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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동지(冬至)와 발리바르와 신장 - 대중의 새로운 힘, 공포

by 북드라망 2014. 12. 24.

#동지-에티엔 발리바르-신장


대중의 새로운 힘, 공포




이제 바야흐로 동지(冬至)다. 겨울의 추위[冬]가 지극해졌다[至]. 이날은 몹시 춥고 밤은 길다. 얼마나 추운지 열 많은 호랑이가 이날 교미한다고 하여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동지하면 역시 팥죽이다. 사람들은 팥의 붉은색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를 쫓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팥이란 말이 입에 감기면 신체 장부 중에 신장(腎臟)이 떠오른다. 신장의 다른 이름이 콩팥이기 때문이다. 신장의 모양이 강낭콩과 비슷하고, 색깔은 팥과 같다고 그리 불린다. 그래서인지 신장은 겨울을 상징하는 물[水]로 가득하다.




이 엄혹한 겨울에 신장은 참으로 문제적인 장부다. 신장은 몸 안에 까닭 없이 정기(精氣)가 유실되지 않도록 정기를 꼭꼭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이 신장에 끊임없이 정기가 보충되어야 육체와 정신 모든 면에서 건강할 수 있다.


그러나 신정(腎精)이 부족하면 생명에 위협을 느껴 두려움이 솟는다. 신정이 부족한 것, 그것은 공포[恐]다. 원래 정이란 태어나면서 부모로부터 받은 선천의 정과 태어난 후에 음식물로부터 얻는 정미물질인 후천의 정, 두 가지를 말한다. 이 두 가지가 신장에서 만나서 우리들의 생명력을 만든다. 성기능을 좌우하는 ‘천계(天癸)’도 여기서 생산된다. 이래저래 신장은 우리들 안의 생명을, 다시 말하면 “생명 안의 생명들(=정기)”을 관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은 ‘종묘사직’과도 같다(도담, 「오장육부의 생리」). 선천적인 정을 간직하니 ‘종묘’이고, 땅 위의 곡식으로부터 후천의 정을 얻으니 ‘사직’이다. 충만해야할 정기가 부족해지면 생명의 위협을 느껴 두려움이 솟아나는 것이다(『동의보감』 418쪽).


이 종묘사직을 움직이는 것은 심장이다. 심장이라는 군주가 신장이라는 국가를 운영한다고 할 수 있다. 종묘제례나 사직대제의 행사가 그래서 필요하다. 알튀세르라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고 했을 예식들이 이루어지는 곳이 신장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은유할 수 있다. 심장은 주권자, 신장은 국가(장치). 그리고 정기는 대중(혹은 대중의 힘)이다. 심장이라는 주권자는 신장이라는 종묘사직을 제례로 움직여 정기라는 대중들을 움직인다. 그러나 정기가 부족하면, 즉 대중들에게 생명력이 부족해지면 국가에 공포가 만연해진다. 국가가 혼돈에 빠지는 것이다. 


신장의 수기운은 공포를 주관한다. 신장이 약하면 작은 두려움에도 중심을 잃게 되고, 신장이 튼튼하면 성찰적 능력이 커지게 된다.



국가는 현대 정치 사상가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다. 프랑스 철학자,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1942~)의 스승 알튀세르는 국가가 사회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지만, 사회에는 여전히 국가의 영향을 벗어나는 어떤 것이 남아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국가가 사회 곳곳을 통제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프랑스공산당)도 근본적으로는 그곳에, 즉 국가 바깥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루이 알튀세르, 「로사나 로산다와의 대담:맑스주의 이론에서 국가문제」,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 83쪽). 그러므로 당을 국가로부터 분리해서 국가 바깥에 있는 대중들에게 이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당은 곧 사멸할 국가를 통치하는 목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당을 위치시키려고 한다. 마치 신체에서 신장 없이 정기가 움직이거나 보관되기를 바라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다르게 접근한다. 그는 헤겔과 스피노자의 국가론을 재해석한다. 오히려 국가가 그 아래에 있는 여러 공동체들을 다루어야 개인의 자유가 확보된다. 즉, 개인의 자유를 위해 여러 공동체들을 조정하는 상위의 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국가는 여러 공동체들을 잠재적으로 해체하고 매번 재구성하는 ‘부정의 부정’의 운동을 하면서 헤게모니를 확보한다. 이 헤게모니로부터 각각의 공동체들이 위계가 정해진다. 이렇게 되면 개인들은 일차 소속집단(가족, 회사, 교회 등)에서 상대적으로 분리하여(잠재적으로 해체) 이차 소속집단(즉 국가)에 귀속시킬 수 있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개인의 유희(각각의 공동체들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유희)가 가능해진다. 국가의 헤게모니 때문에 각 공동체가 자기 마음대로 힘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보다 민주적으로 작동시키려면 다중들(multitudes)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가로 하여금 자신들의 존엄을 인정하게 만들고 ‘시민인륜’의 규범을 도입하도록 강제하는 ‘아래로부터의 시민인륜의 정치’가 가능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사유되는 것이 바로 스피노자에 의해 제시된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다.


“대중들의 공포”...그것은 대중들이 느끼는 공포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들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이기도 하다.....이러한 공포는 공황상태에까지 이를 수도 있고 합리적으로 완화될 수도 있지만 결코 순수하고 단순하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상호 공포에서 문제는 어떻게 이 공포가 균형 잡힐 수가 있는지, 그리하여 그것이 어떻게 (사랑, 경탄, 헌신의 힘들과 또한 합리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공통의 유용성의 힘들에 이르기까지) 더 건설적인 다른 힘들에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는지, 아니면 정반대로 그것이 어떻게 사회체가 와해되도록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지속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대중들은 그들이 겪는 자연적 힘들이나 폭력에 의해 공포에 질리면 질릴수록 더욱 무섭고 통제불가능하게 되며, 역으로 국가의 폭력은 사실 폭정적 권력이 대중들 앞에서 무장해제 당한 것처럼 은밀히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 과도해진다.

-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78~79쪽


국가는 우리들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이를 어찌해야할지 모른다. 그만큼 국가는 우리들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국가가 실제로 작동되고 있다면, 그것을 통치자의 마음대로 놔두면 안 될 것이다. ‘대중들의 공포’는 바로 그런 때 작동한다. 대중들의 생명력을 약화시키면 대중들은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그럴수록 대중들은 통제불가능한 힘으로 출현한다. 통치자는 이 공포로부터 대중들에 대해 공포를 느끼게 되어 자신의 힘을 조절하게 된다. 대중들의 공포가 대중들에 대한 공포로 바뀌는 것이다. 그순간 힘은 균형을 이룬다.


동지는 자월(子月)이라 주역 괘로는 지뢰복(地雷復)이다. 6괘 중 위 5괘는 음괘이지만, 맨 아래 땅에 가까운 괘는 양괘다. 추운 겨울이 지극해졌지만, 바로 그 순간 양기 하나가 땅에서 싹을 튼다. 음이 극해지니 양이 생성된 것이다. ‘대중들의 공포’는 바로 그런 힘의 균형추이면서 힘의 전환을 암시하는 일양(一陽)이다. 최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도 이 공포를 자극할지 모를 일이다. 신장에 정기가 극히 부족해지면 생명력이 떨어지면서 공포가 신체를 휘감는 것처럼, 그래서 이판사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대중들처럼.


글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대중들의 공포 - 10점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최원.서관모 옮김/비(도서출판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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