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담헌 홍대용 ④ : 이역만리에서 만난 우정


우정의 달인,

하늘 끝에서 지기를 만나다


 


1. 이역만리 벗을 찾아 


담헌 홍대용은 친구 사귀기의 달인이다. 박지원, 정철조, 나경적 등 조선에 여러 사우(師友)들이 있었지만, 담헌의 친구 사귀기는 중국에서 빛을 발했다. 이역만리 하늘 끝[天涯]에서 지기(知己)를 만든 행위만으로도 담헌은 당당히 18세기 지성사에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연기』를 보면 그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아주 많다. 그는 어떤 사람과도 이야기를 시도했다. 종친 유군왕의 작은 아들이자 강희제의 증손인 서른 한 살의 양혼, 한 학당의 훈장인 주학구와 그 학생들, 자신의 차부였던 17살의 왕문거, 통역관 서종현·서종맹·박보수·오림포·쌍림, 자명종 수리점 주인 및 여러 점포 주인들 등등. 심지어 서종맹이나 박보수와 같은 엄격하고 사나운 사람조차 내 편으로 만드는데 뛰어난 기술이 있었다. 담헌은 상대방을 대화로 끌어들이는 기술을 타고난 듯하다. 술도 좋아하지 않고, 시를 읊지도 않고, 먹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담헌의 깍듯함과 편견 없는 질문에 무장 해제되었다. 


담헌은 사나운 사람조차 내 편으로 만드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 우정의 달인^^



담헌은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았다. 양혼 같은 경우는 담헌이 먼저 교제를 청했다. 양혼은 왕족임에도 대학·중용·논어·맹자 사서와 시경만 겨우 읽었다. 말타기와 활쏘기 그리고 중국말과 몽고말을 익히느라 독서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양혼은 담헌처럼 학식과 문장이 뛰어난 자가 교제를 청해오자 오히려 걱정되어 물었다. “독서도 많이 하고 문장도 잘하는 분이, 나처럼 질박한 사람과 교제할 것이 못되지 않느냐?” 이에 담헌은 “사람의 도리는 마음에 있고 글에 있지 않으며, 교제하는 도리는 바탕에 있지 문채(文彩)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담헌은 양혼과의 교제를 주선한 진가(陳哥)라는 상인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진가는 59살의 장사꾼으로 서학을 독실히 신앙했다. 담헌은 서학을 믿는 사람을 대할 때조차 어떤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곡진하게 서학을 믿는 이유를 물었다. 진가는 이렇게 답했다. “예배를 하고 성경을 읽어서 후생의 복을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인의 종교는, 사람에게 악한 생각을 싹트지 못하게 하는데, 말과 마음이 서로 맞는 것이 가장 복을 구하는 요점이 됩니다.” 담헌은 서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신도 유학을 숭상하는데, 공부자의 가르침도 서학의 가르침과 궁극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참으로 마음에 악한 생각을 끊어서 말에 망발이 없다면 어디를 간들 복되지 않겠습니까?”라고.(「양혼」, 『연기』, 『담헌서』 외집7권) 담헌은 이렇듯 어떤 이와도 대화가 가능했다. 선입견 없이 사람에게 다가가 그 사람을 알려고 노력했다.  


연경을 떠날 때부터 담헌이 크게 원한 바는 “마음이 맞는, 한 명의 아름다운 선비와 만나 실컷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담헌은 청나라의 곳곳에서 사우를 만나고자 적극적으로 청나라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의 집을 방문했다. 그러나 길가에 사는 자는 조그만 장사꾼들이었고, 북경은 문풍이 떨치지 않아 선비를 만나더라도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혹 한림학사를 만났으나 문학이 심히 졸렬하고 중화와 이족을 구별하여 의심하고 두려워하기만 할 뿐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담헌은 실망했지만 지기를 만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연기』에는 어떤 사람이든 담헌과 소탈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기록될 수 있었다. 담헌은 만난 사람이 그 누구이든, 어떤 대화가 오가든 그 사실을 기록하여 전했다.    




2. 천고의 기이한 만남 


담헌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두드리면 열린다 했던가. 그야말로 운명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이기성이 지인의 안경을 구입하기 위해 유리창에 갔다가 항주(절강성)의 선비 철교 엄성과 추루 반정균과 조우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과거를 보러 북경에 올라온 참이었다. 둘 다 안경을 끼고 있었기에 이기성은 쓰고 있는 안경이라도 팔라며 이들을 조른 것이다. 참 웃기는 에피소드이다. 지금이라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이방인으로 진품의 안경을 구매하기가 힘드니, 급한 김에 끼고 있던 안경이라도 사겠다며 들이대는 조선 선비가 얼마나 우스운가? 그런데 이들은 뜻밖에도 일면식도 없는 이기성을 위해 안경을 벗어 주고, 돈도 받지 않았다. 안경을 구하는 사람이 자신들처럼 눈에 병이 든 사람일 텐데, 어찌 돈을 받을 수 있냐며 그냥 벗어준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담헌은 우아하고 사랑스런 선비들이라 여겨, 교제하기를 청했다. 한 묶음의 전지, 부채, 묵, 청심환을 선물하며 교제를 구했더니, 이들은 공손히 예의를 갖춰 받으면서 답례로 깃털 부채, 필묵, 다기 등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담헌과 항주 선비들의 기이한 우정이 시작된다. 담헌은 이들과 만나면서 한 사람의 지기를 더 얻었으니, 소음 육비였다. 담헌은 36살, 엄성은 35살, 반정균은 25살, 소음 육비는 48살이었다. 엄성은 이때 담헌과 몇몇 조선사신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지금까지 전해진다.   

 


엄성이 그린 담헌의 초상화.



담헌은 북경에 있는 한 달 동안 철교와 추루와는 7번, 소음과는 2차례 회합했다. 담헌이 이들과 만날 때 사행을 함께 했던 평중 김재행과 늘 동행했다. 평중은 이 때 나이 49세였다. 담헌과 평중은 벼슬에 뜻이 없는 선비였고, 항주의 세 선비는 모두 과거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모두  백수 선비로 이들은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했다. 김재행은 술을 잘 마시고, 시를 잘 읊어 이 모임에 흥을 돋우었다. 반면 홍대용은 술을 즐겨 마시지 않았고, 시를 읊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담헌 특유의 친화력과 호기심으로 중국인 선비들과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했다. 한 번 만나면 날이 다 가야 파했다. 그리고 필담으로 대화를 했기 때문에 담화할 때는 종이와 붓을 가지고 빨리빨리 써나가, 피차에 거의 손을 멈추는 일이 없었다. 서로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이 너무나 많아 소통하기에 급급했으므로, 이들의 필담은 난잡하고 차서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하루에 나눈 말이 만 마디가 넘을 정도였다니, 이들의 모임이 얼마나 활기차고 즐거웠는지 짐작이 간다. 


중국과 조선의 풍속부터 육상산, 양명학, 불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영역을 필담으로 서로 질문하고 배웠다. 이역에서 실현한 사우의 도! 담헌은 이들과의 사귐으로 교조적 주자주의를 벗어버렸다. 진짜로 주자를 숭상하려면 주자 해석의 잘못된 부분을 고칠 수 있어야 한다. 담헌은 유연하게 대처했다. 습성이 다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주자 숭봉은 실로 중국 사람들이 따라올 수가 없다. 그러나 다만 존숭하여 받드는 것이 귀한 줄만 알고 그 경의(經義)의 의심되고 논란되는 점에 대해서는 그저 부화뇌동하여 한결같이 엄호하기만 하고 사람의 입을 막으려고만 하니. 이는 향원의 마음으로 주자를 바라보는 것이다. 내 일찍이 병통으로 여겼더니 절강사람들의 논하는 말을 들어본즉 그들이 지나친 부분도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루한 습성을 깨끗이 씻어버렸으므로 실로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바가 있었다.

-「건정록후어」, 『항전척독』, 『담헌서』 외집3권


담헌이 맺은 천애의 우정은 북경 안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 담헌은 항주 친구들과 나누었던 필담을 묶어 『건정동필담』을 펴내었다. 그리고 사신단이 파견될 때마다 인편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편지를 모은 것이 『항전척독』이다. 연행의 길 위에서 만난 여러 선비들과 우정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담헌은 우물안 개구리의 시야를 넓히려고 노력했다. 기실 항주에서 막 북경에 도착했던 철교와 추루도 북경은 한양만큼 낯선 도시였던 것이다. 낯선 도시에서 맞닥뜨린 이들에게 만주족 한족 조선족이라는 경계는 없었다. 담헌은 북경의 건정동에서 진정 인종, 지역, 학벌, 지위의 모든 것, 즉 세력과 이해를 뛰어넘는 평등한 관계를 맺었다. 오히려 그런 경계를 허물고 조건 없이 마주했기에 이들의 우정은 평생토록 지속되었다. 


오직 얼굴빛·몸가짐 따위의 형식을 없애고 천진난만하게 터놓고 이야기하여, 마치 맑은 물이나 밝은 거울이 들여다보면 비치 듯하고 종이나 북이 두드리면 울리 듯하는 사람이 바로 내가 말하는 선비입니다. 대개 이러한 뒤에라야, 재주 학문 꾀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지금 이와 같은 좋은 사우를 만났으면서도 오래도록 시중을 들며 끝까지 도움을 받지 못하고, 우연히 만났다가 홀연히 헤어지며 금방 기뻤다가 금방 한스럽게 되어 마침 조물자의 장난감 밖에 되지 않았으니, 아아, 또한 슬픈 일이 아닙니까?

-「소음 육비에게 준 편지」, 『항전척독』, 『담헌서』 외집1권


“만났던 상황이 우리와 같이 기이한 것은 들어보지 못했고, 작별하고 고독하게 지내는 우울도 우리와 같이 괴로운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쌓이고 맺힌 서글픈 심정이 갈수록 더욱 간절해짐을 어찌 금할 수 있겠습니까?”

-「철교 엄성에게 준 편지」, 『항전척독』, 『담헌서』 외집1권


“대개 벗이라는 것은 서로 선으로 책하고 인으로 보완하는 것이라 합니다. 대개 선과 인이라는 것은 사람의 사람된 소이로써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그 선과 인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또한 선을 책하여 주는 사람이 없이는 학문을 힘쓰게 될 수 없고, 인을 보도하여 주는 사람이 없이는 덕성을 진취할 수 없는 것이니, 이 점이, 벗이 소중한 까닭이며 군신이나 부자와 함께 오륜 속에 드는 까닭입니다. 지금 세상의 이른바 벗이라는 것은, 어깨를 치고 소매를 잡아 서로 어울리나 외모만 같이 하고 마음은 달리하며, 예절을 찾으면 소원하다 하고 어려운 일을 책임지우면 오활하다 하며, 환심 사는 것만 서로 좋게 여기고, 세력과 이해로써 서로 부르고, 서로 얼리며, 향원이 되어가면서도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으니, 이런 것도 벗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러고도 군신·부자의 오륜 속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 「소음 육비에게 준 편지」, 『항전척독』, 『담헌서』 외집1권


이들은 계산도 없었고 서로 꺼리거나 숨기는 것도 없었다. 이들의 만남은 천진난만함 그 자체였다. 그랬기에 이역만리 머나먼 곳에서 편지로만 소식을 전하면서도 우정은 더욱 깊어만 갔다. 이들은 서로를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냥 소식을 주고받기만 한 게 아니었다. 선으로 인도하고, 인으로 보완해 주는 사이. 그야말로 사우로써 최선을 다했다. 담헌은 과거에 낙제한 엄성에게 오히려 축하 인사를 보내며 명성과 지위에 연연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고 담담하게 살라고 권한다. 엄성은 담헌의 진심에 감응했다.    


담헌은 특히 엄성과 형제처럼 각별하고 애틋했다. 그러나 엄성은 담헌과 만난 그 해에 복건성으로 돌아갔다가 학질에 걸려 죽는 참변을 당한다. 35살에 단명한 엄성. 담헌은 엄성이 죽기 하루 전날 청나라로 편지를 부쳤고, 엄성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나중에 엄성의 부고를 듣고 제문을 보냈는데, 이 제문이 엄성의 2주기 제사 때 도착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려진 바, 엄성은 담헌이 보내준 묵과 향을 가슴에 품고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신과 함께 묵을 관에 넣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일컬어 천고의 기이한 만남이라 할 터. 몇 번의 만남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만났느냐가 우정의 강도를 결정하는가보다. 


『담헌서찰첩』의 일부.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 그들도 우리처럼, 우리도 그들처럼


청나라 선비들과의 교류는 담헌이 조선에 돌아왔을 때 문제가 된다. 비방이 난무했다. 그 당시의 재상 김종수의 동생이자 담헌의 친우 김종후는 편지를 써서 담헌을 심하게 나무랐다. 김종후는 철저히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논리를 견지했다. 김종후는 이렇게 주장했다. 항주선비들이 비록 한족 선비지만 변발을 한데다 만주족 치하에서 벼슬을 하려하니 변절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김종후에게 변절한 한족 선비는 누린내 나는 만주족 오랑캐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오랑캐 이적은 사람이 아니었다. 조선의 지식인들 대부분이 김종후처럼 생각했다. 그러니 더더욱 담헌은 김종후의 의견에 동조할 수 없었다. 김종후와 몇 차례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격렬하게 논박했다. 담헌은 김종후의 그 꽉 막힌 사고방식에 절대로 굴하지 않았다.    


“우리 동방이 오랑캐가 된 것은 지계(地界)가 그러하기 때문인데, 또한 무슨 거리낄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랑캐 땅에 태어나서 오랑캐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진실로 성인이 될 수도 있고, 대현이 될 수도 있으니 참으로 큰일은 우리에게 달린 것인데, 우리가 만족하지 않게 생각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중국을 본받아서 오랑캐 소리를 면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비록 그러나 중국과 비교하면 그 등분이 스스로 있는 것이오. 그런데 오직 용렬하고 조그마한 재주에 국한된 자로서는 이런 말을 갑자기 들으면 대개 노여워하고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마음에 달게 여기려 하지 않는 이가 많소. 이것은 우리나라 풍속이 편협한 때문이오. 그러나 고명한 집사로서 이런 의견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 ‘오초와 만융…’이란 것은 중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땅히 그를 천하게 여길 것이오. 그러나 오나라의 계찰과 초나라의 굴원 같은 이는 비록 중국의 성현일지라도 어찌 일찍이 친구로 삼고 높이지 않을 수 있겠소.”

-우답직재서내집 3권


오랑캐가 된 것은 지계 때문이지 사람이 원래 오랑캐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랑캐 땅에서 살아도 성인이나 대현이 될 수 있는 법. 이 속에 숨은 뜻은 우리나라 사람이 오랑캐가 아니듯, 청나라의 사람들도 오랑캐가 아니라는 것이다. 담헌의 말은 완곡한데, 숨은 뜻은 매우 강렬하고 날카롭다. 오랑캐 땅은 있지만, 오랑캐는 없다는 인식의 전복. 경계를 나누다 보니, 나를 기준으로 내 밖의 땅은 오랑캐 땅으로 경계 삼을 뿐이다. 그러니 진정 오랑캐가 있는가? 오랑캐를 나눈 것은 그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고 때문이지, 자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랑캐는 없는 것이다. 중화와 오랑캐라는 척도를 해체해버리는 논법. 그러므로 오랑캐처럼 살면 오랑캐지만, 오랑캐 나라로 일컬어지더라도 성인처럼 살면 오랑캐일 수 없다. 담헌에게는 만주족도 한족도 사람됨에 따라 다른 것이지, 종족에 따라 사람이냐 아니냐를 따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담헌에게 만주족의 청나라는 별로 문제시될 게 없었다. 청나라의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고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담헌에게는 재상인 김종후가 여전히 오랑캐와 문명의 이분법에 빠져 있으니 이것이 놀라울 뿐이다. 온 나라가 이렇게 고루하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담헌은 이 답답함을 깨려고 무진 애를 썼다. 



김윤병의 <호병도>로 18세기에 그려졌다. 청나라 사람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있다.


 

이렇듯 오랑캐가 아닌 중국을 다스리는 청나라의 현재를 제대로 보게 한 공로가 담헌에게 있었다. 담헌은 청나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거기엔 어떤 선입견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무엇을 사유하는지를 살폈다. 그리하여 담헌은 북벌이 아니라 북학을 외칠 수 있는 계기를 열어주었다. 이후 박제가와 박지원의 북학 논의는 홍대용으로 인해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박제가는 중국에 다녀온 홍대용을 이렇게 묘사했다. 천애의 지기들이 담헌을 이렇게 바꾸었다. 


드넓은 중원을 갔다 오고선

마음은 세속과 소원했다오.

원하는 바, 지기(知己) 만나 죽는 것일 뿐

모든 사람 기림은 받지 않으리.

「홍대용의 모정에서 원운에 차운하다」 첫째수 중에서, 『정유각집』상


여주와 항주 선비를 한 번 만나곤

언제나 수리의 책을 본다네.

멀리 놀아 세속의 좁음을 잊어버리고

벗 사귐에 성근 교제 드물었다오.

「홍대용의 모정에서 원운에 차운하다」 둘째수 중에서, 『정유각집』상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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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담다디 2015.01.29 08:56 답글 | 수정/삭제 | ADDR

    “마음이 맞는, 한 명의 아름다운 선비와 만나 실컷 이야기하는” 이 문구가 마음을 잡아끄네요. 유학자들에게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전공필수였던 게 아닐까요. 우정의 달인, 홍대용을 배워야겠어요.

    • 북드라망 2015.01.29 10:25 신고 수정/삭제

      지금 우리에게도 마음이 맞는 지기를 가지는 것은 전공필수와 같지요. 담다디님도 꼭 마음 맞는 지기를 만나실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