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을 익히고 나니
그때서야 재미있어지더라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중에 나오는 일화이다. 스티븐 킹의 아들 오웬은 일곱 살때 스프링스틴의 E 스트리트 밴드에 빠져 그 밴드의 색소폰 연주자처럼 연주를 하기로 결심한다. 스티븐 킹과 그의 아내는 오웬에게 색소폰을 사주고 레슨을 받게 해준다. 그리고 7개월 후 스티븐 킹은 아내에게 오웬만 원한다면 레슨을 중단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오웬은 레슨 선생님이 지시한대로 빠지지 않고 연습을 했다. 일주일에 나흘은 방과 후 30분씩, 주말에는 한 시간씩. 그럼에도 스티븐 킹이 아들에게 색소폰 레슨을 그만 두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웬은 음계와 음표들을 모두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었지만―기억력이나 폐활량이나 눈과 손의 협력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니까―그 단계를 뛰어넘어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스스로 놀라면서 황홀경에 빠져 연주하는 모습은 끝내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연습 시간만 끝나면 곧바로 색소폰을 케이스에 집어넣었고, 다음 레슨이나 연습 시간이 될 때까지는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는 우리 아들이 색소폰으로 진짜 공연을 하는 날은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연습만 하는 것이 고작일 터였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즐거움이 없다면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기가 더 많은 재능을 지니고 있고 재미도 있는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리는 편이 낫다.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김영사, 181-182쪽
나도 오웬처럼 7개월째 레슨을 받고 있는게 있다. 그것은 바로 수영이다. 그렇지만 내 아버지가 “네가 원한다면 수영 강습을 그만 다녀도 좋아.”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만 둘 생각은 없다. 이유인즉슨 나는 오웬과 달리 수영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수영이 재미있다!
나는 20대 초반부터 수영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물에 빠졌을때 수영 한번 못 해보고 죽는 사람이 되지 않으리라! 물에서 자유로우리라! 고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땀이 아~주 많기 때문에 이런저런 걸 따지다 보면 수영이 제일 적합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수영을 배우기 전에는 수영장에서는 땀이 안 날거라고 생각했지만, 다니고 나니 그게 아니었다. 수영장에서도 땀은 난다. 단지 땀 때문에 생기는 여러 귀찮은 상황이 없을 뿐이다. 옷이 다 젖어버린다거나, 땀이 눈에 들어가거나, 안경에 떨어져 시야를 가린다거나, 냄새가 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그런 일들 말이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로 지금 하고 있는 강습이 네 번째다. 나는 9년 전에도, 5년 전에도, 2년 전에도 수영을 시도했었다. 그때마다 두 달을 넘기지 못했다. 뭐, 운이 안 따르기는 했다. 갑자기 긴 여행을 가야했다던가, 출근 시간이 바뀌었다던가, 생각보다 수영장이 너무 멀다던가. 그렇지만 그 밑에 가장 날 괴롭게 했던 이유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수영을 생각보다 너무, 너무너무, 너무너무 못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네 개의 수영장과 그보다 많은 수의 강사 선생님을 만나는 동안 나는 늘 우리 반에서 진도가 느린 사람이었다. 가끔은 가장 진도가 느렸다. 다른 사람들은 보름쯤 지나면 슬슬 스위밍 보드(소위 ‘킥판’이라고 불리는 그것)를 놓기 시작하는데 나는 한 달이 지나도록 보드를 놓지 못했다. 영법에서는 제일 먼저 자유형을 배우는데, 보통 자유형은 오른팔을 저을 때 고개를 돌려 숨을 쉰다. 보드를 놓고 자유형을 하다 고개를 돌리고 숨을 들이마시려고 보면 여전히 머리는 물 속에 있었다. 억지로 고개를 들어 숨을 쉬어도 오래가지 못했다. 몸은 점점 가라앉았고, 자유형으로 수영을 하다 숨을 쉬려면 멈춰서 일어서야했다! (부끄러웠다!)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 느렸다. 심지어 보드가 있어도 느렸다! 뒤에 오던 사람과의 간격이 좁아져 발로 뒷사람의 팔이나 머리를 차는 일이 많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왠지 쫒기는 기분이 들어 열심히 팔다리를 휘젓다 보니 어느새 수영실력이 늘어있었다-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쓸데없이 긴장을 하다 보니 숨도 더 차고 그러면 물도 더 많이 먹고 그러면 더 느려진다. 이런 게 몇 번 반복되다보니 마치 어릴 때 물에 빠진 기억이 있는 사람처럼 긴장이 되었다. 벽을 등지고 스타트를 할 때마다 치과 앞에 선 사람처럼 이를 악 물어야 했다. 자유롭기는커녕 모든 게 족쇄 같았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얼씨구나 하는 마음으로 수영을 관두었다.(그리고 기억력이 나빠서 몇 년 후에 같은 이유로 다시 등록하고....)
이번에도 비슷한 마음으로 수영장을 등록했다. ‘생존’, ‘물속에서의 자유’, ‘땀’ 대신 이번에는 단서를 하나 더 붙였다. 적어도 1년 동안 할 것. 진도와 상관없이 1년은 해보자. 그리고 지금은 7개월째다. 확실히 운도 좋았다. 스케줄 변동도 없었고, 수영장은 적당한 거리에 있었다. 무엇보다 수강생이 적었다! 사람이 적으니 뒷사람에 대한 압박이 덜했다. 그래도 나는 우리 반에서 제일 느렸다. 같이 다니기 시작한 사람 중에서, 조금 늦게 배운 몇몇 사람들보다도 더 오래 초급반에 남아있었다. 운이 좋다는 걸 계속 상기하고, 이 수영장의 장점들을 계속 생각했다. 가끔 너무 느린 내가 답답하고 부끄러울 때는 ‘나는 재활치료중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암시를 걸기도 했다. 어쨌든 6개월이 막 되었을 때 결국 나는 중급반으로 넘어갔다.
거북이 같은 진도. 그렇지만 거북이도 수영은 잘하는데!
지금은 수영이 재미있다. 여전히 숨이 차고, 여전히 물을 많이 먹는다. 그래도 확실히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자유형을 하며 숨을 쉬는 것이 이제는 어렵지 않다. 쉬지 않고, 어떤 자세를 유지하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난다. 조금씩 허벅지가 붙고, 조금씩 기우뚱거리는 일이 줄어든다. 이 변화들이 즐겁다. 내가 이렇게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두지 않았더니 기본들을 배울 수 있었다. 기본들을 배우고 나니 다음에 익힐 것들이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기뻤고, 다음에 배울 것들이 즐거웠다. 기본을 배우는 시간은 나에게 더 고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 시간을 버텨낸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그리고 5개월쯤 했더니 초급반에서 내가 제일 잘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ㅋ 이것도 정신 승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모든 일의 기본을 배웠다고 그 일이 재미있어지는 건 아니다. 오웬도 색소폰의 기본은 모두 익혔다. 단지 그 다음 단계가 기대되거나 즐겁지 않았던 거다. 이런 게 ‘맞지 않는다’는 것일 거다. 어쩌면 빨리 ‘자기가 더 많은 재능을 지니고 있고 재미도 있는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리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기본을 익히기도 전에 단지 힘들다는 이유로 그만 두려고 한다면, 말리고 싶다. 대부분 ‘기본’을 익히는 게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다. 나도 물을 좀 덜 좋아했거나, 땀을 엄청나게 많이 흘리는 체질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기억력이 나쁘지 않았다면) 다른 운동을 선택했을 거다. 활쏘기라든가, 요가라든가 다른 후보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기본을 익히고 났더니 수영이 재미있어졌다. 지각이나 결석을 좀 몇 번 하게 되었다고 내가 불성실하다고 생각하는 건 관두자. 넘어져 창피를 당했다거나 이런 일 한두번 겪을 수 있다. 이런 일로 전체를 망쳤다고 생각하지 않아야한다. 마음을 좀 가볍게 먹고, 나는 처음 하는 거니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계속 암시를 걸어가며 버티는 거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다음이 보이고, 재미가 있어진다. 장담할 수 있다! 내가 그랬다.
언젠가 돌고래처럼 수영할 날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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