). 자신의 밝은 덕을 깨닫기 위해서도 격물에서 시작해야 하고, 齊家(제가), 治國(치국), 平天下(평천하). 집안과 나라, 천하를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明明德(명명덕)해야 되는 것이니 또한 격물에서 시작해야 한다. 止於至善(지어지선). 죽을 때까지 선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선한 상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알아야 비로소 얻을 수 있으니 격물에서 시작해야 한다. 진리는 파고 또 파서 마침내 도달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만물은 모두 이치에 따라 작용하고 있고, 인간의 인식능력 또한 당연히 그 이치를 알 수 있는데, 좋은 것이 영원하기를 원하는 욕심 때문에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의 외부 곧 사물에 도움을 받아서 그 이치를 익히고 또 익혀야 명덕을 깨우치는 길로 비로소 한걸음을 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앎은 목표가 아니라 시작점이다.


글_최유미


☆ 오늘의 『대학 』 ☆

表裏精粗(표리정조)

표면의 이면과 정밀한 곳과 거친 곳. 하나도 빠짐없이 샅샅이.


豁然貫通(활연관통)
환하게 통하여 도를 깨달음.


* 대학 8조목 

格物(격물), 致知(치지), 誠意(성의), 正心(정심),

修身(수신), 齊家(제가), 治國(치국), 平天下(평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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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HFOC 2016.04.10 18:45 답글 | 수정/삭제 | ADDR

    활연관통의 뜻을 보면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3종 인식'이 떠올랐습니다. 이 둘이 마치 같은 것을 뜻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비슷하게 느껴지네요.
    격물치지의 뜻이 자연의 이치와 인간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배우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흥미롭네요. 그리고 '동양의 사유에서 자연과 분리된 인식주체란 없다.'는 것을 보니 동양의 사유가 더 궁금해졌고,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D 그렇다면 동양에서는 서양 근대 철학의 딜레마를 애초에 만나본 적도 없는 건지도 궁금하네요.

    • 북드라망 2016.04.12 16:46 신고 수정/삭제

      제가 스피노자의 3종 인식이 무엇인지 몰라 댓글이 딱-하고 와 닿지 못하네요. 왠지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고 계시는 공부들이 연결되는 모습을 보니 멋지네요. 이번 해에 새로운 사유를 시작하신 것 같습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