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와 탁구
의사와 환자는 종이 한 장 차이
의사 되기 전에 환자 된다. 우리끼리 종종 하는 말이다. 카페인이 비뇨계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 공부하면서 커피를 사발로 들이마시고, 싱싱한 신경계를 위한 숙면의 효과를 달달 외우면서도 매일 취침시간을 더 짧게 깎아나가고, 운동의 효과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순환계의 작동 원리를 분석하면서도 정작 우리 몸은 하루 종일 책상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완벽한 삶과 앎의 불일치다.
일시적인 희생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면 잠시 마음이 편해진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의학’이라는 산에 오르려면 잠이든 밥이든 미용이든 뭐든 하나는 포기해야 할 것 아닌가. 우선 이것만 이해하고 나면, 학업을 다 마치고 나면, 그렇게 의사가 되고 나면, 그때 건강을 챙기는 거야……. 끝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다. 자기 건강을 손수 챙길 만큼 ‘여유롭게 일하는 의사’를 자주 보는가? 나는 못 봤다. 내 주변의 의사들은 다들 다크서클이 광대뼈까지 내려온 채, 우리를 보면서 “학생 때가 좋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러니까 의대를 이미 졸업하여 취업전선에 뛰어든 선배들은 나의 넋두리가 팔자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매년 새 학년으로 올라갈 때마다 나는 ‘작년에 나는 진정한 지옥을 맛본 게 아니었다’고 탄식할지도 모른다. 이것보다 더 힘들 순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로 더 힘든 상황이 닥치니까. 결국 답은 하나다. 상황과 상관없이, 핑계 대지 말고, 지금 당장 건강부터 챙기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개인에게 양생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 맞다, 그렇다! 그렇게 나와 친구들은 책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고 ‘의대생에게 건강관리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한마음으로 토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계를 보고는 흘러간 시간에 깜짝 놀라서 다시 책에 고개를 처박는다……. 우리도 참 답 없다. ㅠㅠ.
건강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그래도 사람이 아예 죽으란 법은 없는 것인지, 최근에 운동을 하게 되는 상황이 계속 찾아오고 있다. 나의 의지보다는 외부 조건이 더 크게 작용하긴 했다. 그래도 이거라도 안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계속 그 끈을 붙잡고 있다.
첫 번째 계기는 9월에 있었던 석유 파동이었다. 지금까지 쿠바의 석유 공급처는 베네수엘라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주의 정권이라는 동지 의식으로 맺어진 이 두 나라는 석유와 의료 인력을 교환하며 서로의 약한 부분을 지탱해주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가 혼돈의 상황으로 빠지면서 쿠바의 석유 보유량도 불안정하게 출렁이게 되었다. 이렇게 될 것이라는 소문은 올해 초부터 있었으나, 그것이 현실로 드러난 것은 새 학기가 시작되던 9월이었다. 갑자기 버스가 오지 않았다. 택시 기사들은 기름을 채우기 위해 주유소에서 4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고, 덕분에 택시비가 두 세 배로 뛰었다. 그리고 우리 학교는 마을버스에 의지하지 않으면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외진 곳에 있었다. 친구들 모두 학교에서 5km~10km 떨어진 곳에 살았다. 자동차를 타면 15분이면 충분히 주파할 수 있지만, 두 발에 의지하는 순간 최소 한 시간은 잡아야 할 거리다. 결국 우리는 한 달 동안 학교와 집을 왕복하기 위해 매일 ‘쇼’를 해야 했다. 히치하이킹을 하고, 대로까지 걸어가고, 사람이 꽉 차서 닫히지도 않는 버스 문짝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나도 여기 매달려봤다. 쿠바 사람들이 처음에는 외국인도 이렇게 험하게 사는 것을 신기하게 쳐다보다가, 내 교복을 보고는 안쓰럽게 시선을 바꾸더라.)
그런데 그때 거실 구석에 서 있는 아름다운 자전거가 내 눈에 들어왔다. 한때 ‘뉴욕-플로리다’ 자전거 종주를 꿈꾸면서 뉴욕에서 거금을 투자해서 구매했던 내 아이다. 예상하시겠지만 당연히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뉴욕을 떠날 때까지 좋은 가격에 재판매하지 못해서 결국 이 먼 섬나라까지 데려와야 했다. 쿠바에서도 몇 번 타지 않아서 새 것처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런 어려운 순간에도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면, 자전거가 속으로 울지도 모른다. 자기는 그저 장식용으로 나에게 팔려왔느냐고…….
결국 나는 자전거로 통학하기로 했다. 멀쩡한 자전거를 썩히고 있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은 사실 둘째였고, 오지도 않는 차를 잡기 위해 사람들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쌓인 피로도가 이미 한계치를 넘어섰다는 게 더 결정적인 이유였다. 나는 몸이 그래도 덜 망가진 이십대고, 내게는 훌륭한 자전거가 있고, 거리에는 차가 없다. 자전거를 타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움직이기 싫어하는 내가 이런 결론까지 도달하다니, 쿠바는 정말 대단한 나라다. 매일 조금씩 ‘나’를 바꾸어간다.
내 인생의 역사적인 결정은 금방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내가 뎅게에 걸려서 강제로 학교를 쉬었던 탓이다. 뎅게의 충격으로부터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자, 그 다음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자전거 보관 방법이었다. 학교에 세워둘 수는 없었다. 자전거 도둑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들은 학교 공사 노동자로 위장하고 들어와, 가장 좋은 자전거를 골라서 자물쇠를 끊고 바람처럼 유유히 사라진다. (바로 옆에 경비실이 있지만 경비원들은 대개 서로 수다를 떠느라 바쁘다. 이것이 그들의 주된 업무인 듯 싶다.) 결국 나는 친구에게 학교 근처에 사는 쿠바 아주머니 한 분을 소개 받았다. 다달이 돈을 지불하고, 그 분 집에 자전거를 보관하기로 한 것이다. 자, 세팅은 끝났다. 이제는 실천만 남았다.
첫날부터 쉬울 거라는 예상은 안 했지만, 첫날은 정말로 힘들었다. 낮 1시, 하루 중 가장 더울 때 내가 지름길이랍시고 택한 길이 사실은 엄청나게 가파른 언덕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길 양 옆으로 모두 군사 지역이어서 흉흉한 철조망이 세워져 있었다. 여기서 사고라도 나면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못할 것 같았다. 수업에 늦게 도착할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으나, 나는 아예 도착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여름날 개처럼 혀를 밖으로 빼물고, 있는 힘 없는 힘을 쥐어짜 결국 학교에 닿았다. 깐깐한 교수는 10분 늦었다고 내가 강의실에 발도 못 들이게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강의실의 문은 앞뒤로 활짝 열려 있었다. 학교가 에너지를 아끼겠답시고 대형강의실의 에어컨 전기를 완전히 차단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써 학교에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작동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게 되었다.) 100명이 앉아서 수업을 듣는 오후의 강의실은 인간 찜통이 되었고, 교수와 학생들은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존해서 열을 식혀야 했다. 결국 나는 활짝 열린 문 밖에 앉아서 강의를 들었다. 밖에서도 대형 스크린에 프로젝터로 쏘아진 파워포인트는 아주 잘 보였다. 게다가 이 해부학 교수는 발성 좋기로 유명해서 리스닝에도 문제가 없었다. 교수는 중간 중간에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으나, 강의실 ‘밖’에 앉아있는 나를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아, 쿠바에 살면서 느는 것은 뻔뻔함뿐이다.
귀갓길, 나는 후들거리는 허벅지를 다시 자전거 페달 위에 올려놓았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정상적인 길을 택했기에 난이도는 내려갔다. 그래도 여전히 오르막길이긴 했다. 내가 이 짓을 과연 계속 할 수 있을까, 가슴 깊은 곳에서 회의가 들던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외쳤다. “치나, 달려(China, corree)!” 뒤돌아보니 쿠바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젊은 놈이 뭐 그리 허약하냐는 핀잔 섞인 시선을 한 번 던지더니, 유유자적하게 나를 가로질러 앞서나갔다. 그때 나는 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할아버지의 자전거는, 장난감 자전거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허접했다! 기어는 하나 밖에 없었고, 안장도 낮았고, 차체도 작았다. 이 형편없는 자전거에 앉아서 할아버지는 세상에 걱정할 것 하나 없다는 평온한 표정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8단 안장을 갖춘 값비싼 자전거에 앉은 청년은, 걷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속도로 꾸역꾸역 페달을 밟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이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자존심에 거대한 스크래치가 나던 순간을.
첫 날의 경험 덕분에 나는 아직도 자전거 통학을 포기하지 않았다. 교통 상황도 많이 좋아지고, 수면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자전거가 소환되는 횟수는 결국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었다. 그렇지만 몸 상태는 자전거를 타지 않았을 때와 확연히 다르다. 오르막길을 달릴 때도 몸이 훨씬 덜 힘들다. 이렇게 오르막길이 짧았었나, 겨우 이 정도 되는 거리로 첫날 그렇게 낑낑댔었단 말인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무엇보다 내 신체 능력에 자신감이 붙고 있다. 일리히의 책 제목처럼 행복이 자전거를 타고 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건강이 온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건강은 행복의 초기 조건이니, 책 제목이 맞다고 할 수도 있겠다.
탁구도 쉽지 않은 운동이다
탁구를 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우리 학교에는 체육 시간이 있다. 필수 과목이라서 이수하지 않으면 학년을 통째로 낙제한다. 심지어 학기 중에 한 번은 레포트도 써내야 한다. 우리들 모두 이 과목을 혐오한다. 의학 공부도 바빠 죽겠는데, 이런 레포트까지 쓰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나. 그런데 이 과제를 피할 수 있는 길이 딱 하나 있다. 스포츠 동아리에 가입하는 것이다. 그러면 체육을 따로 듣지 않아도 되고, 덩달아 레포트도 취소된다.
문제는 내가 할 줄 아는 스포츠가 없다는 것이다. 축구도, 농구도, 핸드볼도, 어디에도 내 몸은 맞지 않았다. 담당 교수들도 길기만 하고 잘 꺾일 것 같은 내 체형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이런 운동 불능자들을 위해 마련된 훌륭한 동아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탁구였다.
처음에는 탁구 교수도 나를 받아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신청 기간을 훨씬 넘겨서 찾아온 데다가, 딱 봐도 탁구에 대한 열정보다는 레포트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보였다. 그러나 내게는 뎅게라는 훌륭한 핑계거리가 있었다. 뎅게에 걸려서 학교에 몇 주 나오지 못했다고, 그래서 신청이 늦었다고 둘러댔다. (역시 쿠바에서 느는 건 뻔뻔함뿐이다.) 결국 교수는 내게 조건부 승인을 내주었다. 마리아라는 베네수엘라 친구가 동아리에 있는데, 그녀를 이겨야만 받아주겠다는 것이다.
알겠다고 호기롭게 대답했지만 속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탁구를 마지막으로 친 게 언제였더라? 탁구라면 중학교 2학년 때 체육 수업에서 배운 게 전부다.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구실에서 탁구 대회를 할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건데, 후회도 되었다. 운동은 늘 남의 일처럼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패배가 확정된 결투에 나가는 검사의 마음으로 탁구채를 잡았다.
시끄럽게 앵앵거리는 목소리가 특징인 마리아는 경기를 시작한다며 강력하게 서브를 넣었다. 빠르고 낮고 공격적인 서브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반전이 일어났다. 마리아는 탁구를 아주 못 쳤다! 오로지 서브만 강하게 넣을 줄 알았지, 서브만 받아쳐내면 그 다음에 돌아오는 공은 아주 느리고 부드러웠다. 그때 내가 공격하면 게임은 늘 끝났다. 내가 점점 감을 잡을수록 내 점수는 올라갔고, 경기를 지켜보는 교수의 얼굴은 점점 구겨졌다. 두 달을 훈련시켜도 이제 막 들어온 신인 동아리 멤버보다 탁구를 더 못 치다니…… 갈 길이 멀구나, 마리아야……
마리아 덕분에 나는 무사히 동아리에 가입했고, 레포트를 피했고, 엉겁결에 쿠바에서도 연구실 공식 스포츠 탁구를 치게 되었다.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실력도 조금씩 늘고 있고, 재미는 그보다 더 많이 붙이고 있다. 해보니 탁구도 쉬운 운동이 아니다. 땀도 꽤 나고, 집중력도 올라간다. 이때만큼은 혈압 계산법도, 심장 기능 조절 메커니즘도, 호흡 질환의 원인도 모두 잊어버릴 수 있다. 단지 통통 튀는 저 하얀 공만 쫓아가게 된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머리를 비울 수 있으니 참 살 맛이 난다. 이렇게 탁구와 자전거라는 내 일상의 작은 일탈이 나를 살게 하고 있다. 의사 되려다가 환자 된다는 말은 농담일 때나 웃기지, 진담이 되면 이것만큼 슬픈 일도 없다. 진정한 건강은 삶을 바꾸는 데에서 시작된다는 양생의 철학을 잊지 말아야 겠다.
글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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