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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리포트

[쿠바리포트] 까마구에이 지방대 이야기

by 북드라망 2021. 3. 23.

까마구에이 지방대 이야기

 


아디오스, 몰포


폭풍 같았던 1학기가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된 지도 벌써 3주가 지났다. 2학년 1학기와 2학기 사이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1학기와 함께 우리들은 ‘몰포’(<Morfología>라는 교과서 이름을 우리끼리 이렇게 줄여 부른다)의 악몽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드디어!

몰포는 쿠바에서 공부하는 의대생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국민 교과서다. 몰포의 앞부분은 해부학, 생화학, 조직학, 발생학의 기본기를 다지고, 뒷부분은 여기에 생리학까지 더해서 총 여덟 개의 신체 시스템을 총괄적으로 설명한다. 이 모든 내용이 삼 학기만에 끝난다. 지나치게 알뜰한 교과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거북목, 시력 저하, 수면 부족, 불안증, 우울증, 기타 등등의 병증을 경험하게 된다. 최근에 한국 의대생들과 잠시 말을 섞을 기회가 있었는데, 몰포의 내용들은 한국에서라면 모두 본과 1학년(쿠바로 치면 3학년) 때 따로 공부하는 과목들이라고 한다. 그때야 알았다. 우리가 그냥 피똥 싼 게 아니었다. 의대생들이 유일하게 놀고 먹을 수 있다는 예과 시절이 쿠바에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몰포의 압박에 짓눌리면 짓눌릴수록, 우리는 이 책과 작별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굿바이 몰포 파티’를 한 번 거하게 하자고 호언장담했다. 그렇지만 정작 기말 고사가 끝나자 우리들은 모두 각자의 집에서 조용히 퍼져서, 페트리 접시에 옮겨진 박테리아처럼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만 충족시켰다. 자고, 자고, 먹고, 또 자고…… 이럴 줄 알았다. 1학년 1학기 때도, 또 2학기 때도 이런 패턴이었다. 이러니까 의대생들은 제대로 놀 줄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거다. 게으름을 떨쳐내고 내가 한 번 파티를 조직해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기말 고사에 낙제해서 재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마음에 걸려서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그렇지만 나는 이번 방학에 생산적인 일을 한 가지 해냈다. 아바나를 벗어나 지방을 여행하겠다는 계획을 마침내 실천한 것이다. 산타 클라라, 까마구에이, 산티아고 데 쿠바가 여행 후보지에 올랐고, 최종적으로 까마구에이가 낙점 되었다. 여행 멤버는 나, 내 룸메이트가 된 브라질 친구 라리사, 그리고 오랜 친구 제프리였다. 그러나 여행의 목적은 관광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보다 더 중대한 임무를 안고 길을 떠났다. 이른바, ‘지방대 탐험’이었다.

한국에서 지방대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어감이 깔린다. 성적이 훌륭하지 않은 학생들만 모이는 곳, 훗날 취업에 대한 잠재력이 떨어지는 곳으로 인식된다. 지방에서 수도로 진입하는데 (‘인-서울’) 실패한 사람들의 거취지인 것이다. 그러나 쿠바에서 지방대는 말 그대로 ‘지방에 있는 대학교’를 뜻한다. 주소지만 다를 뿐, 아바나에 있는 대학들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이는 대학교들이 100% 국가에 관리되기 때문이다. 모두 동일한 커리큘럼을 따르고, 일관된 채점 시스템을 따르며, 무엇보다 모두 무상이다. 물론 규모 면에서는 차이가 난다. 의과대학 캠퍼스가 9개나 되는 아바나와 달리 산티아고 데 쿠바는 단 2개, 까마구에이는 1개의 캠퍼스만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순전히 지방 도시의 인구가 적은 까닭으로, 교육의 질과는 상관이 없다.

까마구에이 의대 캠퍼스

내가 ‘탈-아바나’, 즉 ‘인-지방’을 시도하기로 결심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전부터 우리들은 3학년 때 어떤 캠퍼스로 옮겨가야 할 것인지 계속 토론해왔다. 우리 캠퍼스(히론)에는 따로 부속된 병원이 없기 때문에 실습이 시작되는 3학년부터는 모두들 다른 캠퍼스로 옮겨간다. 그리고 이는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쿠바 학생들이야 무조건 교육부가 지정해주는 곳으로 가야 하지만, 각자 자기 돈 내고 온 우리들은 캠퍼스는 물론이요 도시까지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실습이 의대 교육의 꽃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이 선택의 자유는 상당한 이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바나의 8개 캠퍼스를 앞에 두고 머리를 굴렸을 뿐, 쿠바의 수도를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바나 라이프에 적응하는 데에만 이 년을 꽉 채웠는데, 이곳을 떠나서 또 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날 지치게 했다.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지방 라이프는 아바나 라이프보다 곱절은 빡세다고 했다. 아바나에 식용유가 떨어지면 지방에는 도시 가스가 떨어지고, 아바나에 닭고기가 떨어지면 지방 가게는 텅텅 비어 있는 식이라는 것이다. 지방에는 LTE 데이터 서비스도 없고,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커피 한 잔 할 예쁜 카페도 없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고 해도 버스를 타고 아바나까지 이동해야 한다. 이미 충분히 힘든 쿠바 인생인데, 뭐하러 스스로를 더 괴롭힌단 말인가? 그래서 누군가 지방에서 공부할 거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안 간다면서.

말레이시아 의사 언니들^^ (글 후반부 등장!)

요즘 내가 실감하는 것 중 하나는 절대로 ‘절대로’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확고했던 내 마음은 어느 날 손바닥처럼 뒤집혔다. 첫 번째 계기는 산티아고에서 공부했던 선배 의사들과의 만남이었다. 제프리가 이 년 전에 소개 시켜준 가정 의학 전문의들로, 그녀들의 따뜻한 성품에 감탄해 지금까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녀들은 지난 10월 산타 클라라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치자마자 짐을 싸들고 우리 집 대문을 두드렸다. 아바나의 대사관에서 공증 절차를 거치는 동안 신세 좀 지겠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그들은 내게 의대 생활에 관한 여러 조언들을 해줬는데,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정보도 있었다. 지방 사람들은 아바네로들보다 더 인심이 좋기 때문에, 병원에서 실습하는 학생들에게 더 호의적으로 군다는 것이다. 어떤 할아버지 환자가 셔츠를 풀어 헤치며(!!!) ‘두려워하지 말고 내 몸으로 공부해’라고 말씀하시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뒷통수를 얻어맞는 충격을 느꼈다. 3학년부터는 환자와의 관계가 아주 중요한데, 내게 자발적으로 ‘배움의 자원’이 되어줄 사람들이 지방에 거처한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다.

두 번째 계기는 내가 고려했었던 아바나 캠퍼스 ‘파하르도(Fajardo)’에서 인종주의가 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나야 워낙 희귀한 아시아인이니 노골적인 시선과 언사에 익숙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 받지는 않는다. 아마도 한국의 발전된 사회를 의식해서 그런 것이리라. 그러나 피부색이 어두운 아프리카 출신 친구들이 내 주변에서 무시받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불편한 상황을 마주할 것이 뻔했다.

바로 그때 섬광처럼 ‘지방대’의 옵션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바나보다 생활 환경이 어렵다고 해도, 공부 환경이 더 좋다면 그게 더 올바른 선택이 아닐까? 생활비 역시 3분의 2에서 절반 가까이로 줄어드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어차피 집과 학교만 왕복하면서 살고 있는데, 예쁜 카페와 좋은 레스토랑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렇게 크게 타격을 입을 것 같지도 않았다. (힘들다는 이유로 거부했던 지방의 생활 환경이 순식간에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같이 공부하고 있던 라리사를 꼬셨다. 이봐, 너만 보면 매일 휘파람 불며 추파를 던지는 아바네로에게 지쳤어? 함께 지방을 가는 게 어때?

 


신사의 도시, 까마구에이


결정은 충동적이었으나 행동은 확실하게 취했다. (의대 진학을 결정할 때도 머릿속에 이런 번개 같은 섬광이 내리쳤었다. 평소에는 조용해 보이는 내가 이렇게 ‘급결정’을 내리는 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자주 놀란다. 아무래도 나는 이성보다 ‘삘’에 의해 조종되는 사람인가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까마구에이로 여행을 떠났다. 까마구에이는 내 친구 라리사가 추천한 도시다. 라리사의 사촌이 십 년 전에 쿠바에서 의대 공부를 했었는데, 첫 이 년은 아바나에서 보내고 3학년부터 졸업까지는 까마구에이에서 보냈다고 한다. 이곳에서 사촌은 훌륭한 의사가 되어서 본국으로 돌아갔고, 사촌의 괄목할 만한 성장에 깊은 인상을 받은 라리사의 아버지가 마침내 그녀를 쿠바에 보내기로 결심하였으니, 까마구에이는 분명 그녀에게 큰 의미가 있는 장소다.

 

까마구에이를 추천한 라리사


까마구에이까지 가는 길은 결코 짧지 않았다. 쿠바의 대표적인 중부 도시인 이곳은 아바나에서 570km 떨어져 있다. 거리도 멀지만 시간은 더 멀다. 무려 버스로 9시간이나 되는 여정이다. 쿠바 버스는 고속도로를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것인가 의문이 들겠지만, 이는 버스가 각 도시마다 멈춰서서 사람들을 내려주고 또 태우면서 시간이 지연되는 까닭이다. 새벽 6시에 출발한 버스는 오후 3시가 넘어서야 까마구에이에 도착했다. 그 동안 우리들은 냉장고 같은 버스에서 에어컨 바람과 맞서며 벌벌 떨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뜨거운 햇볕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까마구에이의 사이즈가 그리 크지 않아서 숙소까지 걸어가는데 20분이면 충분했다.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꼈다. 우선 길이 깨끗했다. 패인 구멍도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택시보다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니는 것도 눈에 띄었다. 학생들이나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양복에 넥타이를 맨 신사들도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지 않은 도시여서 우리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최소한 이들은 아바나의 삐끼들처럼 공격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택시 기사들이나 다가와서 간단하게 ‘택시?’라고 물어볼 뿐이었다. 까마구에이에로들이 구사하는 스페인어는 아바네로의 스페인어에 비하면 훨씬 신사적이어서, 그마저도 정중하게 들리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곧 우리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풍경이 나왔다. 신작로를 따라서 가게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가게마다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바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텅 빈 가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물건들은 관광객들을 겨냥한 기념품이 아니라, 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품들이었다. 샴푸, 린스, 화장지, 거기에 침대 매트리스까지 발견했을 때에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뭐지? 분명히 지방 생활이 아바나 생활보다 더 어렵다고 들었는데? 결국 그건 다 루머였던 것인가?!

 

까마구에이 거리


우리의 입은 다물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벌어졌다. 음식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까마구에이는 쿠바에서도 맛있는 음식으로 유명한 지방이었다. 그렇지만 여행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식당에서 특별해 보이지 않는 음식을 시켰는데, 생각치도 못하게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기뻤던 것은 까마구에이에서가 처음이었다. 단 한 번도 쿠바 음식을 사랑한 적 없던 나였지만 이곳에서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우리가 특히 열광했던 것은 ‘또스따노 레예노’라는 전채 요리였다. 쁠라따노(바나나의 일종)를 튀긴 후에 그 안에 여러 종류의 음식을 채워넣는 음식인데, 치즈와 햄을 섞어서 얹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가격도 착했다. 여섯 개에 단 돈 2천 5백원이었다. 결국  나와 라리사는 까마구에이에서 돌아올 때까지 몸무게를 2킬로그램이나 더 찌우고 말았다. 도시가 준 선물이었다(ㅠㅠ).

먹기만 잘 했을까? 걷기도 잘 걷고, 자기도 잘 잤다. 우선 참으로 조용한 게 마음에 들었다. 사람도 적고 자동차도 적은 까마구에이의 밤은 아바나보다 훨씬 더 평화로웠다. 물론 이곳도 쿠바인지라, 스피커 볼륨을 100에 맞춰 놓고 열정적으로 길거리 파티에 임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소음도 금세 지나갔다. 도시 내에서 이동하는 것도 아바나처럼 스트레스 받지 않았다. 인구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택시 수가 많았고, 또 택시가 없으면 말 마차를 타거나 아예 걸어다니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도시가 작은 규모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내가 대도시가 아니라면 심심해서 절대로 못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도시에 와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측면이 있었다. 근 이 년간 ‘절전형 모드(즉 의대생 모드)’로만 살다보니 나도 변한 모양이다

 


반나절의 친목으로 하룻밤을 난다

 

우리는 까마구에이에 도착한 다음날 곧바로 캠퍼스 구경에 나섰다. 그런데 그 날이 하필 일요일이어서, 마음대로 휘젓고 돌아다니다가 학생회장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그는 ‘오, 심심했던 내게도 드디어 할 일이 생겼군’ 하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과하게 적극적인 태도로 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안내의 요지는 결국 사무실이 열리는 월요일에 다시 돌아오라는 소리였지만. 그는 까마구에이 의대 캠퍼스에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학생들이 공부한다며 자랑을 늘어 놓았고, 내 얼굴을 보더니 아시아인도 꽤 있다고 묻지도 않은 말에 답했다. 몽골인, 스리랑카인, 부탄인, 캄보디아인, 말레이시아인……

잠깐, 말레이시아인? 나는 제프리, 아리엘, 그리고 두 말레이시아 의사 언니들을 통해서 쿠바에 머물렀던 말레이시아 의대생들의 프로필을 거의 대부분 꿰고 있었다. (합쳐봤자 20명 밖에 안 된다.) 그런데 까마구에이에 말레이시아인이 있다니, 분명 지나가는 말로라도 이 친구에 대해 내가 들었을 게 분명했다.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고 곧 결과를 도출했다. 그렇다, 쉬린(의사 언니)이 친하게 지내는 말레이시아 학생이 까마구에이 캠퍼스에서 5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쿠미따였다. 당장 연락을 취해야 했다!

쿠미따와의 예상치 못한 즉석 만남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엘람 선배와의 즉석 만남이 그날 저녁에 이루어졌다. 쿠미따는 자신의 의대생 동기인 조지를 저녁 식사에 데려왔고, 내성적인 쿠미따와 달리 조지는 상당히 활발했다. 멋모르는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마음으로 충만했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까마구에이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씩 풀 수 있었다. 이들은 까마구에이 생활에 몹시 만족하고 있었다. 지방 생활은 단순하고 때때로 지루하지만 의학 공부에 집중하기에는 그 편이 더 좋다고 했다. 까마구에이에 캠퍼스는 하나 밖에 없지만 학생 수에 비해 교수들이 많아서 오히려 더 확실하게 배울 수 있다고도 했다. 전공의가 아닌 학부생 때는 아바나나 지방이나 큰 차이 없이 교육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까마구에이에로들 사이에서는 로컬 커뮤니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이들도 외국인을 ‘걸어다니는 ATM’으로 여기는 경향이 없지 않았지만, 일단 우리가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보호해 준다고 했다. 아바나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태도였다.

우리는 다음날 학교 캠퍼스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고, 이들은 약속을 지켰다. 이튿날 아침, 우리가 교수에게 학교 구석구석을 소개 받는 동안 쿠미따와 조지가 동행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쿠미따와 조지의 친구들과 모두 인사를 하게 되었다. 학생회장의 말마따나 이곳의 유학생들의 국적은 상당히 다양했다. 가장 드라마틱했던 순간은 까마구에이 캠퍼스에 존재하는 유일한 브라질 학생이 나타났을 때였다. 그의 이름은 라에르따였다. 쿠미따와 조지가 브라질인인 라리사를 배려해 일부러 연락을 취한 것이다. 아바나 히론 캠퍼스에서 역시 유일한 브라질인으로서 외롭게 학교 생활을 했던 라리사는 감격에 벅찼다. 이 둘은 총알이 멈추지 않고 발사되는 총처럼 따따따따 브라질식 포르투갈어로 대화를 시작했고, 점심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도 말의 향연이 끊이질 않았다.

캠퍼스를 떠나면서 우리는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혹시 아바나에 여행을 온다면 꼭 연락을 달라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쿠바에서는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정을 표현하는 법이 없다. 나는 이것을 말레이시아 학생들과 우정을 나누면서 톡톡히 배웠다.

 

아바나에 놀러와 기타합수를 즐기는 라에르따


그러나 ‘가는 정’이 아바나로 되돌아간 후 딱 4일 만에 우리에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라에르따가 버스를 타고 아바나에 나타난 것이다. 그날은 내가 라리사 집으로 이사한 (쿠바에서 내가 사는 여섯 번째 집이다) 날이기도 했다. 그는 아직 이삿짐이 쌓여있는 집 거실에서 점심과 저녁을 거하게 먹고, 우리와 수다를 한바탕 떨고, 잠까지 푹 잤다. 구석에 서 있는 기타 두 대를 보더니(한 대는 내 꺼, 나머지는 현우가 두고 간 거) 흥분해서는 우리에게 끈질기게 합주 요청을 하기도 했다. 어찌나 변죽이 좋은지, 그를 알게 된 지 딱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그와 같은 학교 출신이 된 것만 같았다. 쿠바에서는 이렇게 친구를 만들기도 하나보다. 최소한 까마구에이로 갔을 때 외롭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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