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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좋은 것은 끝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은 좋은 것이라네"

by 북드라망 2015. 3. 4.


약선생의 철학관을 끝내며

돌연한 출발




프란츠 카프카의 글에 「돌연한 출발」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하인에게 명령하는 걸로 봐선 주인공인 ‘나’는 귀족일 것입니다. 큰 성에서 편안히 지내던 귀족은 어느 날 하인에게 마구간에서 말을 끌어내 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먼 데서 트럼펫 소리가 울려오기도 하지요. 아마 저 멀리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릅니다. 혹은 축제일지도요. 그러나 하인은 주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심지어 트럼펫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죠. 그도 그럴 것이 주인님은 항상 정해진 때, 정해진 목표가 있을 때만 말을 찾았거든요. 그러나 지금은 전혀 영문을 모르는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인이 묻습니다. “어딜 가시나이까? 주인나리” 당연히 하인은 주인이 어딜 가는지 물어야 했습니다. 목표에 따라서 하인이 준비해야 할 것도 달라질 테니까요. 그러나 주인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모른다.”




3년 전 <약선생의 철학관>을 처음 시작했을 때, 저는 바로 저 하인과 같았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말을 끌어내야 하는 하인. 아마도 주인은 이 블로그에 접속해서 제 글을 들여다보는 ‘독자님’들일 테지요. 저는 마구간에서 주인 마음에 들 이런 저런 말들을 끌어내 보았습니다. 그러나 철학관에 글을 올리는 일은 대중지성 프로그램에서 에세이를 발표하는 것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기존에 썼던 글이라도, 철학관에 올릴 때는 다시 전체를 고쳐야 했습니다. 매주 혹은 격주로 글들을 제 마구간에서 끌어내 올렸습니다. 그것은 제 힘을 훌쩍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저에겐 아주 흥미로운 심부름이었습니다. 저의 글이 북드라망의 아름다운 편집에 힘입어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는 게 참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사건이었죠. 독자님들의 댓글에 답변을 다는 것도 아주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간혹 회사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답변하는 순간만큼은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리는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시즌2에서 철학과 동의보감을 연결해보는 작업은 정말이지 저에겐 멋진 시도였습니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성서 안에 있는 모순된 이야기들을 서로 연결시키려고 성서 주석을 단다고 합니다. 카렌 암스트롱의 말에 따르면 그런 주석들은 ‘신적인 일치’를 획득하려는 영적훈련이었다고 하는군요. 모순된 것들을 서로 일치시키는 작업을 하면 신적인 일치를 가능케 하는 직관을 획득하여, 주석자 자신이 한층 더 영적으로 고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학문적 업적은 부차적인 것이죠. 들뢰즈도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혁명적인 존재가 되려면 수많은 소수적 요소들을 이용하고, 연결 접속시키고 결합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결합을 통해서라야 우리는 자율적이고 돌발적이고 특수한 생성을 발명하게 된다고 하지요(그런 의미에서 모든 주석 작업은 소수적이어야 합니다!).


시즌2는 일종의 그런 훈련이었습니다. 동의보감의 한 챕터(이것을 동의보감에서는 ‘문(門)’이라고 합니다)와 어떤 철학자의 책 한 권을 연결해서 글을 써보았습니다. 동의보감이 5편 106문이니, 106명의 철학자, 106권의 철학책을 동의보감의 각 부문들과 연결시키는 훈련이지요. 한동안 이런 작업에 고무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보니 20명의 철학자들이 동의보감 위에 자박자박 잠겨 있더군요. 가라타니 고진, 장 자크 루소, 에티엔 발리바르, 존 듀이, 파스칼, 존 스튜어트 밀, 막스 베버, 프랑스와 줄리앙, 쇼펜하우어, 비트겐슈타인, 데이비드 흄 등등 북드라망 블로그가 아니라면 도저히 저 혼자서는 읽을 수 없는 책들을 읽고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공부였습니다. 저는 이 글쓰기와 더불어 나름의 영적 고양을 얻었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약선생님 덕분에 이 학자들과 동의보감을 연결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홍루몽』에 이런 말이 있지요. “좋은 것은 끝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은 좋은 것이라네.” 작년에 책을 낸 이후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공부, 저의 성찰, 저의 문체 모두를 다시 검토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오진 않았는지, 그래서 제가 비판하는 지식상인들의 그것처럼 제 글도 지식만 듬뿍 발라 놓은 별 쓸모없는 글이 되고 만 것은 아닌지 하고요. 이런 저런 고민 끝에 저는 이제 새로운 공부, 새로운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바로 철학관 문을 닫는 것이 『홍루몽』에서 말하는 그 ‘좋은 끝’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여기까지가 <약선생의 철학관>이 가진 운명이 아닐는지요. 물론 철학과 동의보감을 연결하는 작업은 혼자서라도 계속 해 나갈 생각입니다. 아마 저는 그 작업을 북드라망 블로그의 아름다운 편집 없이 오로지 ‘자기통치’에 의해 제 스스로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 결과를 가지고 독자들과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다시 카프카의 「돌연한 출발」로 돌아가 봅니다. 어딜 가냐는 하인의 질문에 주인은 모른다고 대답해 놓고는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냥 여기를 떠나 내처 간다. 그래야만 나의 목표에 다다를 수 있노라” 이런 말에 하인이 염려하며 다시 묻습니다. “나리께서는 양식도 준비하지 않으셨는데요.” 오래 모시던 주인이 양식도 없이 먼 길을 떠나려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웠던 거죠. 주인이 대답합니다. “여행이 워낙 길 터이니 도중에 무얼 얻지 못한다면, 나는 필경 굶어죽고 말 것이다.” 조그만 양식 따위 준비해봐야 금방 사라지고 없어질 것입니다. 어차피 먼 길이니 길에서 양식을 얻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제가 홀로 그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너무 북드라망 블로그의 아름다움에 의존하여 살아왔나 봅니다. 블로그의 이곳저곳을 보니, 글들 모두가 마치 벚나무에 만개한 수천 개의 눈들처럼 예쁩니다. 눈부신 이 아름다움에서 떠나야 한다는 게 무척이나 슬픈 일이지만, 이제 제 글을 홀로 따져 봐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저는 하인이 아니라 주인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아니, 제가 지금 길 떠나는 주인이 된 듯합니다. 고맙게도 북드라망 블로그와 제 글을 읽어 주신 분들이 이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에서야 깨달았습니다. 지난 3년간 철학관에 글을 쓰는 것은 제 자신을 하인에서 주인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다는 것을요. 어쩌면 이것이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저만의 '돌연한 출발'일지 모르겠네요. 언젠가 여러분의 새로운 필경사로 꼭 다시 돌아오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변신.시골의사 - 10점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민음사
자기배려의 인문학 - 10점
강민혁 지음/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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