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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

by 북드라망 2015. 8. 21.



공부의 힘,구의 우정,

그리고 시간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4년 전 작고하신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파릇한 20대에 한국전쟁을 겪으며 험한 시절을 보냈고, 이후 뒤늦게 등단하여 작가로 안정적인 삶을 꾸렸다. 그러던 1988년 전국이 88올림픽이라는 축제에 들떠 있을 때, 폐암 투병을 하던 남편을 잃고 이어 3달 간격으로 당시 겨우 스물여섯에 전문의 수련과정 중이던 외아들을 사고로 잃고 말았다.


“같은 해에 외아들을 잃었다. 참척의 고통을 어찌 이 세상에 있는 언어로 표현하겠는가. …… 내 꼴을 보더니 당장 수녀님[이해인 수녀] 계신 수녀원에 와 있으라고 하셨다. 그 몸으로 어떻게 가냐고 딸은 반대했지만 나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그 즉시 수녀님 하자는 대로 했다. ……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믿을 수 없게 되니까 저절로 하느님을 찾게 되었다. 밤을 새워 처절하게 기도한 적도 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제발 한 말씀만 해달라고 기도도 하고 때로는 대들기도 했지만 응답은 없었다. 수녀님이 간간이 나를 뒷산이나 바닷가에 데리고 나가 좋은 말을 들려주시긴 했지만 그럴듯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시진 않았다. …… 어느날부터인가 갑자기 식욕이 나기 시작하면서 나는 밥을 아귀아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런 내 꼴을 수녀님에게 보이는 게 부끄러워 수녀원을 나와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밥 잘 먹고 잘 살아라, 그게 내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완서, 『세상에 예쁜 것』, 257~261쪽〕




“나는 밥을 아귀아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아무리 병중이고, 예상한 죽음이라 해도 배우자를 잃는 것은 스트레스 최고 단계로 지목될 만큼 힘든 일이다. 그런데 연이은 파릇한 자식의 난데없는 죽음이라니…. 오죽하면, 자식이 먼저 죽는 일을 ‘참척’(慘慽), 참혹한 슬픔이라고 했겠는가. 밥이 넘어갈 리 없고, 생을 생각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생은 ‘의지’나 ‘생각’보다 먼저 존재하며, 그렇기에 그 자체로 위대한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밥 잘 먹고 잘 살아라”,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 같은 것이 아닐까.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박완서 선생처럼 삶보다 죽음이 나을 것 같은, 혹은 지금 여기가 곧 지옥인… 그런 순간을 겪는다.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을 해야만 할 때, 누구보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할 때, 어떤 오해로 세상의 비난이 쏟아질 때, 혈육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때, 몸의 한 부분이 회복 불가능하게 다치거나 병들었을 때, 온힘을 다한 일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을 때,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지금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을 때…… ‘차라리…’라는 생각이 우리 마음에서 불쑥 솟아오른다.


지금까지 살아오다 보니, 산다는 것은 그런 순간을, 그런 장애를 넘어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넘어가길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에 다시 ‘생의 의지’를 불러올 수 있는 건, 공부와 좋은 벗인 듯하다. 공부는, 신영복 선생의 말씀을 빌리면 ‘구도’(求道)이다. “그리고 구도에는 반드시 고행이 전제됩니다. 그 고행의 총화가 공부입니다.”(신영복,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돌베개, 2015, 18쪽) 고행이라는 공부는 우리에게 위기와 슬픔을 넘어설 수 있는 정신과 마음의 힘을 키워준다. 또 벗은 우리 자신에게 사로잡힌 공간에서 우리를 꺼내어 다른 자리로 옮겨준다. 마치 이해인 수녀께서 박완서 선생을 수녀원으로 데리고 가주신 것처럼. 내가 아득한 어둠속에 있었던 밤들마다 전화를 걸어, 혹은 직접 찾아와 자신의 공간으로 나를 데려가 주었던 친구가 있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의 목소리, 그의 한 걸음이 나를 다른 문턱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에겐 무엇보다. 시간이 있다. 어린 시절, 사랑의 슬픔에 세상이 무너진 듯 아파하는 청년이었다면 꼭 한번쯤은 들어왔을 것이다. 시간이 가면 또 다른 인연이 온다는 말을. 그때는 믿지 않지만, 믿을 수 없지만, 지나면 안다. 시간이 우리를 치유한다는 것을. 공부와 벗, 그리고 시간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의 이 암흑을, 고통을 넘어설 수 있다. 그 힘을, 그 우정을, 그 시간을 믿어 보시길…….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야말로 신(神)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박완서, 『세상에 예쁜 것』, 마음산책, 2012, 80쪽〕



세상에 예쁜 것 - 10점
박완서 지음/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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