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한나라의 기반을 닦은 최초의 여장부, 여태후



태평성대의 기반을 독하게 마련한 사람

여태후(呂太后)




여후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굳세어 고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했으며 대신들을 주살할 때도 여후의 힘이 컸다.

<여태후본기> 중


중국사에 등장한 첫 번째 여장부 여태후! 사마천은 남자들의 올곧은 품성을 묘사할 때 주로 쓰는 단어인 剛(굳셀 강)과 毅(굳셀 의)를 여태후에게 증정함으로써 ‘치마 입은 대장부’로서의 여태후를 드러낸다. 아버지 여공(呂公)은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비범함’을 눈여겨보았고 꼭 귀인에게 시집보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공이 패현에 왔다가 만난 호걸(건달?) 유방(훗날 고조)을 보고 단박에 그의 귀한 딸을 내주었다. 왜? 그만한 호상(好相)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딸이 진정 귀인이 되기까지는 힘겨운 투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공은 어쩌면 딸이 보통 여자들처럼 안락하고 부유한 삶에 만족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여태후는 고조가 패현의 하급 관리일 때 혼자 아이를 데리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고조가 항우와 치열하게 싸울 때는 아이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탈출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고생은 고생도 아니었다. 여태후의 진면목은 한(漢)나라 개국 후에 드러난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기는 법. 유방의 모사였던 한신과 항우군의 길목을 쫓아다니며 끊어버린 일등공신 팽월을 제거하여 고조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자들에게는 도주를 하사했다. 태자 시절부터 끊임없이 폐위 설에 시달렸던 효혜제를 지켜내기 위해 신하들의 간쟁을 막후조종하고 고조의 책사 장량을 동원하여 기어이 아들 효혜제를 즉위시킨다. 이미 고조가 병중일 때 여후는 훗날을 거정했다. 개국 공신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누굴 믿어 국정을 맡길 것인가? 여덟이나 되는 아들들이 흑심을 품지는 않을까? 게다가 착하기만한 아들 효혜제는 그렇게 어렵게 오른 황제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중국 드라마에서의 여태후의 모습. 정말 굳센 모습이다!



여후는 아들이 즉위하자마자 고조의 여러 아들들에게 봉지를 주어 멀리 보낸다. 그러나 태자시절부터 눈엣가시였던 척부인은 영향에 감금하고 아들 조왕은 궁궐로 불러들인다. 인자한 효혜제는 조왕을 항상 곁에 두고 보살피며 독살당할까 경계하며 함께 밥을 먹었다. 그러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여후는 효혜제가 새벽에 사냥 간 틈을 타서 조왕 여의에게 독주를 먹인다. 이후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봅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돼지우리에 기거하게 하고 “사람돼지(人彘)”라 부르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효혜제에게 보여준다. 맘 좋은 효혜제는 그만 실성하고 만다. “이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나는 태후의 아들로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궁중여인비사쯤으로 생각한다면 사마천이 굳이 <여태후본기>를 쓸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고조본기>에 질투심 가득한 여태후로 그렸으면 될 것이다. 우리는 사마천이 여태후를 ‘굳세고 강직’하다고 말한 데 주목해야 한다.


여태후가 척부인의 아들을 경계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한나라를 개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전에 진(秦)나라는 승계 문제가 꼬이면서 뜻하지 않은 호해가 즉위했고 바로 나라가 망했다.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그것을 보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태후는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만약 척부인의 바람대로 태자가 바꾸었다 치자. 물론 여태후가 개국공신들을 동원하여 반역을 했을 테고, 다른 왕자들은 자의로 타의로 반란에 연루될 것이며 그러다보면 또 다시 진나라 꼴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이런 사실을 ‘비범한’ 여태후가 몰랐을 리 없다. 여태후는 더 이상의 권력투쟁을 막고 안정적으로 이 나라를 유씨의 나라로 이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적장자인 자신의 아들을 즉위시켜야 했고 그 아들이 나라를 유지해 갈 수 있는지 시험한 것이다. “아들아! 권력은 때로 이렇게 잔혹한 것이다. 네가 이것을 견딜 수 있느냐?” 권력은 우애 있는 형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다. 현실에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이 일상으로 일어났다. 효혜제가 고조의 담대함과 여후의 비범함을 물려받았으면 어머니를 기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효혜제는 어머니처럼 굳세고 강직하지 못했다. 평화로운 때에 태어났다면 순하게 살면서 성군이 되었을지도 모를 효혜제의 불행한 운명! 그는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고 정사를 팽개치고 주색에 빠져 살다 죽었다.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세운 나라를 보전하는 일이 더 여럽다.


효혜제가 죽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여후는 병권을 손에 넣은 후에야 비로소 통곡했다. 이후 병권은 자신의 친족인 여(呂)씨 일족에게 맡기고 여태후가 정치를 하기 시작한다. 아들인 효혜제가 죽고 허울뿐인 황제를 둘이나 즉위시킨 후에야 여태후는 죽음을 맞이한다.



사마천은 <여태후본기>의 마지막에서 그녀의 시대를 이렇게 평한다.


“고후가 여성으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하여 모든 정치가 방안을 이루어졌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으며 형벌을 가하는 일도 드물었고 죄인도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사짓는 일에 힘을 쓰니 의식은 나날이 풍족해졌다.”


제국의 초기 숱한 반란과 모반, 그리고 왕족들의 세력 다툼을 잔혹하게 정리한 여태후의 치세에 오히려 백성들은 평안했다. 어쨌든 권력이 분산되지 않아 서로 전쟁하느라 백성을 동원하지 않았고 진나라의 엄격한 법 집행을 없앴기 때문에 백성들은 살만했다. 한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울퉁불퉁한 돌을 골라내는 일을 한 사람은 바로 여태후였다. 주나라가 건국되고 나서도 끊임없이 정복전쟁을 했던 사람이 주공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기반 위에서 외척이 온순하다는 이유로 간택된 효문제는 별 어려움 없이 국정을 수행하며 뒤를 이은 경제 시대까지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다. 사마천이 보여준 <여태후본기>는 태평성대가 사람들의 선한 의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태평성대는 여러 세력들이 가진 비교적 균등했던 힘을 한쪽으로 집중시킨 결과이며, 더 이상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고 묻는 자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며, 왕이 아닌 자는 모두 왕의 힘에 굴복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권력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았던, 그래서 여장부인 여태후. 길에 돈이 떨어져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었다는 평화로운 시절은 이런 잔혹극 없이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제국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임을 사마천은 말하려는가?


글_홍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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