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다리가 다섯개?
- 눈이란 그 밝음을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어떤 사람은 코를 부리라고 착각하고 다시 코끼리의 코를 찾았는데, 코가 이렇게 생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코끼리의 다리가 다섯 개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코끼리의 눈이 쥐와 같다고 하지만, 이는 대개 코와 어금니 사이에만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몸뚱이를 통틀어 가장 작은 놈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엉뚱한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 박지원 지음, 길진숙 풀어 읽음, 『낭송 열하일기』, 181쪽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 있지요.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그릇된 판단을 전부인 양 떠드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 기가 막히는 일은 눈 뜨고 당하는 일입니다. 위에 옮겨 놓은 저 문장을 보면 그렇습니다. 멀쩡히 눈 뜨고 코끼리를 보는데,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이다 보니 얼굴 가운데서부터 아래로 길게 뻗어 나온 것이 ‘코’라는 것을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걸 두고 ‘부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난리도 아닌 것입니다.
사람은 본 것만큼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것만큼 볼 수 있는 법인가 봅니다. 겪어 보질 않으면 멀쩡히 눈앞에 빤히 있어도 보이지가 않는 것이죠. 코끼리를 처음 본 사람이 코끼리의 ‘코’를 도저히 ‘코’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저럴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서 ‘코끼리’라고 검색하면 코끼리의 사진부터 시작해서, 생태, 진화적으로 인간과 몇 촌이나 떨어진 것인지까지 안 나오는 정보가 없습니다. 그럴까요? 한가지 안 나오는 것이 있죠. 코끼리의 마음입니다. 도저히 그것만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듣거나 읽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코끼리와 오랜 시간 함께 교감하여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해본 사람이 전해주는 말들을 들어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말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실제로 ‘느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에는 『열하일기』의 에피소드와 같은 일은 훨씬 적게 일어납니다. 말과 글로써 알 수 있는 것들이 예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잘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정보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만큼 보기 어렵고, 겪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은 예전보다 훨씬 삶에서 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검색만 해보면 줄줄이 정보가 딸려나오니까 그 사건에 대해서 모두 다 알았다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삶은 그렇게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늘 뒤통수를 칩니다. 겪어 보니 그게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는 그런 일들이, 사실 삶에는 적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모든 일을 다 겪어 보며 살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다만, 조금 겸손해질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 알 수도 없고, 다 겪어 볼 수도 없는 때에 취해야 할 태도는 겸손이 아닐까요. 그리고 겸손하기만 해도 많은 ‘오해’와 그로 인한 불통들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빨리 보고 듣고, 너무 빨리 판단하는 세상에 살다 보니, 조금 신중하게 생각하다 보면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그게 부리인지 다리인지 코인지도 모르고 일단 ‘부리’라고 치자, 또는 저게 부리가 아니면 뭐야, 세상에 딱 봐도 부리네 이러고 있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 『낭송 열하일기』에 또 좋은 문장이 있네요.
이로써 보자면, 눈이란 그 밝음을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오늘 요술을 구경하는 데도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한 것이 아니라 실은 구경꾼들이 스스로 속은 것일 뿐입니다.
― 같은 책, 194쪽
그래요. 저도 이제 연예인 스캔들 기사에 흥분하며 덮어놓고 욕하는 것부터 삼가 보려 합니다. 오래된 좋은 글들로부터 배우는 신중함과 겸손함과 더불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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