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부색-모발-스튜어트 홀
그때 그때 달라요
나는 얼굴이 검은 편에 속한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나를 ‘깜댕’이라고 불렀다. 내 얼굴색이 검댕 같다고 붙인 별명이다. 검댕은 검은 연기 속 먼지다. 제대로 못 탄 탄소가 남은 것이다. 나는 그리 불쾌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얼굴이 검은 것도 사실이고, 이 명칭이 혐오스럽지도 않아 친구들을 탓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친구들을 만날 때면 그 이름으로 호명된다. 이제는 그리 불러주는 친구들이 정다울 따름이다.
어렸을때 얼굴이 까만 아이들의 별명은 대게 '깜댕'같은 계열(?)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호명이 바다만 건너가면 아주 다른 효과를 발산한다. 현대 문화이론의 창시자, 스튜어트 홀(Stuart Hall, 1932~2014)은 이를 계급과 인종의 측면에서 관찰한다. 스튜어트 홀은 중남미 카리브 연안 자메이카 출신이다. 그는 젊은 시절과 성년기에 ‘유색 인종’으로 불렸다. 자메이카에서 ‘유색’은 보통사람들인 ‘흑인들’보다 좀 나은 중산계급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자메이카에서 ‘유색’은 ‘비흑인’을 뜻한다. 그러나 그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 영국인들이 보기에 그는 사실상 ‘흑인’이었기에 그를 ‘유색’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요컨대 똑같은 용어라도 서로 다른 ‘차이와 동일성의 체계’ 내에서 작용하면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즉, 똑같은 단어(여기서는 ‘유색’)라 할지라도 그 단어가 어떤 의미 작용의 연쇄 속에 위치하느냐에 따라서 뜻이 다르다. ‘카리브 연안 지역의 체계’에서는 백인을 정점으로 <백인-유색(갈색)-흑인-쿠울리(Coolies, 동인도인 노동자들)> 등으로 인종 담론이 세분되었기 때문에, 갈색(유색)이 흑인과는 다른 위치를, 즉 ‘비흑인’의 뜻을 획득할 수 있지만, ‘영국의 체계’에서는 <백인-비백인(=흑인)>의 담론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갈색’은 그저 흑인일 뿐이다.
결국 계급 담론과 인종 담론은 장소와 시간마다 다르게 존재하고, 따라서 서로 다르게 접합된다. 각 담론은 각각 다른 역사와 다른 작용 방식을 갖고 있고, 각각은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분할하고 분류한다. 그렇게 다른 분류체계들이 서로 다르게 ‘접합’(articulation)함으로써 각각은 다른 의미망을 구성한다. 갈색이 어느 곳에서는 ‘비흑인’으로서 중산계급을 의미하지만, 어느 곳에서는 ‘비백인’으로 하층계급을 뜻한다. 접합이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이 있으려면 이런 접합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접합이나 고정(fixing)이 없이는 의미작용이 전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이 의미에서 스튜어트 홀은 알튀세르가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주장했던 ‘모순과 중층적 결정’(Contradiction and Overdetermination)이라는 개념을 아주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인다. 결국 사회구성체 내의 이데올로기가 언제나 이미 분명히 주어지거나, 어떤 계급, 인종이 고정된 의미와 위치를 갖도록 보장해 주는 법칙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각 담론들 사이에 어떤 접합이 이루어지느냐에 따를 뿐이다. 자메이카의 접합과 영국의 접합이 다르기 때문에 흑인의 의미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서도, 어느 순간에도 ‘아무런 보증이 없다(no guarantee)’. 그래서 스튜어트 홀은 ‘최종적인 보증 없는 마르크스주의’(스튜어트 홀, 『스튜어트 홀의 문화 이론』, 임영호 편역, 한나래)을 주장한다.
어떤 계급, 인종의 고정된 의미, 고정된 위치를 보장해 주는 법칙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묘하게도 머리털이나 수염이 희거나, 검은 양상과도 비슷하다. 몸에 난 털도 그 위치에 따라 명칭이 천차만별이다. 머리에 난 털은 ‘길게 쭉 빠져나온다[拔]’는 뜻에서 ‘발’(髮, 머리털)이다. 눈 위에 난 털은 아름답다[媚]는 뜻에서 ‘미’(眉, 눈썹)다. 턱 아래 난 털은 이삭이 패고 꽃이 피듯[秀] 사람이 다 성장하면 난다고 해서 ‘수’(鬚, 수염)다. 뺨에 난 털은 입이 움직일 때마다 들썩들썩한다[髥髥]고 해서 ‘염’(髥, 구렛나루)이다. 또 입 위에 난 털은 여기에 털이 나야 멋이 있다[姿]고 ‘자’(髭, 콧수염)다. 이름만 들어도 아름다운 산천을 보는 것 같고, 어깨가 들썩들썩할 것 같다. 털 명칭만큼이나 생명력이 넘치는 이름이 또 있을까.
그래서인지 털은 생명력의 상태를 지극히 정직하게 드러낸다. 늙어서 턱수염만 희고, 눈썹과 머리털은 희지 않는 경우도 있고, 머리털만 희고 눈썹과 턱수염은 희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몸 안의 기운(특히 오장의 기운)이 구성되는 양상에 따라 밖으로 표현된 것이다. 머리털은 심에 속하여 화기운이다(참고로 <내경>에서는 “머리털은 신에 속한다(髮屬腎)”(『동의보감』 毛髮 862쪽)고 말하기도 한다). 눈썹은 간이어서 목기운이다. 턱수염은 신이어서 수기운이다. 결국 털이 희고 검고는 오장의 기운들이 어떤 양상으로 구성되어 있느냐,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느냐에 따른다. 마치 사회구성체의 이데올로기가 경제, 정치, 인종, 계급 등의 담론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접합되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을 띠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그때 그때 다르다.
심지어 몸속을 돌아다니는 12경맥과 몸 밖의 털들이 서로 상응한다. 눈썹은 태양경의 혈이, 구레나룻은 소양경의 혈이, 턱수염은 양명경의 혈이 많으면 아름답다고 한다. 또 개별 경맥 내에서도 기혈이 성한 정도에 따라 털에 표현되는 방식이 다르다. 족양명경맥에서 하부에 기혈이 성하면 음모에 윤기가 있고, 가슴까지 털이 난다. 그러나 상부에 기혈이 성하면 구레나룻이 윤기가 있다. 결국, 구레나룻은 아름답지만, 눈썹에 윤기가 없고, 머리털이 흰 경우는 소양경에 혈이 많고, 간의 목기운이 부족하며, 심에 화기운이 약해서 생긴 양상이다.
그렇다면 간달프 어르신의 오장육부는....=_ =;;;
옛 사람들은 머리털만 봐도 흉증(凶證)을 파악할 수 있다고하여 이를 귀하게 여겼다. 스튜어트 홀도 그람시가 ‘상식’이라고 부른 지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물론 보통사람들의 상식은 아주 모순된 이데올로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모순적인 이데올로기 속에는 모든 역사 단계에서 남겨진 인류의 통찰들이 흔적들(traces)로 남겨져 있다. 머리털에 남겨 있는 흉증처럼. 그런 의미에서 상식적인 관념들이야말로 우리들이 밀고 당기며 싸워야 하는 격전지이다. 『동의보감』은 머릿털이 혈의 나머지이므로 자주 빗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주 빗으면 눈이 밝아지고, 풍이 없어진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매일 새벽에 빗질을 늘 120번씩이나 했다고 한다. 머리털이 우리 신체의 격전지라고 여겨서일지 모른다.
글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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