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춘추시대에 가장 어질고 의로웠던 오나라 사람, 계찰



진흙탕 속 한 떨기 연꽃 같은 사나이, 계찰






내 생각에 『사기』의 「오태백세가(吳泰伯世家)」에서 문제적 인물은 합려(闔閭)-부차(夫差) 부자(夫子)가 아니라 계찰(季札)이다. 사마천은 제후들의 가계와 역사를 서술하는 「세가」에서 곧잘 군주가 아닌 인물을 큰 비중으로 다루곤 하는데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에서는 범려가, 「오태백세가」에서는 계찰이 그런 인물이다.


계찰, 오나라의 19번째 왕 수몽 네 아들 중 막내. 돈후(敦厚)하고 총명했다고 한다.


계찰만큼이나 그의 나라인 오(吳)나라도 희한한 존재감을 가진 나라긴 하다. 『사기』의 「십이제후연표」를 보면 제일 앞 칸은 천자의 나라인 주(周)나라가, 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열네 번째 칸은 오나라가 차지하고 있다(그런데 마치 저 멀리서 맨 앞칸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주를 빼면 제후국은 총 열세 나라인데 왜 「십이제후연표」라고 했는가. 이 의문에, 오나라는 오랑캐의 나라이므로 천시하여 빼고 셈한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만큼 오나라는 빼도 박도 못하는 오랑캐의 나라다. 하여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심정적으로 주로부터 가장 먼 마지막 칸에 배치된 것은 아닐까. 게다가 오나라는 왕 수몽으로부터 가계가 시작되는데 이때는 이미 제환공(齊桓公), 진문공(晉文公)이 패자(霸者)가 되고도 한참 뒤인 주 간왕(簡王) 원년(BC.585년)이다. 다시 말해 다른 제후국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동맹을 맺고 전쟁을 일으키고 화친하는 등 매년 온갖 사건으로 「십이제후연표」의 칸을 채우고 있을 때 오나라는 250년 넘게 빈칸이었다는 것. 그러나 그 빈칸은 중원(中原)나라들과의 교류 부재를 나타낼 뿐이니 오나라는 없는 듯,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십이제후연표」에서 은근하면서도 확실하게 드러나는 오나라의 존재감은 「세가」에서 폭발한다. 「십이제후연표」에서와 달리 총 서른편의 「세가」중 가장 처음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오랑캐의 나라가 모든 제후국에 앞서 소개되고 있느나. “태백이 계력에서 양위한 것을 아름답게 여겨 「오세가 제 1을 지었다.” 사마천은 「태자공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공단보(古公亶父)-계력(季歷)-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으로부터 이어지는 주 800년 역사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고공단보의 첫째 아들 태백(太伯)이 막내인 계력에게 왕위를 양보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막내─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아들 희창(姬昌)─를 마음에 두고 있음을 눈치 챈 태백은 동생 중옹(仲雍)을 데리고 형만(荊蠻-오나라의 땅을 폄하하는 말)으로 달아나 오랑캐들처럼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나는 이제 오랑캐이니 중원의 왕이 될 수 없다'는 퍼포먼스였다. 형만 사람들이 태백을 어질게 여겨 그를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오나라의 시조 오태백이다. 태백이 오나라의 군주가 되고 5대가 지났을 때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후손에게 오나라를 봉해주었다. 하여 오랑캐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제후국이 될 수 있었던 것. 오나라가 다시 흥성한 건 태백으로부터 19대가 흐른 수몽에 이르러서다.




자, 이제 계찰 얘기를 해볼까. 계찰은 바로 이 수몽의 넷째 아들이다. 고공단보의 셋째 아들 계력이 그랬던 것처럼 계찰도 꽤나 어질고 현명했던 모양이다. 하여 수몽도 그에게 왕위를 물려줄 마음을 먹는다. 비슷한 상황이 다시 펼쳐진 셈인데 세 형은 막내 동생을 위해 달아난 것이 아니라, 형님이 있는데 자기가 왕이 될 수는 없다며 극구 사양하는 동생을 위해 형제세습이라는 편법을 쓰면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줄 작당들을 한 것이다. 허~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담. 하지만 계찰은 세 형을 거쳐 자기에게 순서가 왔을 때 왕위를 사양하고 만다.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형제끼리 피 튀기며 왕위 다툼을 벌이는 난장판 춘추전국시대에 유일하게 왕위를 사양한 인물 계찰! (고공단보는 주가 중원을 차지하기 전의 인물이니 논외로 치자.) 누가 태백의 자손들 아니랄까봐 아름다운 형제애와 사양 중 최고의 사양인 왕위 사양의 미덕까지 갖추었다.


왕은 되지 않았으나 현명한 계찰은 명을 받고 사신으로 제후국들을 방문하는데 가는 곳마다 군자로 추앙받는다. 노나라에 가서는 음악을 듣고 무슨 음악인지 다 알더니(공자에 앞서 이런 사람이 있었다!) 제나라에 가서는 안영(晏嬰)에게, 정(鄭)나라에 가서는 자산(子産)에게 조언하고, 위(衛)나라의 손문자(孫文子), 진(晉)나라의 숙향(叔向)에게도 충고의 말을 잊지 않는다. 저 쟁쟁한 사람들이 기꺼워하며 그의 말을 듣고 따랐으니 사마천의 말마따나 어질고 의로울 뿐만 아니라 견문 넓고 학식이 매우 높은 군자였음에 틀림없는 듯 하다. 「오태백세가」에서 거의 절반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며, 그가 사신으로 방문했던 나라들의 「세가」에서도 (제나라 빼고) 그의 기사가 빠지지 않는걸 보면 사마천이 계찰을 몸시 중요하게 생각했던 듯하다. 진흙탕의 시대에 한 떨기 연꽃 같은 존재, 계찰.



계찰의 어진 마음을 알 수 있는 고사, 계찰괘검(季札掛劍)의 한 장면. 

받는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며, 주려고 마음 먹었던 검을 무덤 옆에 걸어주고 있다.


재미있는 건 이 ‘연꽃 사나이’로 인해 이후 오나라는 왕위 다툼으로 인한 분란에 빠졌다는 것이다. 계찰이 왕위를 사양하자 셋째 형 여매(餘昧)왕의 아들 요(僚)가 왕위를 잇는데 맏형인 제번(諸樊)왕의 아들 공자 광(光)이 불만을 품었다. 형제세습이니 우리 아버지부터 계찰까지는 왕위가 전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계찰이 사양하였으니 당연히 내가 왕위에 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논리가 그럴싸하다(왕을 노리는 자가 자기 논리를 만들어내는거야 식은 죽 먹기지). 결국 공자 광은 초나라에서 망명해온 오자서의 도움으로 사촌동생 요왕을 죽이고 왕이 된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합려! 계찰은 이때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었는데 돌아와 조카들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政爭)을 보고 이렇게 말했단다.


“만약 선왕의 제사가 계속되고 백성의 주인이 계속 이어지며 사직에 계속 공양한다면 그가 바로 나의 왕이다. 내가 감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죽은 사람은 애통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섬김으로써 천명(天命)의 안배에 순응하고자 한다. 내가 일으킨 변란이 아니라면 누구를 왕으로 세우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바로 선인들이 세운 법도이다.”


그가 어찌 이런 상황을 바랐겠는가만은 이제 왕위를 사양한 것이 단순히 미덕으로 남을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의 탓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의 탓이 아닌 것도 아닌 미묘하고 복잡한 상황. 어쨌든 일은 벌어졌고 이 상황에서 왕실의 어른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에 더 이상의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었다. 오나라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면 그가 누구든 바로 나의 왕이라는 선언! 왕이었을 수도 있던 자의 선언을 누가 감히 거역할 것인가. 그는 이 한마디로 모든 혼란을 잠재운 것이다. 계찰은 요왕의 무덤에 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일을 보고하고 통곡을 한 후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새 왕의 명을 기다렸다고 한다. “연릉계자(延陵季子, 계찰)의 어진 마음과 의로움의 끝없는 경지를 앙모(仰慕)한다.” 그는 진정 사마천의 절절한 고백이 아깝지 않은 사나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어질고 현명한 인물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인간사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이니, 사마천은 그걸 노렸던 걸까?



글_윤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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