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에 대한 새로운 감각
: 본대로, 느낀대로 『연기』②
1. 성심과 예의
담헌은 북경에서 천주당을 방문한다. 명나라 신종 때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 들어온 이후 천주교 신부들이 계속해서 들어오자 강희제 말년에 청나라 조정에서는 신부들이 살 천주당을 북경의 동서남북 네 곳에 지어주었다고 한다. 담헌이 방문했던 곳은 천주당 중에 남당이었다. 담헌이 천주당을 방문한 이유는 분명했다. 서양에 대한 호기심도 호기심이거니와 혼천의를 제작했던 천문학자로서 천주당의 서양 신부에게 천문과 역법에 대해 배우고, 서양과학기술과 기구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기실 조선사신단 대부분이 그랬듯 담헌 또한 천주교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강희 연간 이후로부터 우리 나라 사신이 연경(燕京)에 가면 더러 그들이 있는 집에 가서 관람하기를 청하면, 서양 사람들은 매우 기꺼이 맞아들이어 그 집 안에 설치된 특이하게 그린 신상(神像) 및 기이한 기구(器具)들을 보여주고, 또 서양에서 생산된 진이(珍異)한 물품들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므로 사신 간 사람들은 그 선물도 탐낼 뿐더러, 그 이상한 구경을 좋아하여 해마다 찾아가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 풍속은 교만하여서 그들을 거짓 대하는 등 예의를 갖추지 않는 일이 많고, 혹은 그들의 선물을 받고서도 보답하지 않았다. 또는 수행원 중에 무식한 사람들은 가끔 그 집에서 담배를 피우고 가래침을 뱉으며, 기물을 함부로 만져 더럽혔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즘에 와서는 서양 사람들이 〈우리를〉 더욱 싫어하여, 관람을 청하면 반드시 거절하고 설사 관람을 허락하더라도 정의(情誼)로 대하지 않았다.”
-「유‧포문답」, 『연기』, 『담헌서』 외집 7권
중국에 왔던 천주교 신부들은 처음에 서양과학과 기술로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명종, 세계지도, 혼천의 등의 과학기구들은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 같은 것이었다. 천주당을 방문했던 조선 사신단의 기대도 이것 이상은 아니었다. 혼천의나 파이프오르간, 자명종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는데다 진기한 선물까지 선물로 받으니 너도나도 천주당을 방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사신단의 태도에 있었다. 천주교에 대한 이해는커녕 이단이라 무시하여 예의도 갖추지 않고 기물은 더럽히니 어느 누가 기꺼워하겠는가? 그 여파는 이후에 오는 조선인들이 고스란히 받을 밖에.
"북경 천주당의 신부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시계로, 사신으로 북경에 갔던 조선의 관리가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숭실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양신부를 만나 확인하고 싶은 게 많았던 담헌이 얼마나 안타까워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담헌은 교만한 조선의 풍속을 나무란다. 다른 나라의 문화와 풍속을 접할 때 성심과 예의를 갖추는 것이 손님의 기본자세건만, 선물만 탐하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 아닌가. 담헌은 당시 남당의 두 신부, 유송령과 포우관에게 예물과 함께 편지를 정중하게 보낸다. 예물은 장지 2속(束), 부채 3자루, 먹 3갑, 청심원(淸心元) 3알. 담헌만큼 겸허한 여행객이 또 있을까? 담헌은 성의와 예의를 다해 두 신부의 마음을 움직였다. 배우려는 자세로 다가가는 사람만이 이럴 수 있는 법.
“새봄을 맞이하여 다복하심을 비옵니다. 저희는 궁벽한 지방에서 생장(生長)하였으므로 식견이 어둡고 고루합니다. 특히 성상의도(星象儀度)에 있어서는 그에 알맞은 재주가 아닌데, 망령된 생각에서 배우기를 원하나 공을 들여도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합니다. 듣자오니, 좌하께서는 하늘의 근원을 학구(學究)하여 미묘하고 그윽한 뜻을 발천(發闡)하고 그 높고 깊음을 궁극적으로 깨달았다 하오니, 대개 백세(百世)에 듣지 못한 일입니다. 저희는 대방가(大方家)에게 유학하여 상수(象數)를 배우려 생각하였으나 국경이 제한된 까닭에 한갓 마음만이 간절했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다행히 사행을 따라 황도(皇都)에 와서 덕(德)이 높음을 보게 되오니, 거의 숙원(宿願)을 이룬 듯합니다. 오직 두려운 것은 외국의 비천한 몸인지라 문지기에게 거절을 당할까 주저한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이에 망령되고 경솔함을 돌보지 않고 어리석은 충심을 대강 말씀드리오며, 변변치 못한 토산물이나마 옛사람의 집지(執贄)하던 뜻을 본받아 올리오니, 여러 선생께서는 살피시어 처리해 주십시오.”
-「유‧포문답」, 『연기』, 『담헌서』 외집 7권
담헌의 편지에는 잘난 척이 조금도 없다. 겸손하게 배우기를 청했다. 식견이 어둡고 고루한 저 궁벽한 나라의 선비에게 서양의 천문학을 가르쳐달라고 한껏 몸을 낮춘다. 천주당의 문지기에게 거절당할까 좌불안석이라는 담헌, 비굴하게 보이는가? 생각해보라. 수학, 천문학을 탐구하는 학자로서 서양의 대가에게 상수학을 들을 수 있는,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기회를 자존심 하나로 흘려보내는 게 과연 옳을까? 조선사신단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자 할 때 간곡한 마음을 내보이는 것보다 더 좋은 해결책은 없었으리라.
마침내 담헌의 성의에 유송령과 포문관의 마음이 열린다. 담헌은 세 차례 천주당을 찾아간다. 천주당의 신부들이 흔쾌히 허락했다면 담헌이 천주당에 들른 횟수는 더 많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일로 신부들이 자리를 비우거나 거절해서 세 차례밖에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래도 세 차례나 간 덕분에 담헌은 천주당의 성상과 벽화를 자세히 관찰하고, 파이프오르간도 연주해보고, 이런저런 천문기구도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유송령 신부로부터 별자리의 운행, 지리, 천주교의 신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렇게 보면 다른 문화를 접하는 사람의 윤리는 성심과 예의이다. 여행에서 많은 걸 보고 느끼려면, 겸허하게 배우기 위한 기본자세부터 갖춰야 한다. 우리는 『연기』를 읽으면서 부지런하고 호기심 가득한 담헌의 유람벽에 하나 더 보탤 것이 있다. 담헌이 남과 다른 여행을 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책은 성심과 예의를 다해 배우기라는 사실.
2. 문명의 빛과 그림자
천주당에서 보여준 학구적 관심 외에도 담헌은 성곽, 자연, 음식, 의복, 병장기, 수레, 온돌, 연극, 마술 등등 청나라의 온갖 기이한 풍물, 번성한 문물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담헌에게 청나라는 야만의 나라가 아니라 조선과는 다른 나라로서 낯설고 신기할 뿐이었다. 이상하고 신기한 나라! 청나라는 담헌에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담헌의 머릿속에는 청나라에 대한 고정된 인식 틀이 아예 없었다. 길 위를 횡단하며 자신이 직접 목격하며 느꼈던 그 모든 것이 청나라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연기』를 보면 담헌은 청나라를 기술하는 일에 있어 몸을 사리지도 않고 축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과장하지도 않는다. 무시하지고 않고 계몽하지도 않고. 청나라의 문명을 본 그대로, 느낀 그대로 쓸 뿐이었다. 참으로 담담하게!
담헌이 편견 없는 시선 덕분에 이제까지 굳게 지키고 있던 청나라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청나라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현실화되었다. 담헌에게 청나라는 조건반사적으로 야만이거나 오랑캐 땅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청나라의 휘황찬란한 문화에 무조건 현혹되지도 않았다. 담헌에게 청나라는 만주족, 한족, 몽고족, 회회족, 위그르족 등이 뒤섞여 살아가는 또 하나의 문화이자 생활의 터전이었다. 담헌은 그 생활의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여느 나라나 그렇듯 청나라 문명에는 빛도 있었고 그림자도 있었다.
북경의 유리창은 조선의 선비들을 놀라게 한 대표적인 명소 중의 하나다. 북경 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리창에서 담헌은 어지러움을 느낀다. 서적과 솥, 종묘제기, 골동품 등 온갖 보배스럽고 괴상하고 기이하고 교묘한 물건들이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길을 따라 걸어가면 마치 페르시아[波斯]의 보물 시장에 들어간 것처럼 그저 황홀하고 찬란하기만 해서 종일 다녀도 물건 하나 제대로 감상할 수 없을 정도다. 서점 안의 책은 수만 권이나 되어 고개를 들고 한참 있으면 책이름을 다 보기도 전에 눈이 먼저 핑 돌아 침침해질 지경이다. 게다가 거울 가게는 또 어떤가? 천백 개로 나눈 몸이 벽 창문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아 한동안 어리둥절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이 길을 끼고 좌우로 있는 점포만도 수천 수백에 달하고 그 물건 만드는데 소요된 비용도 몇 만의 거액인지 알 수 없는데, 기실 일반 백성들의 양생(養生) 송사(送死)에 꼭 없어서는 안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모두가 이상한 재주에 음탕하고 사치스러운 물건들로 사람의 뜻을 해치는 것뿐이다. 이상한 물건들이 날로 불어나며 선비들의 기풍이 점점 흐려져 가니, 중국이 발전 못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슬픈 일이다.”
- 「유리창」, 『연기』, 『담헌서』 외집 9권
담헌은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한 물건에 눈길을 주면서도 여기에 현혹되지 않는다. 담헌에게 문명의 심급은 번화한 시가지와 화려한 물건들로 따질 수 없는 것이다. 백성들의 생활과 일용에 필요한 물품이 문명지수이다. 그런데 유리창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그 많은 물건 중에 백성들의 양생(養生)과 송사(送死)에 쓸 수 있는 일용품은 하나도 없다. 담헌이 진단하기에 사치스런 물건에 빠져들면 방탕을 일삼아 선비의 뜻과 기상을 잃게 될 뿐이다. 담헌은 이 때문에 중국이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나라의 문명화는 백성들의 생활상과 사대부들의 기풍에 달린 것. 담헌은 문화적 화려함이라는 외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청나라의 속내를 살피려 애썼다.
<연행도> 중 13폭에 그려진 <유리창> . 유리창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북경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담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황제들이 살고 있는 궁궐의 규모는 그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잣대이다. 정치의 도는 궁궐의 규모와 반비례한다. 담헌은 나라가 안정된 곳은 궁궐이 소박하다고 생각했다. 담헌은 청나라의 정치를 평가할 때도 이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라고 특별하게 더 비판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역대 중국왕조와 마찬가지로 청나라 정치에서도 배울 점이 있고, 버릴 점이 있다. 청나라는 3대 황제인 강희제로 인해 중국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강희제는 60여년의 치세 동안 청나라를 역대 최고의 왕조로 만든 장본인이다. 담헌은 강희제의 훌륭한 통치력을 창춘원이라는 별궁에서 찾아낸다.
“창춘원은 강희제(康熙帝)의 이궁(離宮)인데, 경성 서쪽 20리에 있다. 담 높이는 두 길이 채 못 되는데, 담을 돌며 바라보면 높은 지붕을 볼 수 없어, 고루 거각 등 볼만한 것이 없을 것 같다. 문 옆으로 분원(墳園)이 둘러 있어 소나무ㆍ잣나무가 울창히 들어서 있다. 그 법제의 간소하고 질박함을 알 수 있다. 문단속이 너무 엄해 안으로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들여다보니 짐작컨대 사방이 겨우 3리 정도밖에 안 될 것 같다. 문도 단층 처마였고 단청도 소박하기만 했다. 60년 동안 천하가 받들던 궁실이 이처럼 낮고 검소했으므로, 천하를 위복(威服)시키고 화이(華夷)가 은혜에 젖어 오늘날까지 그를 성인으로 부르는 것이다. 3대(하ㆍ은ㆍ주) 이후로 천하의 임금된 자가 모두 그 거처의 사치를 시새웠다. 이른바 남면지락(南面之樂)이란 것도 실상 궁궐의 아름다움과 수레ㆍ말ㆍ장막 등 사치를 누리는 데 불과했다. 비록 천하가 자기를 평판하는 것이 두려워 겉으로 검소한 체하면서도 마음속에 간직된 기호와 욕망만은 숨기지를 못했었다.
오늘날 북경에 궁궐이 그토록 많고 화려한 것도 모두 명나라 3백 년간 풍요와 안정을 통해 짓고 꾸미고 한 것들이다. 거기에 그대로 눌러 있다고 해서 아무도 말할 사람도 없고 또 그것으로 만족을 표시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걸 버리고 거친 들판으로 나가 거의 감당(甘棠)나무 밑의 풀집처럼 하고 살았으니, 그의 욕심을 버리고 검소한 걸 보인거나, 시종일관 평화와 안정을 위해 힘쓴 점은 뒤 임금들의 모범이 될 만하다. 또 천관(千官)들이 경성에서 매일 새벽에 나와 저녁에 돌아가야 했으니, 육식(肉食)하고 비단 옷 입는 귀한 사람들로 하여금 말타는 수고를 익히며 잠시도 편안히 있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 기하(旗下)의 제관(諸官)들도 대신 이하는 수레나 가마를 타고 다닐 수 없었으니, 그 제도가 반드시 선왕의 착한 법이 될 수는 없지만 편안한 속에서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으니 역시 패주[伯主]의 원대한 책략이라 말할 수 있다.“
-「창춘원」, 『연기』, 『담헌서』 외집9권
강희제의 위대함은 물론 선왕의 착한 법에 미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강희제는 패주가 될만한 정치력을 갖춘 황제로 오늘날의 청나라를 있게 했다. 강희제가 머물렀던 창춘원이란 별궁은 작고 낮고 소박하기 짝이 없다. 역대 황제들은 겉으로는 소박한 체하면서도 마음속의 사치스런 취향과 욕망만은 숨기지를 못해 궁실의 위용을 화려하게 꾸미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달랐다. 이미 명나라에서 세운 황실만으로도 사치를 누리기에 모자람이 없었지만 강희제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거친 들판에서 일어났던 그 초발심을 잊지 않으려고 명실상부 검소하고 부지런했다. 또한 평화와 안정을 위해 결코 안주하지 않았다. 수레와 가마 대신 말을 타는 수고를 익히게 하면서 유목민으로 살았을 때의 생활을 몸에 새겼다. 이 정도라면 위대한 황제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중화든 오랑캐든 모두 강희제를 성인이라 일컫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담헌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강희제의 치적을 평가한다. 청나라의 변발한 황제를 이토록 칭송하다니, 담헌은 청나라에서 배우자는 말을 직접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과감한 논평으로 청나라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그리고 배울 점을 찾아냈다. 담헌이야말로 북학의 선두주자다.
담헌의 시선은 옹정제와 건륭제로 옮겨간다. 옹정제의 별궁은 원명원이다. 강희제의 창춘원보다 10배는 더 웅대하고 사치하다. 그런데도 건륭제가 이 별궁을 다시 수리하면서 그 규모가 본궁을 능가하여 화려하기 그지없다. 강희제가 검약을 숭상했던 그 어진 정치의 기상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담헌은 청나라의 현재를 마냥 비판할 수 없었다. 건륭황제 당시의 청나라는 나라 안팎이 지극히 평화롭고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역대로 내려오며 누대(樓臺)의 사치와 범람함이 진ㆍ한ㆍ진ㆍ수(秦漢陳隋) 때만큼 성한 때가 없다고 하겠는데, 이들 규모와 제도를 볼 때 그 크고 웅장함에 있어선 아방(阿房)이나 건장(建章)만 못할지 몰라도 교묘한 것은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 그러니 강희(康熙)의 어진 정치도 거의 식은 것 같다. 그러나 백성들이 부역의 고달픔을 느끼지 않고 세금을 더 물지도 않으며, 중국과 오랑캐가 다 같이 평화를 누리고, 관동 수천 리에 근심과 원망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으니, 그 나라를 세울 당시의 간이하고 검소한 법도는 역대 조정이 따를 바가 아니지만, 지금 황제의 재략 또한 남보다 훨씬 뛰어난 점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산」, 『담헌서』 외집 9권
2013년 원명원의 모습. 남아있는 유적만으로 얼마나 화려했을지 짐작이 간다.
담헌이 궁궐의 사치를 문제 삼는 것은 단순하게 옹정제와 건륭제의 정치를 비난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담헌은 정치의 근본을 생각했기 때문에 사치를 경계한 것이다. 화려한 문물을 발전의 상징으로만 보는 건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화려하고 사치스런 문화는 오히려 사람과 사회를 해치는 조짐이다. 인간의 취향과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면 기강은 해이해지고 기상은 약해진다. 사치와 방탕은 사실 삶의 불균형을 가져오는 주범 아닌가? 욕망이 지나치면 몸을 해치듯, 사회도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담헌은 검소했던 강희제의 정치가 식은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나라의 발전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를 일깨운 것이다. 나라의 발전은 문물의 번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의 양생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를 일컫는 것이다.
담헌은 건륭 치세의 안정기를 왜곡하지 않았다. 강희제 때만은 못하지만 현재의 청나라 또한 역대 최고의 평화와 평안함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백성들은 부역에도 세금에도 시달리지 않았고, 중화와 오랑캐 모두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근심과 원망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태평성세였다. 담헌은 인정할 건 인정했다. 담헌은 청나라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쓸데없이 질시하지 않았다. 현실을 외면하는 행위야말로 우매한 것 아닌가? 담헌은 문명의 빛과 그림자를 보면서 조선의 내일을 탐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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