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의 『의산문답』:
다른 우주, 다른 세상
우주의 이치로 세상의 이치를 꿰뚫다
1. 중국 여행 그 후, 『의산문답』
담헌 홍대용에게 중국 여행의 후폭풍은 상당히 거셌다. 항주 선비들과의 필담을 묶어 편찬하고, 여행기를 쓰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중국 여행은 담헌의 사유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박제가에 의하면 청나라에서 돌아와 담헌은 수리와 기하 연구에 완전히 몰입했다고 하는데, 『주해수용』이라는 수리학 책의 편찬은 그 결과물이었다. 담헌은 또 실용적 지식을 정리하는 일에 머물지 않았다. 중국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인하여 천문과학의 이치를 궁구하는 동시에 이것으로 세상의 이치까지 꿰뚫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 결산물이 『의산문답』이다. 『의산문답』은 중국과 조선의 경계에 놓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한다. 이 경계지대에서 마주친 허자와 ‘실옹’의 대화를 문답체로 구성한 ‘과학-철학’ 책이다.
『의산문답』, 실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홍대용을 18세기의 사상가로서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과학을 과학기술의 테두리 안에 가두거나, 중국(청나라) 여행을 기이한 체험으로 치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헌에게 과학지식은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았고, 경험은 경험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새로운 지식과 경험은 삶의 이치로 전화되었다. 담헌에게 지식과 경험은 자신의 세상과 삶을 들여다보는 촉매제였다. 여기서 얻은 안목과 지혜는 중세 사회의 허위를 꿰뚫어 당대 사회의 통념을 깨고 습속을 전복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인생의 궁핍과 현달은 스스로 정해진 운명이 있으니, 겸선(兼善)이든 독선(獨善)이든 곳에 따라 분수를 다할 뿐이다. 우리 유학자들의 실학은 본래 이와 같다. 문하에 생도들을 가르치면서 자기와 다른 것을 배척하여 암암리에 승심(勝心)을 만족시키고, 오직 나만 존재한다고 오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니, 근세 도학의 법도는 실로 혐오스럽다. 오직 그 실심(實心)과 실사(實事)로써 나날이 실지(實地)를 밟아 먼저 이 진실한 본령을 갖추어야 한다.
- 『담헌서』『외집1권』「낭재 주문조에게 답하는 글(答朱朗劑文藻書)」
일상 생활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간절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여 일에 따라서 몸소 실천한다면 '성리'라는 것도 별다른 것이 아니라 곧 '일용'에 흩어져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지식과 실천이 아울러 진보되면 한 근원이며 큰 근본인 성과 천도를 활연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처음 배우는 사람이 자리에 앉아 성명이나 이야기하는 것은 유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해로운 것입니다.
-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 김도환, 책세상. 182쪽
담헌은 성리학의 관념 추수주의를 배격한다. 현실은 무시한 채 형이상의 성(性)이니 도(道)니 명(命)이니 리(理)를 탐구하는 것은 나라에도 도움이 안 될뿐더러, 우리의 삶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근원에 대한 연구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근원만 쫓아 삶의 문제는 망각해버린 작금의 사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현실의 지평은 사라지고 관념만 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허학이다.
담헌은 성리학의 도나 천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흩어져 있는 삶의 이치이자 원리이지, 하늘 저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이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 삶을 어떻게 가꿀 것인가의 이치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 유용한 것들을 궁구해야만 한다. 현달한 벼슬아치로 살든, 물러나 궁핍한 선비로 살든, 공부하는 사람이 할 일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도, 실용적인 지식을 탐구하는 일도 모두 이 땅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2. 허자와 실옹의 문답(問答) 그리고 깨우침
『의산문답』은 『논어』ㆍ『맹자』ㆍ『장자』와 같은 한문산문의 문답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 그대로 의무려산에서 묻고 답한 이야기이다. 이런 문답체 산문의 전통 중에서도 『의산문답』은 『장자』의 글쓰기와 매우 흡사하다.『장자』에는 우언으로서 허구적인 인물의 문답체가 많이 등장한다. 『의산문답』은 『장자』의 가공 인물에 의한 문답체 글쓰기를 모방하면서 고도의 허구적인 서사 전략을 구사한다.
담헌은 철학적 근원을 형이상의 관념 안에 가둬두려는 흐름에 반대했다. 형이상의 관념이나 지식이나 경험은 다 똑같다. 지식만 추수하거나, 경험 그 자체에만 매몰되면, 이 또한 관념에 불과하다. 이 모든 이치가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로 연동되지 않으면 이야말로 헛된 학문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이치가 진짜 일이 되고, 진짜 마음이 되고, 진짜 현실로 드러나는 ‘실학’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힘썼다. 그것을 실천한 책이 『의산문답』이다.
『의산문답』은 허자와 실옹이라는 허구적인 인물들을 내세워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살기를 권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새로운 지식 즉 실학으로 무장한 실옹이 헛된 학문에 빠져 방황하는 허자를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마치 『장자』 속의 허구적 인물들이 묻고 답하면서 삶의 진실을 찾아가는 우언과 같다. 설명문이나 논설문의 형식이 아니라 우언의 대화체 형식으로 이루어져, 인간이 지닌 어리석음과 독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사유의 전환과 삶의 전회가 왜 필요한지를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한다. 『의산문답』은 과학서여서 특별하기도 하지만, 이 책이 궁극에 도달하려는 것은 깨우침이다. 우주와 삶이 연동되어 있다는 깨우침, 그래서 이 원리를 알았다면 삶에 관한 인식도 바꿔야 한다는 깨달음!
『의산문답』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글의 주인공 허자는 조선에서 성리학 공부에 매진하다 알아주는 이가 없자, 또 다른 자신을 찾기 위해 중국 땅을 헤맨다. 그러나 여기서도 알아주는 이는 없다. 실의에 젖어 조선과 중국의 경계지대인 의무려산에 올랐다가, 우연히 실거지문(實居之門)이라 써있는 석문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기이한 인물 ‘실옹’을 대면하게 된다. 실옹은 첫 대면에서부터 허자의 ‘허위의식’을 꾸짖는다. 실옹이 꾸짖는 건, 허자로 대변되는 조선의 선비들이다. 실옹은 거추장스럽고 지엽적인 예법에 매달리며 궁극적 의미는 버린 채, 자랑하기 위해 남을 이기기 위해 정학[유학]에 매달리고, 권력과 명성과 이익을 차지하려고 인(仁)과 보신(保身)을 떠들어대는 성리학자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허자는 실옹의 비판을 듣고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허자는 30년 동안의 공부가 실은 옛사람의 찌꺼기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자신의 고루한 편견과 습속을 깨기 위해 실옹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허자와 실옹의 이 마주침에 의해 드디어 그 유명한 실옹의 철학적, 과학적, 정치적인 논변은 시작된다. 실옹은 허자의 질문에 대해 “인물균론(人物均論)·우주무한설·지전설(地轉說)·화이론(華夷論)”의 주제를 차례대로 설명한다. 사실 이 논변들은 각기 독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주제로 연결된다. 이 주제들은 만물을 구성하는 이치들이다. 우주의 이치, 인간과 사물의 이치, 땅의 이치, 정치의 이치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 이치들을 궁구하다보면 결국에는 우리의 삶이 보인다. 궁극에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가 과제로 남는다. 『의산문답』은 격물치지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 앎은 삶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
3. 인간과 만물은 똑같다[人物均論]
실옹은 만물의 이치 중에서도 가장 먼저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는 관점이 달라진다. 그래서 실옹은 그 본원이 되는 인간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 다음 하늘과 땅, 성계(星界)와 지계(地界), 서양과 중국, 화(華)와 이(夷) 등 중세적 구획을 가로지르는 천지자연과 역사와 문명의 대도를 설명한다.
심성론을 보여주는 다음의 구절을 보자.
“너는 진실로 사람이로군. 오륜(五倫)과 오사(五事)는 사람의 예의(禮義)이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서로 불러 먹이는 것은 금수의 예의이며, 떨기로 나서 무성한 것은 초목의 예의이다. 사람으로써 물(物)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물이 천하지만 물로써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하늘이 보면 사람이나 물이 똑같다.”
"떼를 지어 다니면서 서로 불러 먹이는 것은 금수의 예의이며, 떨기로 나서 무성한 것은 초목의 예의이다."
이 구절은 사람은 물론 동식물에도 오상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고 보는 낙론의 ‘인성과 물성은 똑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를 변주하여 인물균론(人物均論)을 펼치고 있는 부분이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은 18세기 노론학파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철학적, 정치적 논쟁이었다. 노론학파 중 한원진(韓元震)을 비롯한 호서 학자들은 인의예지신의 오상이 인간을 제외한 사물에는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였고, 김원행과 같은 근기지역 학자들은 인간과 사물에는 똑같이 오상이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담헌은 김원행의 제자로서 인성과 물성이 똑같다는(人物性均) 주장을 펼쳤다. 이 심성론에 관한 해석은 자신의 철학적,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과 다름없다.
위의 구절에 바로 뒤이어 “사람으로서 물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물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다.”는 철학적 명제를 던진다. 이 명제는 『장자』의 「제물론」에 의거한 말이다. 인물균론의 논리가 『장자』에서 왔다고, 『의산문답』의 파격성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장자』의 사유와 표현으로 조선후기 사회의 편벽을 뛰어넘고, 중세 지식의 고루함을 파격적으로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명제는 옳고 그름을 따지라고 던져준 말이 아니라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는 말이다. 그에 따라 바로 앞선 문장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오륜과 오상은 인간의 예의이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서로 불러 먹이는 것은 동물의 예의이고, 떨기로 나서 무성한 것은 초목의 예의임”을 인정하려면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초목의 떨기성과 동물의 군집성이 진정 인간의 오륜만 못한 것인가? 재차 묻는다.
편협하게 쌓아온 인간 중심의 지식과 인간 중심의 마음으로 자연을 보게 되면 자연은 나(인간)만 못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나를 비우고 자연을 보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인정하게 되어 그 자연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홍대용이 진정 의도했던 철학적 성찰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중심을 상정하면 사람과 사물은 차별화되지만, 사람과 사물의 ‘사이’ 즉 하늘에 서서 보면 사람과 사물은 똑같다. 각각의 본성은 다만 다른 양태로 표현될 뿐이다.
홍대용에게 있어 철학적 성찰은 사심 없이 대상을 관찰하는 태도에서부터 나온다. ‘물’의 본성이 인간보다 결코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그는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한다.
“너의 미혹이 너무도 심하구나. 물고기를 놀라게 하지 않음은 백성을 위한 용의 은택이며, 참새를 겁나게 하지 않음은 봉황의 세상 다스림이다. 다섯 가지 채색 구름은 용의 의장이요, 온몸에 두루한 문채는 봉황의 복식이며, 바람과 우레가 떨치는 것은 용의 병형(兵刑)이고, 높은 언덕에서 화한 울음을 우는 것은 봉황의 예악(禮樂)이다. 시초와 울금초는 종묘제사[廟社]에서 귀하게 쓰이며, 소나무와 잣나무는 동량(棟樑)의 귀중한 재목이다.
이러므로 옛사람이 백성에게 혜택을 입히고 세상을 다스림에는 물(物)에 도움받지 않음이 없었다. 대체로 군신(君臣)간의 의리는 벌[蜂]에게서, 병진(兵陣)의 법은 개미[에게서, 예절(禮節)의 제도는 박쥐[拱鼠]에게서, 그물 치는 법은 거미[蜘跦]에게서 각각 취해 온 것이다. 까닭에 ‘성인(聖人)은 만물(萬物)을 스승으로 삼는다.’ 하였다. 그런데 너는 어찌해서 하늘의 입장에서 물을 보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입장에서 물을 보느냐 ?”
자연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면서, 자연에 오히려 인생의 비의(秘意)가 숨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물고기의 자유로운 노닒, 참새의 편안한 움직임으로부터 벌, 개미, 박쥐, 거미의 생태는 인간들의 제도와 윤리를 반성적으로 보게 한다. 나와 다른 대상을 차별적으로 보는 시선을 벗어나서 자연을 세심하게 관찰하면 자연은 법 삼을 수 있는 존재이다. 자연의 진면목을 보려면 자신을 비우고 관찰하라.
"자연의 진면목을 보려면 자신을 비우고 관찰하라"
담헌의 인물균론은 장자가 말한 바 만물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없다는 논리와 비슷하다. 그런데 담헌은 장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만물 사이의 위계를 해체한다. 성리학이 논리를 깨지 않으면서 인간과 만물 사이의 경계를 깨뜨리는 아주 오묘한 논법이다. 그야말로 성리학의 논법으로 성리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방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담헌은 인간에게도 의리의 법칙이 있는 것처럼 만물에게도 의리의 법칙이 있다고 함으로써 인간과 만물 사이의 위계를 없앤다. 이에 따라 성리학의 이기설을 만물의 이기설로 확장시킨다. 담헌의 논리가 성리학의 자장 안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넘어서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담헌은 인성에만 부여했던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법칙’로서의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이라는 천리의 한 측면을 물성에도 부여한다는 점이다. 인간에게만 부여했던 의리적인 해석을 만물에게도 적용시켜 버린 것이다. 인간이 윤리를 타고났다면, 만물도 살아가는 윤리를 타고난다. 그런 점에서 인간과 만물은 똑같다.
장자는 인간이나 만물이나 어떤 윤리를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후 인간이 윤리를 만들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윤리도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 오직 삶의 원리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담헌은 이 삶의 자연스런 원리를 각 만물의 윤리로 바꾸어, 인간과 만물이 일체임을 역설한다. 유가의 도덕윤리를 깨뜨리지는 않으면서, 모두 나름의 도덕윤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도덕윤리가 상대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놓는다. 담헌이 성리학에 정면도전을 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성리학의 경계는 은근슬쩍 허물어진다. 이래서 담헌의 논리는 교묘하다.
천지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다만 기일 뿐이고 리는 그 속에 있다. 기의 근본을 논하자면 한결같이 고르고 비어있는 듯하여 청탁을 구분하여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오르내리고 휘날리며 서로 부딪히고 일렁임에 이르러 찌꺼기가 생겨서 고르지 않게 되었다. 이에 맑은 기를 얻어서 만들어진 것은 사람이 되고, 탁한 기를 얻어서 만들어진 것은 물이 되었다. 그 가운데 지극히 맑고 순수해서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심이 되었으니 뭇 이치를 묘하게 갖추어 만물을 다스리는 까닭이다. 이것은 사람과 물이 마찬가지이다.
- 『담헌서』,『내집1권』,「서 성지에게 답하여 심설을 논함(答徐成之論心說)」
대저 같은 것은 이이고 같지 않은 것은 기이다. 보석은 지극히 보배롭고 썩은 흙은 지극히 천한데, 이것이 기이다. 보석이 보배로운 소이와 썩은 흙이 천한 소이는 인의인데, 이것이 리이다. 그러므로 보석의 리가 곧 썩은 흙의 리이고 썩은 흙의 리가 곧 보석의 리이다.
- 『담헌서』,『내집1권』,「심성문(心性問)」
썩은 흙은 썩은 채로 있어야 한다. 그래야 흙의 흙됨이다. 흙의 흙됨을 만들어주는 것이 흙의 인의다. 결국 모든 만물에는 인의가 있다. 인간에게만 인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면 인의는 윤리가 아니라 자연의 저절로 그러한 이치다. 이렇게 성리학의 이기론을 이기론같지 않게 만들어버린다. 실상은 이기론의 해체다. 그러나 의리론을 해체하지 않고 확장하고 낮춤으로써 모든 만물이 똑같음을 설파한다.
이 한 장의 그림으로 조선시대 신분질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은 김득신의 <노상알현도>
이 결과 인물균론은 사회적 신분 구획을 무너뜨리는 데까지 이른다. 사농공상은 있다. 그러나 능력에 따라 사농공상의 위치는 바뀔 수 있다. 신분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구별한다. 서민으로 태어나도 능력이 있으면 관직에 오를 수 있다. 윤리적 법칙이 금수초목에도 있는 것처럼, 능력은 평민이나 천민에게도 다 있다. 그 능력에 맞게 적합한 일자리를 주면 된다. 담헌의 인물균론은 사회적 신분의 균론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본디부터 명분을 중히 여겼다. 양반들은 아무리 심한 곤란과 굶주림을 받더라도 팔짱 끼고 편하게 앉아 농사를 짓지 않는다. 간혹 실업에 힘써서 몸소 천한 일을 달갑게 여기는 자가 있다면 모두를 나무라고 비웃기를 노예처럼 무시한다. 자연 노는 백성은 많아지고 생산하는 자는 줄어드니, 재물이 어찌 궁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백성이 어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엄하게 벌칙을 세워서 그 가운데 사농고상에 관계없이 놀고 먹는 자에 대해서는 관에서 일정한 형벌을 주어 세상이 용납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재능과 학식이 있다면 비록 농부나 장사치의 자식이 의정부에 들어가 앉더라도 참람스러울 것이 없고, 재능과 학식이 없다면 비록 공경의 자식이 하인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한탄할 것이 없다. 위와 아래가 힘을 다하여 함께 그 직분을 닦는 데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상고하여 분명하게 상벌을 베풀어야 한다.
- 『담헌서』, 『내집 3권』, 「어떤 사람에게 주는 편지 두 편(與人書 二首)」
대개 인품에는 고하가 있고 재주에는 장단점이 있다. 그 고하에 따라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살리면 천하에 아주 못 쓸 재주란 없을 것이다. 면(面) 학교 교육에서, 그 가운데 뜻이 높고 재주가 많은 자는 위로 올려 조정에서 쓰도록 하고, 자질이 둔하고 용렬한 자는 아래로 돌려 야(野)에서 쓰도록 하며, 그 가운데 교묘한 생각을 잘 내고 민첩한 솜씨를 가진 자는 공업으로 돌리고, 이(利)를 내기에 발고 재화를 불리기 좋아하는 자는 상업으로 돌리며, 그 가운데 좋은 모책을 묻고 용맹이 있는 자는 무반으로 돌리도록 한다. 그리고 소경은 점치는 일을 하게 하고, 궁형(宮刑)을 당한자는 궁문지기 일을 맡게 하며, 벙어리와 귀머거리와 앉은뱅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합한 일거리를 갖도록 해야 한다.
- 『담헌서』, 『내집4권』, 「임하경륜(林下經綸)」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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