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로문 문사행저 자왈 유부형재 여지하기문사행지
冉有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염유문 문사행저 자왈 문사행지
公西華曰 由也問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求也問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赤也惑 敢問
공서화왈 유야문문사행저 자왈 유부형재 구야문문사행저 자왈 문사행지 적야혹 감문
子曰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先進 21)
자왈 구야퇴 고진지 유야겸인 고퇴지
공자: “부모형제가 계신데 어떻게 들었다고 곧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겠느냐.”
염유: “들으면 곧바로 실행하여야 합니까?”
공자: “들으면 곧바로 실행에 옮겨야지!”
공서화: “자로(由)가 ‘들으면 곧바로 실행하여야 합니까?’라고 여쭙자, 선생님께서 ‘부모형제가 계시지 않느냐’고 답하시고, 염유(求)가 ‘들으면 곧바로 실행하여야 합니까?’라고 여쭈자, 선생님께서는 ‘들으면 곧바로 실행하여야 한다’고 답하셨습니다. 제(赤)가 의문이 들어서 여쭈어 봅니다.”
공자: “염유(求)는 뒤로 물러나는 성품이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고, 자로(由)는 앞질러 나가는 성품이기 때문에 물러날 줄 알게 한 것이다.”
문사행저(聞斯行諸). 들으면 곧바로 실행하여야 하는가? 듣는다(聞)는 건 곧 ‘안다’(知)는 것이니 알면 곧 ‘행’(行)해야 하는가? 결국 앎이란 삶에서 실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 골치 아픈(!) 물음들 사이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건 이 문장의 주술적 힘이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한번 원문을 소리 내어 읽어 보시라. 뜻은 모를지언정 문사행저(聞斯行諸)만은 입에서 맴돌 테니까. 주술이란 본디 이런 것이 아니던가. 반복의 힘을 통해 언어가 몸으로 유입되는 사건! 이 문장의 매력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계속 되풀이되며 ‘들으면 행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환기시키는 힘. 읽으면 읽을수록 ‘들으면 행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힘. 은근슬쩍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주술을 우리도 모르게 세뇌시키고 있는 요 문장.^^ 그러나 이 기묘한 주술은 질문의 힘을 그 원천으로 삼고 있다.
대화는 세 개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질문은 모두 다르다. 자로와 염유가 묻고 있는 문사행저(聞斯行諸)는 같은 질문이 아니냐고? 물론(!) 다른 질문이다. 생각해 보라. 서로 다른 존재가 같은 질문을 던질 때 그게 동일한 질문일지. 누구와 질문이 연결되느냐에 따라 질문이 포함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게 구성되는 것은 아닐지. 아니 원래 세상의 모든 질문은 근본적으로 다 다른 출발을 가지는 건 아닐지. 세 개의 질문도 그러하다. 모두 知와 行을 문제화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자로는 자로대로 염유는 염유대로 공서화는 공서화대로. 공자가 이 문답에서 정확하게 간파해 내고 있는 건 바로 이 문제다.
자로가 묻는다. ‘들으면 곧바로 행해야 합니까?’ 근데 이 질문이 자로와 만나는 순간 좀 다르게 읽힌다. 일단 자로는 좋은 말을 들으면 그것을 실천하기도 전에 다른 좋은 말을 들을까 두려워했다는 제자다. 그의 주된 관심사가 배운 걸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잘 안 된다. 아는 걸 열정적으로 실행에 옮겨도 매번 실수로 점철되는 게 그의 인생이다. 그러니 자로가 던진 질문은 사실 ‘들으면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에 더 가깝다. 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좌충우돌하는 자로. 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질문만큼 절절한 것도 없다.하지만 공자는 봐주는 법이 없다. 자로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다.
바로 겸인(兼人)이 그것. 겸인(兼人)이란 사람을 깔본다는 의미다. 즉, 조금 안다고 사람들을 얕잡아보는 게 자로의 승질머리라는 의미다. 이 자만심이, 아는 걸 어떻게 行으로 옮길까라는 질문보다 늘 앞서 있으니 뭔 일을 해도 잘될 턱이 있겠는가(우리 이거 너무나 잘 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공자가 자로에게 내린 처방도 절묘하기 그지없다. ‘부모형제가 계시지 않느냐!’ 아무리 지 잘났다고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니는 놈도 고개 팍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부모형제’. 그들 앞이라면 과연 나는 아는 걸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고민해 보고 실천하라는 충고. 남 깔보기 좋아하는 자로에게는 그야말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상황을 고려하라는 공자의 멋진 조언인 셈이다.
다음은 염유. 염유도 공자에게 묻는다. ‘들으면 곧바로 행해야 합니까?’ 그런데 염유라는 인물을 생각하면 이 질문 속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다. 염유는 다재다능한 제자다. 그는 당시 노나라의 실질적인 권력자나 다름없었던 계씨의 가신(家臣)으로 등용되었던 인물이다. 공자 제자들 가운데 가장 출세한 제자임은 물론이다. 이 때문인지 염유는 늘 공자학당과 계씨집안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는 전법을 구사한다. 스승의 말을 들으면 그 말이 옳은 것 같은데 현실에 그걸 적용하려니 벽은 높고 당근 그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이런 염유의 입장에서 보면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왠지 ‘들은 건 꼭 행해야 하나요?’ ‘꼭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뉘앙스로 다가온다. 앎과 삶의 괴리! 염유가 절실하게 고민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우리도 여기서 그닥 자유롭지는 않다).
허나! 공자는 단호하다. 염유에게는 들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행하라고 주문한다. 아니 명령에 가깝다. 앎과 行 사이의 간격을 두지 말라! 공자도 염유의 상황을 충분히 간파했을 터인데 공자가 이런 초강수를 두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번은 염유가 계씨에게로 가는 세금을 너무나도 잘 거둬들인 일이 있었다.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먹을 것도 부족한데 거기다 세금까지 착실히 납부해야만 하는 상황. 공자는 염유를 불러다 놓고 좋게 말한다. ‘니가 그러면 되겠니? 세금 거두는 일을 좀 줄여라.’ 하지만 염유는 공자의 요구를 거절한다. 염유에겐 공자보다 계씨에서 충성하는 일이 중요했던 것. 결국 공자가 염유를 학당에서 파문하고 나서야 이 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러니 염유에게 공자가 내린 처방은 알면서도 그 앎을 외면하고 있는 제자를 향해 휘두르는 무서운 채찍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공서화는? 공서화의 질문은 이미 벌어진 상황을 아주 깔끔하게 정리하며 시작한다. 핵심은 자로와 염유에게 왜 다르게 답하셨느냐는 것이다. 공자는 공서화의 이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답한다. 자신이 왜 두 제자에게 다른 답을 줄 수밖에 없었는지 ‘풀어서’ 설명한다. 자로는 너무 나대니까 물러나게 한 거고 염유는 안 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니까 등을 떠민 것이다. 공자가 자로나 염유에게 했던 충고의 진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공서화는 스승이 풀어서 답해 주기 전까지 스승의 대답을 알아들을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 스승이 내린 답을 풀 수 있었다면 공서화는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즉, 공자가 제자들에게 준 답은 쉽게 풀릴 만한 답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 점에 착안한 아주 재밌는 해석이 하나 있다. 잠시 음미해 보시길!
중국 사상계의 이단아라고 불리는 이탁오는 이 문장을 이렇게 평했다. ‘공서화는 애초에 질문을 하지 않았으며, 자로와 염유가 도리어 공서화를 통해 질문을 한 것이다. 이 점을 알아야만 한다, 이 점을 알아야만 한다.’ 대체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자로와 염유가 선생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서화를 시켜서 공자에게 다시 질문을 했다는 게 이탁오의 생각이다. 지행합일을 묻는 근엄한 문장이 한순간에 코믹버전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선생에게 물었는데 그걸 이해하지 못해서 쩔쩔매는 제자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지 않는가. 마치 현장에서 보고 있는 듯이 그 현장을 꿰는 이탁오만의 재기발랄함!
이 문장에서 공자의 위대함도 바로 이 현장성에 있다.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자로와 염유에게 준 공자의 대답에는 전제가 깔려 있다. 바로 ‘들으면 실행한다’는 게 그것이다. 지(知)는 행(行)으로 나아갈 때 의미가 있다는 것. 그런데 흥미로운 건 공자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는 데 있다. 즉, 백날 지행합일해야 한다고 떠들어 봐야 소용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지행합일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 그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 이게 지름길이다. 이걸 가르쳐 주려면 제자들이 있는 현장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지금 제자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그가 처한 상황은 어떤 것인지, 그것 때문에 인생을 망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자는 그들의 현장에서 고민하고 답한다. 지행합일이라는 지식을 강요하기보다 그것을 제자들의 삶에서 실천 가능한 ‘앎’으로 가공하는 일. ‘맞춤형 교육 서비스의 달인!^^’ 그가 바로 선생 공자였다.
『슬램덩크』의 안선생님은 강백호를 위해 맞춤형 훈련을 제안한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믿음과 열정이 담겨있음은 당연지사!
우리가 이 문장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한다’는 명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등장인물들 모두가 앎과 삶의 문제를 가지고 서로 질문하고 답하고 있는 이 현장에 주목해야 한다. 자기 삶의 질문이 있고 그걸 허심탄회하게 물을 스승이 있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스승의 의중을 캐기 위해 보낼 수 있는 도반이 있는 이 현장. 우리는 자기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혹은 뒤로 물러나게 하기 위한 현장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가지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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