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어릴 적'에는' 책 읽기를 참 좋아했지요


관한 최초의 기억?



중학교 시절의 추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당시 근처에 있던 포병 공창(군수품을 제조하고 수리하는 공장)을 둘러싼 벽돌담이다. 나는 매일 그 길을 따라 학교에 다녔다. … 집을 나서서 에도 강을 따라 이다바시의 다릿목까지 가서, 거기서 전찻길을 따라 왼쪽으로 꺾어져서 한참 가다 보면 왼쪽에 포병 공창의 붉고 긴 벽돌담이 나온다.
그 담장은 끝없이 이어지는데 … 그 길을 오갈 때 늘 책을 읽으며 걸었다. 히구치 이치요, 구니키다 돗포, 나쓰메 소세키, 투르게네프도 그 길에서 읽었다. 형 책, 누나 책, 내가 산 책을 가리지 않고 이해하거나 말거나 닥치는 대로 읽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모비딕, 2014. 86-88p


출판사 직원이라고 하면 왠지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당연히 좋아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도  “저도 그렇습니다.”라고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지만… 역시 지금은 그렇게 말하기가 좀 쑥스럽다. 심정적으로 가장 가까운 말은 “저는 어릴 적'에는' 책 읽기를 참 좋아했습니다.”이다.


어, 어릴적에는 참 좋아했지요.



책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7-8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친척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에 살았다. 근처에 살았던 친척 중에 막내고모가 있었는데, 고모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딸이 둘 있었다. 한동안 자주 고모네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놀러 가서는 사촌네 책상 밑에 들어가 꽂혀있는 책을 꺼내 읽곤 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아버지의 소설책들밖에 없었고, 그 책들은 한자가 너무 많아서 나는 읽을 수 없었다.(생각해보면 아버지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사촌네에서 내가 찾아낸 그 책들은 빳빳하고 컬러풀한 책들이었다.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의 맛을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그때 읽은 게 무슨 책이었는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지만, 책을 읽으며 느꼈던 기쁨 같은 것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 기억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내가 자기네 책을 읽고 있으면 사촌들이 귀신같이 나타나서는 다른 거 하고 놀자고 졸라대거나, 나중에는 책을 뺏거나 해서 읽지 못하게 했다. 결국 난 그 집에도 놀러 가지 않게 되었다.


저 부분을 읽으며 나도 어릴 적, 길을 걸으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도로를 지나고 작은 골목길에 들어서야 읽기 시작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구로사와 감독과 달리 나는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었고, 다음에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던 마음 같은 것도 기억이 난다. 저 시절에는 나도 구로사와 감독처럼 읽을 수만 있으면 뭐든지 읽었다. 물론 이야기가 있는 책을 더 좋아했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릴 때처럼 마냥 책 읽기가 즐겁지가 않았다. 한동안은 책을 읽다보면 딴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 읽어도 읽는 게 아니었고 그보다 최근에는 책을 읽으면 뭘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읽는 게 재미있지 않았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간편하게 게임이나 tv같은 것들에서만 즐거움을 얻고 있었다. 책 읽기는 더 이상 즐거운 일이 아니게 되었달까.



저 때보다 나이가 좀 더 들면서 책을 두 종류로 나누었던 것 같다. 교양이나 정보와 같이 목적이 있는 책이나 단지 즐거움만을 위한 책들. 목적을 두고 책을 읽다보니 책 읽기로 얻는 즐거움이 뭔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에게 이 책을 추천받아 읽기 시작해서는 거의 단숨에 읽어냈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담백하게 마음을 울리는 글을 읽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또 열심히 산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것 역시 기분 좋은 일이었다. 목적이나 사심 없이 책을 읽고 뿌듯함을 느낀 것이 참 오랜만이었다.(분량도 딱 적당했다;;)  그래, 책을 읽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이었구나-를 새삼 떠올렸다. 왠지 "저는 어릴적'부터' 책 읽기를 참 좋아했어요." 라는 말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달까.




책 밑을 제법 접어서 뚱뚱해졌다ㅎㅎ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그냥 읽고 “좋았다-”라고 끝내기에는 부족하다. 좋은 책을 읽고 즐거웠으니 욕심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건 욕심이라고 말하기 적당하지 않은데 다른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부분의 모서리를 접으며 읽다가 아차했던 부분, 그리고 요 씨앗문장 때문에 찾아 다시 읽다가 뜨끔했던 부분을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다음이 이번 하반기부터 슬슬 시작해서 다음해 1년 목표가 될 예정이다.


노트하는 습관

누가 말했는지는 잊었지만 “창작은 기억”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겪었던 경험과 읽었던 많은 것들이 내 기억 속에 새겨져,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할 때면 그것들이 바탕이 되어 준다.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청년 시절부터 책을 읽을 때 항상 옆에 노트를 끼고 있다. 거기에는 내 느낌과, 특히 나를 감동시키는 구절들을 적는다. 이런 대학 노트가 몇 묶음이나 있는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할 때 나는 그것들을 꺼내 읽는다. 그 노트들은 언제나 내게 돌파구를 마련해준다. 심지어 한 줄의 대사조차도 이 노트들에서 힌트를 얻는다.

- 같은 책, 350-351쪽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 10점
구로사와 아키라 지음, 김경남 옮김/모비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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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고로롱 2015.08.25 12:59 답글 | 수정/삭제 | ADDR

    어려서 얇지만 한장한장은 두꺼운 하드보드지로 된 공주물 동화책으로 독서를 시작했습니다. 책이 얇지만 종이는 두꺼운 거라, 내구성이 있어서, 일단 집을 지은 기억이 나네요. 책을 가운데로 펼쳐서 지붕을 만들었죠. 공주물로 독서를 시작한 결과, 핑크와 레이스, 머리핀에 집착하는 허영많은 어린이로 살았다는 ...

    • 북드라망 2015.08.25 14:04 신고 수정/삭제

      ㅎㅎ허영이라니요, 다 그런시절이 있는거죠. 스티커를 너무 잘 고르셔서 마냥 귀엽게만 느껴지네요.
      참고로 책으로 지은 집은 저도 조카들이랑 그렇게 놀아준 기억이 있답니다. 지붕은 펼쳐서 만드는게 제맛이죠! 암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