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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18c 조선지식인 생태학

담헌 홍대용 ⑥ '지구는 둥글고, 스스로 돈다!'

by 북드라망 2015. 2. 24.


담헌 홍대용의 『의산문답』

세상의 중심을 깨뜨리다




1.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


담헌 홍대용의 『의산문답』을 조선시대의 가장 긴 과학서라고들 말한다. 과학서라는 말에 고무되어 『의산문답』을 읽는다면 실망할 것임에 틀림없다. 천문학에 관한 고도의 지식으로 가득차 있으리라는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의산문답』은 과학에 관한 전문 서적이 아니다. 인간, 우주, 세계에 관한, 가장 뜨거운 이슈를 가지고 논쟁하는 책이다. 전적으로 천문학만을 다룬 과학 서적이기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상식 또는 편견을 깨뜨리기 위한 일련의 논쟁 속에 천문학이 중요한 논점의 하나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과학서로서의 『의산문답』의 의미가 축소된다고 할 수는 없다. 당대 최고의 천문학 이슈들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둥글다는 ‘지원설’, 지구는 스스로 돈다는 ‘지전설’, 우주가 무한히 펼쳐져 있다는 ‘우주무한설’이 그것이다. 또한 이 천문학논쟁이 우주에 관한 상식을 깨는 데에 멈추지 않고, 우리들의 세계 인식과 삶의 태도까지 돌아보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궁리(窮理)로부터 궁행(躬行)에 이르는 앎-삶의 일치가 아닌가? 담헌은 지식 담론이 의식 혁명이자 삶의 혁명에 이르기를 원했다. 그 지식담론은 특정한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았다. 담헌에게는 성리학의 심성론, 천문학, 정치학에 과한 모든 지식담론이 삶이라는 이름으로 연동되었던 것이다.          


담헌에게 과학은 지식으로 소비되지 않고, 우리 삶과 세계의 관계를 보는 힘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의산문답』의 허자와 실옹의 대화는 인간의 심성 조건을 탐구한 후, 우주에 관한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진다. 담헌은 “음양설과 의리설”로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던 전래의 방식에서 벗어나 자연과학적 사고로 우주를 해명한다. 지원설, 지전설, 우주무한설로 구성된 담헌의 천문학은 그 이론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지만, 더 중요한 지점은 이 세계에 ‘절대 중심’이 있다는 관념을 해체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담헌의 『의산문답』은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고 '중화'라는 기존 관념을 해체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림은 <천하도>. 천하를 그린 지도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중국(中國)이다.


담헌은 자연과학적 사고로 중세적 관념의 편협성을 깨뜨린 것이다. 天圓地方(천원지방)으로 규정했던 전통자연학의 하늘과 땅의 위계는 지원설과 지전설에 의해 깨진다. 담헌이 주장하는 지원설과 지전설이 서양 천문학의 이론에 비해 얼마나 독창적인가를 따지는 건 『의산문답』의 맥락에서 볼 때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담헌의 지원설과 지전설은 17세기 이래 들어온 서양 천문학을 근거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담헌의 천문학 이론의 의미는 하늘, 땅, 별들이 각각 위계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관념을 깨고, 서로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밝힌 데 있다. 이 각각은 저대로 중심일 수 있다는 것. 그 어떤 것도 어떤 것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그 사실!


지구는 둥글고. 지구는 스스로 돌기 때문에 우주의 중심은 없다. 지구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펼쳐진 네모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지구상의 그 어떤 세계도 하나의 중심이 되기는 어렵다. 그리고 하늘이 지구를 향해 도는 게 아니라 지구 스스로가 돌고 있기 때문에 우주의 중심은 없다. 하늘도 중심이 아니요, 지구도 중심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세계가 무한으로 존재하고 그 각각은 다 지구처럼 회전하며 독립적으로 펼쳐져 있으니 누가 누구의 중심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담헌이 주장하는 바는 이것이었다. 이것을 위해 담헌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 지구가 스스로 돈다는 사실을 관측과 유추에 의해 증명하려 애썼다.



① “심하다. 너의 둔함이여! 온갖 물의 형체가 다 둥글고 모난 것이 없는데 하물며 땅이랴!
달이 해를 가리울 때는 일식(日蝕)이 되는데 가리워진 체(體)가 반드시 둥근 것은 달의 체가 둥근 때문이며, 땅이 해를 가리울 때 월식(月蝕)이 되는데 가리워진 체가 또한 둥근 것은 땅의 체가 둥글기 때문이다. 그러니 월식은 땅이 거울이다. 월식을 보고도 땅이 둥근 줄을 모른다면 이것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추면서 그 얼굴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어리석지 않느냐?
옛날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 하였으나, 이것은 사각(四角)을 서로 가리워낼 수 없는 것인데 그 말만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었다.
대개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난다는 것을 어떤 자는 천지의 덕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또 너도 옛사람이 전해 기록한 말을 믿는 것이 어찌 직접 목도하여 실증하기만 하겠느냐?
진실로 땅이 둥글다면 사우(四隅)ㆍ팔각(八角)ㆍ육면(六面)이 모두 평면이고 변두리는 낭떠러지로 되어 마치 담이나 벽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가?” 

② “지구의 체와 상하의 세력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신대로 믿겠습니다. 감히 묻건대, 땅덩어리의 회전이 그처럼 빠르고, 부딪는 기운도 그처럼 격렬하다면 그 힘이 반드시 맹렬할 터인데, 사람이나 다른 사물이 쓰러지고 넘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실옹이 말하기를,
“온갖 물(物)이 생겨날 때는 모두 기(氣)가 있어, 그것이 휩싸고 있기 때문이다. 체(體)는 크기가 있고 기(氣)는 두께가 있으니, 마치 새알의 노른자와 흰자가 서로 붙어 있는 것과 같다.
땅 은 덩어리도 크거니와, 싸고 있는 기운 또한 두껍다. 이것이 엉켜 뭉쳐져 하나의 공 모양을 이루어서 허공에서 돌게 된다. 천지의 두 기(氣)가 같고 비비는 즈음에 서로 빨리 부딪치는 것을 술사(術士)는 측량하여 강풍(罡風)이라 한다. 이 바깥은 크고 넓고 깨끗하고 고요할 뿐이다.
천지의 두 기가 서로 부딪쳐 땅으로 모이는데 마치 강과 하수의 물이 낭떠러지에 떨어져 소용돌이를 이루듯 한다. 상하의 세력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새가 공중에서 날고 구름은 피어나며 걷혀 물고기와 용은 물에서 놀고 쥐는 땅으로 다니듯, 모여진 기(氣)에서 활동하여 넘어지거나 쓰러질 염려가 없거늘, 하물며 지면에 붙어 있는 인ㆍ물이겠는가?
또 너는 너무도 생각지 못하는구나. 지구가 돌고 하늘이 운행함은 그 형세가 같은 것이다.
만 약 쌓여진 기(氣)의 달림이 회오리바람보다 더 사납다면 인ㆍ물의 쓰러지고 넘어짐이 반드시 갑절이나 될 것이다. 개미가 맷돌에 붙어 빨리 돌다가 바람을 만나 쓰러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하늘의 운행은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땅의 회전에만 의심하니, 생각의 못 미침이 심하도다.”

- 홍대용『의산문답


①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논의는 유추와 비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홍대용은 세상의 모든 물체가 둥글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지구도 둥글다고 말한다. 또한 일식과 월식이라는 천문현상을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유추한다. 달을 해가 가리는 현상이 일식인데, 달이 둥글기 때문에 해를 가린 형상이 둥글게 나타난다. 땅이 해를 가리는 현상은 월식인데, 해를 가린 형상이 둥글게 드러난다. 일식 현상에서 달이 둥글기 때문에 둥근 형상으로 반사되는 것처럼 해를 가린 형상이 둥근 이유는 달처럼 땅도 둥글기 때문이라고 유추한다. 일식을 통해 월식의 현상을 유추하고, 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유추했던 것이다. 홍대용은 월식은 땅을 거울에 비추어 본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비유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얼마나 자명한 사실인지를 강조하고 있다.  


②는 지구가 자전하는데도 지구상의 사람과 사물이 쓰러지지 않는 연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홍대용은 이를 계란의 노른자와 흰자, 그리고 회전하는 맷돌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모든 물은 형체로 이루어져 있고 이 형체를 기가 싸고 있는데, 지구도 마찬가지이다. 지구는 땅덩어리와 기가 만나 공모양을 이루어 회전하는 것인데, 계란의 흰자와 노른자가 서로를 지탱하는 모습처럼 지구도 형체와 기가 서로를 지탱하며 회전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리 때문에 땅덩어리를 둘러싼 기운 속에서 새도 날아다니고, 구름도 피었다 걷히며, 물고기도 물속을 헤엄쳐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땅이라는 형체에 붙은 사람과 물이 쓰러지지 않는 건 당연하다. 이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회전하는 맷돌에 붙은 개미를 예로 든다. 맷돌이 돌아도 맷돌에 붙어있는 개미가 그대로이듯 지구가 회전해도 사람과 사물은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맷돌의 비유는 구체적 실감을 안겨준다.


"체(體)는 크기가 있고 기(氣)는 두께가 있으니, 마치 새알의 노른자와 흰자가 서로 붙어 있는 것과 같다"




2. 하늘은 주재하지 않는다!


홍대용은 객관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노력했다. 지구가 둥글며, 지구는 드넓은 우주에 무한대로 펼쳐진 여러 별 중의 하나라는 주장은 하늘과 지구를 구획 짓는 위계의 관념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그는 천리의 절대성과 주재성을 부정했으며, 하늘에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에도 반대했다. 그에게 하늘은 지구와 다르지 않은 세계였다.


이때 서양에서 중천설이 들어왔는데, 이설에 의하면 지구는 몇 겹의 하늘에 둘러싸인 형태다. 김석문은 중천설을 수용하여 9중천설을 지지하는데, 우주 바깥으로부터 차례로 태극, 태허, 경성, 진성(토성), 세성(목성), 형혹(화성), 해, 달, 지구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서학 즉 기독교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는 영정부동천(永靜不動天) 대신 태극천을 상정하고 종동천(宗動天)도 태허천으로 대체했다. 영정부동천은 영원히 정지하여 움직이지 않는 가장 바깥의 하늘이고 종동천은 영정부동천 이전의 하늘로 남극과 북극 그리고 적도가 나뉘는 하늘을 말한다. 이 영정부동천과 종동천을 태극천과 태허천으로 대체한 것은 천리의 주재와 기의 운동을 통해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파악하는 전통적인 관점을 견지한 것이라 할 수 있다.(김문용, 조선후기 자연학의 동향,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100쪽)


담헌은 중천설을 벗어남으로써 하늘의 주재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은하 안에는 태양과 지구와 같은 세계가 수없이 많고, 우주 안에는 그 은하와 같은 세계가 또 수없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주는 인간의 안목으로 도달할 수 없는 무한대의 공간이다. 이런 우주의 배치 속에 누가 누구를 주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각 별은 저대로 운행될 뿐, 어떤 징험을 내릴 수 있는 어떤 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은하라고 하는 것은 여러 세계가 모여서 경계를 이루고, 우주 공간을 빙글빙글 돌아 하나의 큰 고리를 이룬다. 그 고리 속에는 세계가 많아서 그 수효가 천, 만에 이른다. 태양과 지구 등의 이 세계는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것이 태허의 한 커다란 세계이기는 하지만, 땅에서 보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땅에서 보는 것 밖에 은하와 같은 것이 몇 천, 만, 억 개가 될지 알지 못한다. 내 어슴푸레한 눈에 의지해서 느닷없이 은하를 제일 큰 세계라고 해서는 안된다.
  

허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분야라는 말은 전해온 지 이미 오래고 혹 분명한 징험도 있었습니다. 어느 때는 좋은 바람이 불었고 어느 때는 좋은 비가 왔으며, 어느 때는 형혹성(熒惑星)이 심성(心星)을 지켰는데 이러한 천체 현상의 부응(符應)도 모두 믿을 것이 못됩니까?”

실옹이 답했다.
“입이 여럿이면 금도 녹이고 비방을 쌓으면 뼈도 녹인다 한다. 입이 금을 녹일 수 없고 비방이 뼈를 녹일 수 없지마는 오히려 녹이게 되는 것은 사람이 여럿이면 하늘도 이기기 때문이리라.
기술이란 비록 허망한 것이나 마음에 느꺼워 몹시 믿고 의지하게 되면 혹 징조의 감응이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허공에 헛그림자를 잡는 것이다. 헛그림자에 현혹되어 실제는 살피지 않으니 미혹됨이 심하다. 또 ‘기성(箕星)이 나타나면 바람이 불고 필성(畢星)이 나타나면 비가 온다.’는 말은 세속에 전하는 말을 끌어다가 민정(民情)을 밝힌 것뿐이요, 기성과 필성 두 별이 참으로 이런 것은 아니다.
형혹성이 가다가 때로 싸기도 하고 돌기도 하는데, ‘머물고 지키고, 나아가고 물러선다.’는 말은 지구 세계에서 보는 관점이 그러한 때문이다. ‘하늘이 높아도 낮은 데의 말을 듣는다.’ 함은 역가(曆家)의 잘못이다.”


필수는 비를 주관하는 별로, 별명은 우사(雨師)다. 그렇다고 필수가 뜬다고 꼭 비가 오는 것은 아니다^^;;


담헌은 시세와 천문현상을 연관짓는 태도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한다. 기성이 나타나면 바람이 불고, 필성이 나타나면 비가 온다는 속설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객관 세계로 보면 기성은 기성이고, 필성은 필성일 뿐이다. 기성이 어떤 작용을 하게 할 수도 없고, 필성이 어떤 작용을 하게 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하늘에 투사해서 그런 것일 뿐 실제 인간 세상에 대해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다. 담헌은 여러 사람들의 입과 마음이 모이면 하늘도 이기기 때문이지 하늘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담헌은 이렇듯 세계의 보이지 않는 작용은 믿지 않았다. 그가 믿은 것은 오직 객관 세계(현상계)의 양태와 움직임이었다.  




3. 중화와 오랑캐라는 척도의 해체!


객관 세계를 향해 우리의 고정되고 편재된 마음을 투사하지 않고 바라보면, 이 세계의 모든 구획과 위계는 사라진다. 홍대용은 우주무한설과 객관물로서의 하늘을 증명한 후, 문명의 중심이자 지리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구획도 여지없이 격파한다.


중국은 서앙(西洋)에 대해서 경도(經度)의 차이가 1백 80도에 이르는데, 중국 사람은 중국을 정계로 삼고 서양으로써 도계(倒界)를 삼으며, 서양 사람은 서양을 정계로 삼고 중국으로써 도계를 삼는다. 그러나 실에 있어서는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사람으로서 지역에 따라 다 그러하니, 횡(橫)이나 도(倒)할 것 없이 다 정계다.
세상 사람은 옛 습관에 안착하여, 살피지 않는다. 이치가 눈앞에 있는데도 일찍이 연구하여 찾지 않는 때문에 일평생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건만 그 심정과 현상에 캄캄하다. 오직 서양 어떤 지역은 지혜와 기술이 정밀하고 소상하여 측량에 있어서는 해박하고 자세하다. 땅을 지구(地球)라고 하는 설은 다시 의심할 여지도 없다.


담헌은 최종적으로 중국과 오랑캐라는 구획을 의심하는 지점에 도달한다. 국가 간의 위계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만 있을 뿐이다. 화이관념은 18세기 조선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대부분 청나라는 오랑캐이고, 중국에 대해 조선도 오랑캐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조선을 춘추의 대의명분론을 유지하는 소중화라고 인식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이런 인식은 조선을 동이(東夷)라고 보는 생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화이라는 구분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를 습속의 문제와 내외 구분의 상대성, 역외춘추설로 반문한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짓되 중국은 안으로, 사이(四夷)는 밖으로 하였습니다. 중국과 오랑캐의 구별이 이와 같이 엄격하거늘 지금 부자는 ‘인사의 감응이요 천시의 필연이다.’고 하니, 옳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하늘이 내고 땅이 길러주는,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모두 이 사람이며, 여럿에 뛰어나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자는 모두 이 임금이며, 문을 거듭 만들고 해자를 깊이 파서 강토를 조심하여 지키는 것은 다 같은 국가요, 장보(章甫)이건 위모(委貌)건 문신(文身)이건 조제(雕題)건 간에 다 같은 자기들의 습속인 것이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느냐?
이러므로 각각 제 나라 사람을 친하고 제 임금을 높이며 제 나라를 지키고 제 풍속을 좋게 여기는 것은 중국이나 오랑캐가 한가지다.
대저 천지의 변함에 따라 인물이 많아지고 인물이 많아짐에 따라 물아(物我 주체와 객체)가 나타나고 물아가 나타남에 따라 안과 밖이 구분된다. 장부[五臟六腑]와 지절(肢節)은 한 몸뚱이의 안과 바깥이요, 사체(四體)와 처자(妻子)는 한 집안의 안과 바깥이며, 형제와 종당(宗黨)은 한 문중의 안과 바깥이요, 이웃 마을과 넷 변두리는 한 나라의 안과 바깥이며, 법이 같은 제후국(諸侯國)과 왕화(王化)가 미치지 못하는 먼 나라는 천지의 안과 바깥인 것이다. 대저 자기의 것이 아닌데 취하는 것을 도(盜)라 하고, 죄가 아닌데 죽이는 것을 적(賊)이라 하며, 사이(四夷)로서 중국을 침노하는 것을 구(寇)라 하고, 중국으로서 사이(四夷)를 번거롭게 치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그러나 서로 구(寇)하고 서로 적(賊)하는 것은 그 뜻이 한 가지다.
공자는 주 나라 사람이다. 왕실(王室)이 날로 낮아지고 제후들은 쇠약해지자 오(吳) 나라와 초(楚) 나라가 중국을 어지럽혀 도둑질하고 해치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춘추(春秋)란 주 나라 사기인 바, 안과 바깥에 대해서 엄격히 한 것이 또한 마땅치 않겠느냐?
그러하나 가령 공자가 바다에 떠서 구이(九夷)로 들어와 살았다면 중국법을 써서 구이의 풍속을 변화시키고 주 나라 도(道)를 역외(域外)에 일으켰을 것이다. 그런즉 안과 밖이라는 구별과 높이고 물리치는 의리가 스스로 딴 역외 춘추(域外春秋)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성인(聖人)된 까닭이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느냐?


화이론을 전개하는 위 글에서도 하늘에서 보면 안과 밖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안과 밖의 ‘사이’에 서라는 것이다. 천지가 변하면서 물아가 나뉘고 안과 밖이 구분되었다. 애초에 안과 밖의 구분에는 상하, 선악, 시비가 전제되지 않았다. 그냥 공간적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홍대용은 공간적 차이만 존재하는 ‘안과 밖’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장부와 지절은 몸뚱이의 안과 밖이요, 사체와 처자는 집안의 안과 밖이요, 형제와 종당은 문중의 안과 밖이요, 이웃 마을과 사방 변두리는 나라의 안과 밖이요, 제후국과 먼 나라는 천지의 안과 밖이라고 한다. 누구의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안과 밖은 달라진다.


중세적 지식과 관념은 사람과 사물, 천과 지, 화와 이를 위계적으로 바라본다. 중세인들은 이 두 세계 사이의 차별적 구획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사람, 하늘,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요, 기준이라는 것을 절대적 진리 혹은 절대적 사실로 당연시하였다. 실옹은 이런 고정 관념을 격파한다. 실옹은 사람과 사물, 하늘과 땅, 성계와 지계, 서양과 중국, 중국과 오랑캐 사이의 중심을 해체한다. 이 세상에 절대적 중심은 없다. 사람과 사물을 구획하는 경우, 사람으로서 보면 사람이 귀하고, 사물로서 보면 사물이 귀하며, 하늘로서 보면 사람과 하늘이 똑같다. 이와 같은 논리는 하늘과 땅, 우주의 뭍별과 지구, 서양과 중국, 중국과 오랑캐 사이의 구획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 두 세계는 사실상 똑같다. 누가 중심이 되느냐에 따라 서로의 위계가 달라진다. 중심은 맥락에 따라 이동할 뿐이다.


담헌은 중화와 오랑캐의 위계를 깨는 동시에, 오랜 세월 누적되어온 춘추대의의 관념도 해체한다. 공자의 말씀으로 절대시해온,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춘추대의를 깨기 위해 담헌은 트릭을 사용한다. 공자가 조선에 태어났으면 역외춘추를 쓰셨을 것이란다. 공자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공자의 권위를 이용해 춘추대의를 전복해버린 것이다. 담헌의 이 논리에 따르면 공자는 중원 땅에 태어났으므로 중화를 높이는 『춘추』라는 역사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를 뒤집어 보자. 공자가 조선 땅에 태어났다면 공자는 조선 땅을 높이고 조선의 사방을 오랑캐로 물리치는 역외의 춘추를 썼을 것임에 틀림없다. 공자의 권위로 공자의 권위를 격파하는 트릭. 이로써 중화와 오랑캐라는 오랜 차별의 관념은 사라진다. 이보다 더한 의식 혁명이 있을까? 


호주에서 그리는 세계지도. 우리가 익숙하게 보던 세계지도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이렇듯 중심은 그때그때 다르다^^



담헌은 모든 방면에서 절대 중심을 해체한다. 그 순간 천지자연과 우주와 세계는 달리 보인다. 사물도 사람처럼 인의예지신의 오상을 갖추고 있다. 사람과 사물의 위계가 없듯, 하늘과 땅의 위계도 없다. 지구는 하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이 모났다는 이전의 천문지식은 잘못되었다. 땅은 둥글며 자전한다.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므로 이 우주에는 하늘과 지구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해와 달과 지구는 별의 일종으로 나란히 놓여 있고, 별 밖에 또 별이 있으며, 이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무수한 세계가 존재한다. 지구가 뭍별 중의 중심이 아니듯,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중국 저 밖에는 서양과 같은 다른 나라들도 있다.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은 중국을 중심으로 할 때 생겨난다. 중국도 오랑캐도 똑같다. 오랑캐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도 오랑캐이다.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각자가 어떻게 중심에 매몰되지 않고 사느냐이다. 차이만이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풍토와 시대에 적합한 삶의 방식을 꾸리면 된다. 그러니 삶은 언제든 맥락에 맞게 변주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의산문답』은 담헌 사유의 최종심급이다. 담헌이 천문학, 수학에서 찾아낸 우주의 원리, 중국 여행에서 찾아낸 세계에 관한 이치, 성리학과 양명학 등 여러 사상 속에서 헤매며 찾아낸 인간의 이치는 『의산문답』에 총체화되었다.

그래서 담헌은 규정하기 어렵다. 굳이 정의하자면 담헌은 18세기 우주와 세계를 궁리(窮理)하고 삶으로 궁행(躬行)하여 세상의 모든 상식과 고정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자유인이었다고 해야 할까? 담헌은 진정 자유로운 백수 선비의 학문과 삶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의산문답』은 『담헌서』 내집 4권의 「보유(補遺)」에 속해 있습니다.

홍대용 담헌서 세트 - 전5권 - 10점
민족문화추진회 지음/한국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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