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니체-언어
신체가 되어버린 기계, 언어
나는 개인적으로 스마트폰의 두께가 얇아지는 걸 아주 흥미롭게 지켜보는 사람이다. 그것은 우리 피부만큼이나 얇아질 것이다. 아니, 아마 그것은 우리 신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기계인간의 신체 말이다. 사실 지금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다니는 시간보다 들고 다니는 시간이 더 많은 걸 보면 그것은 이미 우리들의 신체가 아닌가 싶다. 안경 없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렇게 보면 신체란 계속 만들어지고 바뀌는 것 같다.
스마트폰은 이제 생활 필수품이 되었다. 이정도면 '신체'의 일부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니체는 흔히 ‘영원회귀의 철학자’로 불린다. 물론 영원회귀를 빼고서 그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에 못지않게 ‘신체의 철학자’로 불러야 한다. 니체는 깨달은 자의 입을 빌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심지어 영혼이라는 것도 신체에 있는 어떤 것에 붙인 말이라고 덧붙인다. 다시 말하면 영혼도 신체의 생리적 요소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즉, 그것은 생리적 물질인 것이다. 어쩌면 신체는 다수의 살아 있는 존재들의 활동 공간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는 아주 독특한 “신체-철학자”이다. 다음과 같은 말도 이어진다.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 떼이자 목자이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7, 51쪽
여기서 신체는 우리가 흔히 아는 육체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신체는 육체를 포함해서 다양한 존재들이 뒤섞여 구성된 결합체다. 여러 존재들이 어떤 힘 아래 모여 통일체로 움직인다. 니체는 이 통일체를 움직이는 것을 ‘자기’(das Selbst)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주체’라는 개념과도 아주 다르다. 그는 이 ‘자기’가 움직이는 통일체를 ‘신체’라고, 또 ‘커다란 이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수많은 존재들을 움직여 나간다는 점에서 신체 자체가 하나의 ‘극복’이다. 왜냐하면 신체라는 공간에 모인 여러 요소들이 각자의 요소적 한계를 넘어서 “신체”라는 새로운 통일체로 움직여 나가니 말이다.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고 “아무리 감탄해도 끝이 없다”(니체 유고 1884~1885)
그래서 니체에게는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것들이 신체적이다. 감정조차 오장육부의 현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의학적인 사유는 니체적인 것들과 공명한다. 한의학적 사유에는 신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신적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언어조차 우리의 신체라고 여길 정도다. 그래서 『동의보감』은 언어를 “내경편” 즉 ‘몸 안의 풍경’에다 배치해 놓았다. 언어는 신체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한의학에서 언어는 음성언어를 지칭한다. 그 범위는 매우 광범위해서, 신체의 오장육부가 내는 소리 모두를 가리킨다. 일단 폐가 신체의 모든 소리를 주관한다[肺主聲](『동의보감』, 법인문화사, 344쪽). 그 소리가 간을 통하면 고함소리가 되고, 심장을 통하면 헛소리가, 비장을 통하면 노랫소리가, 신장을 통하면 신음소리가, 폐 자체를 통하면 울음소리가 된다. 이른바 ‘말’은 신체가 내놓는 소리-물질인 것이다. 폐가 이런 소리들을 주관하는데, 그 소리가 심(心)에 들어가면 우리가 흔이 아는 ‘말’이 된다. 그렇게 보면 심(心)에 신(神)이 넉넉하여 새나오는 웃음소리, 비장이 음악을 좋아하여[脾好音樂] 만드는 노랫소리, 슬픈 폐가 만드는 울음소리, 정을 보관하고 피로를 관장하는 신장이 내는 신음소리, 모두가 한의학적으로는 ‘언어’다. 심지어 양과 음이 서로 끌어당기다 터지는 ‘하품’[欠=하품 흠]도 언어다. 재채기도 콧속이 가려워 신체의 기운이 뿜어져 나온 언어다. ‘트림’도 위에 가득했던 기를 토해내는 언어이고, ‘한숨’조차 근심으로 움츠러든 기도를 풀어주기 위해 신체가 내지르는 언어다. 신체 곳곳에 언어가 숨어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한 병증은 크게 세 가지다. 흔히 ‘헛소리’라고 해서 조리 없이 떠들거나, 생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해대는 ‘섬어(譫語)’,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는 ‘정성(鄭聲)’, 벙어리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 ‘음부득어(瘖不得語)’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모두 기력이 상실하여 발생한다. 우리는 “고열에 들뜨면 헛소리가 나온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사열(邪熱)이 신명(神明)을 흩트려서 발생한 것이다. ‘정성’(여기서 ‘鄭’은 ‘중복되다’는 의미다)도 술 취한 사람이나 말 많은 노인네들이 했던 말을 또 하는 경우를 말하는데, 이것도 기력이 상실해서 생긴다. 그래서 동의보감은 “말을 적게 해서 속에 있는 기운을 자양하라(小言語 養內氣)”(『동의보감』, 법인문화사, 349쪽)고 강조한다. 저녁 이후에는 소리 내어 읽지 말고, 음식 먹을 때는 말을 하지 말며, 누워서도 말을 크게 하지 말고(오장은 종과 같아서 매달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길을 가면서도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언어의 신체성을 깊이 인식하여 내린 처방이다. 언어의 문제는 신체의 기력을 콘트롤해야만 풀린다는 뜻이다.
언어도 스마트폰처럼 우리 신체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수많은 존재들 중의 하나로 여러 사물들 틈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스마트폰처럼 사람의 신체에 붙어 신체의 일부분이 되고, 드디어 다른 신체 요소들과 공명하게 되지 않았을까? 언어는 신체가 되어버린 기계다. 웃음은 심과, 울음은 폐와, 노래는 비장과 서로 공생하며 신체가 되어버린 언어-기계들이다. 따라서 언어를 바꾼다는 말은 신체를 바꾼다는 말과 같다. 언어의 배치를 바꾸는 것은 이 의미에서 내 신체를 변형시키는 문제이고, 분명히 건강의 문제인 것이다.
글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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