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남인 백수 2세대 : 혜환 이용휴] ⑤ 목민 정치를 당부하다



친구들에게 전하는 일상의 정치학





1. 글로 하는 정치! 


혜환 이용휴는 천상 문장가로 살았지만, 그는 늘 정치적이었고 언제나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다. 정계 진출을 꿈꾼 적도 없고, 현실정치에 대해 발언한 적도 없는 혜환을 정치에 참여했다고 말하면 상당히 모순되지만, 그의 글을 읽어 보면 정치적이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혜환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정치에 참여했다. 혜환은 문장가의 입장에서 ‘글로 정치’를 했다. 혜환의 방식은 경세가인 숙부 성호 이익처럼 정치, 사회, 경제 분야에서의 제도 개선이나 행정 개혁을 직접 논의하는 것과는 달랐다. 혜환은 ‘목민(牧民)의 정치학’을 간접적으로 실천했다. 혜환 자신이 목민관으로 재직한 바 없지만, 지방 수령이나 현감을 제수 받아 떠나는 친구들에게 아주 간절하게 ‘목민’의 정치를 당부함으로써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를 실천했다. 



2. ‘목민관’에 대한 새로운 발견!


혜환 이용휴는 멀리 떠나는 친구들을 전송할 때 주는 ‘서문(序文)’ 형식의 글을 많이 썼는데, 이 중 대다수는 지방관으로 임명된 친구들에게 준 것이었다. 예전에 사대부들은 친지나 친구가 타지로 떠나갈 때 보통 전별연(餞別宴)을 마련하여 서로 시를 주고받으면서 이별의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전별연에서 주고받은 글을 모아 시집을 내면서 여기에 머리말을 붙이는데, 그 머리글을 서문이라 일컬었다. 전별연 시집의 서문은 책의 머리말이기는 하지만 주로 이별의 안타까움과 함께 덕담이나 당부의 말을 담아서 건네는 형식의 글이다. 이 송별의 서문은 시와 상관없이 독자적인 글로 전달되는 경우도 많았다. 


혜환은 낙척한 남인의 후예이고 백수 선비였던지라 지인들이 중앙의 요직이 아니라 지방 외직을 맡아 떠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실제로 혜환의 지인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이는 채제공 한 사람 뿐이었던 듯하다. 사실 18세기 남인들을 통틀어 채제공만큼 요직에서 승승장구한 사람은 없었다. 혜환의 글에도 채제공을 전송하며 쓴 서문이 있는데, 이때 채제공은 나름 ‘지극히 존귀한 지위’(「채사도가 관서의 관찰사로 나가는 것을 전송하는 서문(送蔡司徒出按關西序)」,『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 』)인 관서지방의 방백을 임명받아 떠나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서문의 주인공들은 작은 마을의 수령이나 현감을 제수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혜환과 그의 지인들이 실제로 체감하고 실현할 수 있는 정치의 현장은 중앙 조정이 아니라 지방의 고을이었다. 국가 전체의 정치와 행정을 관리하는 중앙 관직은 이들과 관계가 멀었다. 이들에게 주어진 자리는 백성들의 생활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리해야 하는 지방 수령이 거의 전부였다. 



지방 수령은 원칙대로 말하자면 ‘목민관’이지만, 현실적으로 바라보면 지방 한직에 불과한 자리였다. 그러니 지방직을 제수 받아 떠나는 사람은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작은 마을의 수령에 임용된 경우는 더욱 심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마지못해 가는 사람들도 허다했다. 돈 없고 줄 없는 혜환의 지인들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은 이렇게 작은 관직에 불과했다. 


그러니 지방으로 떠나는 이들을 전송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지방 관리로서의 장도(長途)를 마냥 축하할 수 있는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혜환은 다르게 반응했다. 지방 수령의 본래 의미를 상기함으로써 수령을 한직이라 여기는 사람들에게 시원하게 하이킥을 날렸다.    


국내의 고을이 모두 330개인데, 고을마다 각기 수령이 있다. 이 330인은 대개 현명한 임금이 재주를 인정하여 백성과 사직을 맡긴 사람들이다. 내 친구 정기백(丁器伯)은 알성시에서 선발되어 오산(烏山)의 수령직을 얻었다. 오산(烏山)은 서울과의 거리가 800리나 된다. 서울은 비유하면 해와 같으니, 해와 가까운 곳은 쉽게 따뜻해지고 쉽게 밝아진다. 만일 먼 곳이라면 모름지기 햇살의 따뜻함과 촛불의 밝은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니, 자네는 힘써야 할 것이다. 

또, 수령을 두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하고자 하는 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백, 수천의 가호(家戶)로 자기 배만 채울 뿐이니 어찌 옳겠는가? 『재상수령합주(宰相守令合宙)』는 세상을 다스리는 책인데, 자네는 일찍이 읽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을 읽어 보면, 그 정신과 기맥이 서로 통하고 관련되어 다스려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령은 더욱 중요하고 더욱 친근한 것이니 벼슬이 낮고 봉급이 박하다고 해서 스스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아! 남한테 한 광주리의 누에를 받더라도 잘 기르면서 오직 그것이 잘못될까 두려워하는 것이거늘, 하물며 어린 자식 같은 백성들임에랴? 그대는 모름지기, 한결같이 바른 도리만을 따르고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개입시키지 말라! 백성들은 백성의 본분으로 돌아가게 하고, 아전은 아전의 본분으로 돌아가게 하며, 관리는 관리의 본분으로 돌아가게 해서, 정사가 잘 이루어졌다고 조정에 보고 하도록 하라. 

-「정사군이 오성의 임지로 가는 것을 전송하는 서문(送丁使君之任烏城序), 같은 책211-212쪽 


이 서문의 주인공 정기백은 다산 정약용의 아버지인 정재원(1730-1792)이다. 정재원은 수령으로 임명받아 서울에서 800리나 떨어진 오산으로 부임하려는 참이다. 혜환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정재원에게 수령의 의미를 상기시키며 백성을 위해 제대로 일할 것을 주문했다. 수령은 임금이 직접 다스릴 수 없는 곳을 대신해서 다스리기 위해 마련한 직책이다. 임금의 은택을 두루 미치게 하는 전령사가 바로 수령인 것이다. 수령이 있어야만 먼 곳의 백성들도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가 있다. 마치 “한 고을이 한 나라에 대한 관계는 한 혈맥(血脈)이 한 몸에 대한 것과 같아서 비록 매우 미세하지만 한 혈맥에 병이 들게 되면 한 몸이 편안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한 고을의 수령은 한 국가의 임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정치를 한미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혜환은 자신과 친구들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을 인정하면서 능동적으로 받아들였다. 자신들의 처지로는 군주 옆에 설 수 없고, 중앙 정치를 담당할 수도 없다는 사실. 그렇다면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갈 수 없는 중심을 향해 돌진해야 하는 것일까? 혜환은 생각을 바꿨다. 수령과 현감은 낮은 직책이지만 백성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애민이 선비의 정치라면, 애민이 이루어지는 현장은 바로 한 마을의 관아다. 그 현장에서 애민을 성실하게 실행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정치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친구 안정복이 목천의 현감으로 임명되자 혜환은 경세제민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마음으로 계획하고 붓으로 그리던 정치를 실제적이고 직접적으로 펼칠 수 있는 시험대가 바로 현감이라는 자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마을이 작든 크든 경세제민을 실현하는 무대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내직과 외직을 구분하고 관직의 높고 낮음을 따질 필요는 없다. 어떤 자리에서든 머릿속에 그리던 것을 현실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밭을 갈고 쌀을 수확했으면 밥을 지어서 먹을 수 있게 하고, 고치를 켜고 옷감을 짰으면 실제 옷을 지어 입을 수 있게 하는 일이 중요하듯, 어떤 자리에서든 민생의 공용을 실현한다면 그것이 정치의 진수이다. 더 중요한 정치는 없다. 어떻게 정치를 실현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성주(聖主)께서 즉위하시자, 온갖 법도가 시행되었는데, 목민(牧民)이란 관직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셨다. 마침 충청도 목천(木川)의 수령이 결원이 되었는데, 관직을 구관하는 사람이 나의 친구 전직 익찬(翊贊)인 안씨(安氏)를 천거했다. 대저 목천(木川)이 자그마한 고을이기는 하나, 거인(巨人) 성안(成安)의 옛 땅이었으므로 다른 작은 고을과 비교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수령이 된 자 또한 감히 다른 작은 고을로써 취급하면 한 될 것이니, 그 정사도 마땅히 다른 작은 고을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나의 친구는 유학을 하는 사람이다. 그 학문은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경세제민[經濟]은 곧 더욱 익숙하게 강구(講求)한 것이었다. 그가 항상 마음으로 계획을 하고 붓으로 차기(箚記)하던 것을 이제야 시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곡식과 옷감에 비유하건대 예전에는 밭 갈고 씨 뿌리고 수확을 했다면 지금은 불을 때서 밥을 지어서 먹는 것이고, 예전에는 고치를 켜서 베틀에 올려 짰다면 지금은 마름질해서 옷을 만드는 것이니 공용(功用)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무릇 관리는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의 높고 낮음이 없으니, 오직 마음을 다해 임금께 보답함을 기약할 따름이다. 

 또 현재(縣宰)와 총재(冢宰) · 태재(太宰)가 그 명칭이 같으니 모두 재제(宰制)의 뜻이 있는 것으로 그 임무가 또한 가볍지 않다. 내 친구가 수레에서 내리거든 반드시 기녀와 해괴한 짓을 하는 것을 멈추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을 그만두며, 미세와 염세는 간략히 하고, 상서(庠序)를 돈독이 하면 백성이 마치 봄날의 화창한 기운을 느끼게 되어, 신음(呻吟)이 사라지고 몸이 즐겁게 될 것이다. 내 친구는 일찍이 우리 성호선생(星湖先生)을 스승으로 섬겼다. 선생의 도는 이 세상을 바로잡아 삼고(三古)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유적(遺籍, 성호문집)에 있다. 나의 친구가 받들어서 신명으로 여기는 바이니, 발휘하여 정령으로 삼아 실시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선비는 쓸 만하고 사문(師門)에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할 것이다.

-「안백순이 목천 현감으로 나가는 것을 전송하는 서문(送安百順出宰木川序)」, 같은 책 


정치가 군주의 옆에서, 중심에서만 이루어진다고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관념으로 하는 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자신들의 현장은 백성들과 마주하는 마을이었고, 자신들이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는 목민에 있음을 새롭게 발견했던 것이다. 혜환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민생을 실천하는 것이 진짜 정치라 생각했다. 지방 수령이 한직이지만 목민관의 역할을 다하면 그것이 정치였다.  



3. 일상의 정치


목민관으로서 어떻게 해야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혜환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참으로 시원시원하게 답을 했다. 백성의 삶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을 살리는 정치는 간결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위에서 친구 안정복에게 말한 것처럼 목민관의 역할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기녀를 멀리하고, 백성을 착취하지 않고, 쌀과 소금세를 가볍게 하고, 학교의 교육이 잘 이루어지면 목민관으로서 역할을 다한 것이었다. 혜환에게는 백성을 위한 방법 외에 더할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혜환에게 목민의 방법은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수령은 백성과 직접 만나 백성의 생활을 살리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조건에 딱 맞게 하면 되지, 어떤 경우에도 다 통하는 방법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목민을 잘 하기 위해 한 가지 기술은 갖춰야 한다. 백성들의 삶을 제대로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촉수는 필수다.    


신군(申君)이 이미 고흥(高興)에 임명을 받게 되자 이에 관리들로서 그 직무를 잘 이행한 사람의 일을 모아서 살펴보았다. 거처하기를 청렴 공평하게 하고 문아(文雅)를 숭상하는 것은 문옹(文翁)이 촉(蜀)을 다스린 것이었고, 탱자나무와 가시나무를 베고 곡물의 해충을 막은 것은 잠희(岑凞)가 위군(魏郡)을 다스린 것이었고, 다리와 도로를 완전히 수리하고 황무지를 개간한 것은 장희안(張希顔)이 평향(萍鄕)을 다스린 것이었고, 개가 밤에 짖지 않고 백성이 벼슬아치를 볼 수 없게 한 것은 유총(劉寵)이 회계(會稽)를 다스리는 것이었으며, 양주(楊州) 태수가 되었을 적에 관의 촛불을 사르지 아니 한 것은 파지(巴祗)였고, 단주(端州)를 맡았을 적에 하나의 벼루도 가지지 아니 한 것은 포증(包拯)이었으니 이는 모두 옛날의 선량한 군수로서 스승으로 삼을 만한 자들이었다. 비록 그러나 남의 발자취만 답습하면 옛것에 빠지는 것이다. 군의 생각은 스스로 닦고 몸소 실천하여 자신이 그 표준이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따라서 변화하게 하려고 하였다. 

 혜환거사는 말했다. “내가 백성들과 상대한다고 해도 오히려 간격이 있음에 속하여,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그들의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백성은 본래 착하니 성나게 하지 말고 스스로 즐기게 하라! 백성은 본래 신의가 있으니 속이지 말고 스스로 신의를 지키게 하라! 백성은 본래 부유하니 빼앗지 말고 스스로 잘살게 하라! 백성들은 본래 오래 사니 병들게 하지 말고 스스로 장수케 하라! (이렇게 하면) 내가 하는 것이 없어도 백성은 이미 다스려지게 된다. 이와 같이 하면 (내가) 다만 기꺼이 누워서 고고한 꽃을 대하거나 밝은 달을 구경하기만 하고 거문고도 수고롭게 타지 않게 될 것이다”

-「신선용이 고흥의 임지로 가는 것을 전송하는 서문(送申使君善用之任高興序)」


혜환의 정치는 닫혀 있지 않다. 목민관의 역할도 그때그때 다르다. 백성의 조건이 다른데 똑같은 정치가 행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목민관이 무능하다는 징표다. 신군이 고흥의 군수로 임명되어 떠날 때, 옛날의 선량한 군수들을 표준으로 삼고자 했다. 혜환이 보기에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방법을 표준으로 삼아 백성이 변하기를 바라는 방식이다. 여기서 거론한 모범이 되는 군수들은 자기 지역의 백성들에 맞는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선량한 군수가 된 것이다. 회계의 군수였던 유총이 했던 바, 밤에 개가 짖지 않게 하고 백성이 관리를 볼 수 없게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정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유총이 회계를 다스릴 때는 이 방법이 꼭 필요했을 뿐, 이것을 지금 현재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억지요, 폭압이다. 


그러니 백성들을 살리는 길은 내게 있지 않고, 백성들에게 그 근본이 있다. 그러므로 다스림의 표준을 가지고 백성을 대하면 백성은 다스려지지 않는다. 백성들 스스로 사는 길을 갖추고 있으니, 백성들의 생리를 감지하는 게 우선이다. 여기에 맞추면 백성들의 삶은 저절로 열린다. 혜환의 다스림은 노자의 무위에 가깝다. 인위가 아니라 백성들의 자연스러움에 결을 맞추는 다스림이라고 할 수 있다. 정해진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다스리는 경지가 최선의 다스림임을 아는 혜환은 진정 백성과 함께하는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음에 틀림없다.  


백성을 위해 이렇게 정치를 한다면 목민관이야말로 정치의 근본임에 틀림없다. 혜환은 더 중요하거나 더 큰 정치가 있다는 식의 헛된 꿈을 꾸지 말고, 현재 자기 자리에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바가 가장 좋은 정치라 생각했다. 


전생(前生)은 기억할 수 없고 내생(來生)은 알 수 없으니 다만 금생(今生)이 있을 뿐이다. 만일 금생을 한가롭게만 지낸다면 곧 헛된 삶이 되는 것이다. 어떡해야만 금생을 한가롭게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좋은 일[好事]를 행하여야 한다. 어떡해야 좋은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그 지위를 얻어야 한다. 무엇을 지위라 하는가? 공경(公卿), 대부(大夫)가 모두 지위이나 나라와 백성의 무거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읍재(邑宰)만이 그러하다.

표제인 조사고가 고창의 임지로 가는 것을 전송하는 서문(送表弟趙士固之任高敞序)」, 같은 책


이 생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오직 수령의 일이다. 게다가 국가와 백성의 무거움을 감당하는 존재는 오직 수령뿐이다. 하여, 한 고을을 잘 다스리면 천하의 재상도 될 수 있는 법! 혜환은 지방 수령밖에는 될 수 없는 모든 한미한 선비들에게 외쳤다. 봉급이 박하다, 직급이 낮다 탓하지 말고, 한 고을에서 백성을 위한 정치의 모든 것을 창안하라.  


혜환은 서문을 통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목민관에 딱 맞는 정치를 촉구했다. 이것이 포의의 선비 혜환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정치 참여 방법이었다. 혜환은 자신의 자리에서 실천 가능한 일을 고민했고 그 실현 방법을 탐구했다. 그리고 목민 그 이상은 말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혜환은 18세기에 선구적으로 목민관의 정치에 주목했다. 선비의 일상에서 펼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정치는 목민 외에는 달리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목민 정치에 대한 감각이 이렇게 달라졌기 때문에 마침내는 다산의 『목민심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혜환 이용휴 산문 전집 -上 - 10점
이용휴 지음, 조남권.박동욱 옮김/소명출판
혜환 이용휴 산문 전집 -下 - 10점
이용휴 지음, 조남권.박동욱 옮김/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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