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막스 베버-구설(口舌)
새로운 생활양식이 세상을 바꾼다
아이들에게 고전을 읽으라고들 권한다. 그러나 실제 실행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입시에 맞춰진 스케줄을 피해 독서 시간을 만들어내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어찌어찌 귀한 시간을 만들어도 아이에게 고전을 읽는 동기를 부여하는 게 영 만만치는 않다. 딱히 시험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이걸 읽었다고 논술교재의 요령 좋은 기술을 따라잡을지도 의문이다. 설사 도움이 된다손 치더라도 그런 목적으로 고전을 읽히는 건 끔직한 일이다. 효과도 입증되지 않은 또 다른 억압을 행한 셈이 된다. 그럼 스스로 읽을 마음이 들 때 책을 집어 들라면 될까? 그러나 그 순간 아이는 홀가분하게(?) 책으로부터 멀어지기 마련이다. 물론 책을 읽게 되면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될지 모르지만, 그 즐거움을 알기 전에 그것을 알아가는 길이 보통 험난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독서를 시작하기 전에 독서의 즐거움을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일지 모르겠다.
"어쩌면 아이들의 독서 습관이라는 것도 언어의 가치를 분명히 알았을 때에야 가능한 새로운 생활양식일지 모른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자본주의를 분석할 때 품었던 딜레마와 질문도 그리 다르지 않다. 베버는 묻는다. 자본주의 체제(근대 자본주의)가 발전되기 전에 이미 ‘자본주의 정신’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베버는 자본주의가 중국에도, 인도에도, 바빌로니아에도, 심지어 고대와 중세에도 존재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에토스에 바탕을 둔 ‘합리적 자본주의’는 근대 자본주의뿐이다. 그것은 향락을 엄격히 억제하면서 돈 버는 것을 자기 목적으로 하는 정신이다. 즉, “직업적으로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길, 2010년, 89쪽)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신계에서는 사업가뿐 아니라 노동자들도 노동 자체가 절대적인 자기 목적인 양 여기고 일한다. 새로운 ‘직업’ 관념이 탄생한 것이다. 베버는 이런 관념 위에서라야 ‘합리적 자본주의’가 작동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근대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있기 전에 ‘자본주의 정신’이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베버는 이 정신의 젖줄로 칼뱅주의, 경건주의, 감리교와 같은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를 지목한다.
1917년 에른스트 톨러와 함께 있는 막스 베버
하지만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은 이른바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일컫는 것에 정면으로 적대적이었다. 즉, 교리상으로 비세속적인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프로테스탄티즘의 전매특허인 ‘금욕주의’가 ‘이윤추구’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었는지 쉽게 상상되진 않는다. 어떻게 말끔한 금욕주의가 냄새나고 얼굴 화끈거리는 이윤추구와 결합했을까? 하지만 기독교는 전투적으로 이를 돌파하였다. 뜻밖에도 칼뱅주의는 ‘예정론’을 통념과 다르게 구성함으로써 이를 해결한다. 인간 개개인의 구원은 하느님의 의지에 따라 미리 정해졌다. 따라서 교회에서 종교적 의식을 치른다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칼뱅의 놀라운 주장이 제기된다. 선택받은 자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구원에 대해 자기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서 부단한 ‘직업노동’이 필요하다고 가르쳐진다. 직업노동만이 종교적 회의(懷疑)를 씻고 은총의 확실성을 제공한다는 말이다. 마침내 칼뱅주의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전환을 이룬다.
“그런데 이것이 실천적 차원에서 의미하는 바는 근본적으로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칼뱅주의자들은, 실제로도 종종 표현되고 있는 대로, 자신의 구원 – 정확히는 구원의 확실성이라고 해야 하지만 –을 스스로 ‘창조한다’는 것이며, 그러나 이러한 창조는 가톨릭에서처럼 개별적인 공로를 하나씩 쌓아감으로써가 아니라, 매 순간 선택되었는가 아니면 버림받았는가의 냉혹한 양자택일에 직면해 행해지는 체계적인 자기통제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일상인의 윤리적 실천은 무계획적이고 비체계적인 성격을 벗어나 생활양식 전체를 일관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형성하게 되었다” (강조는 막스 베버)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길, 2010년, 198~202쪽
이 ‘행위구원주의’는 완전히 새로운 생활양식을 만든다. 성도들의 삶은 오로지 초월적인 구원에 지향되어 있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세적 과정이 철저히 합리화된다. 자본주의의 합리주의는 이미 구원을 향한 생활양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서구 사회의 근대 자본주의는 이런 생활양식과 결합함으로써 탄생할 수 있었다. 중국이나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맛을 내는 자본주의로 말이다. 내적 생활양식의 변화가 외부에서 도래하는 자본주의를 다르게 변화시킨 것이다. 동네 골목길 국숫집에 불과했던 자본주의가 대형 패밀리 레스토랑의 자본주의로 뒤바뀐 순간이다. 이렇게 체제는 내부의 정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식사 때마다 매번 느끼는 입맛도 그렇다. 찾아먹는 음식은 똑같지만 그때그때의 신체 상태에 따라서 맛은 달라진다. 한의학적으로 혀는 심(心), 입술은 비(脾)에 통한다. 심의 경맥은 혀뿌리에, 비의 낙맥은 혀의 양쪽에, 간의 경맥은 생식기를 돌아 혀 밑에 연결되어 있고, 신의 진액은 혀끝에서 나와 오장에 분포된다. 입과 혀가 이미 내부의 장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심, 간, 신의 경맥에 사기가 침범하면 혀가 말려들어 말을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또 입에서 냄새가 나는 구취(口臭)도 위에 열이 있어서다.
입맛이란 장부의 상태에 따라 변하는 양태다!
우리가 음식 맛을 ‘알게’ 되는 것도 이런 구조에서 비롯된다. 심기가 혀와 통하기 때문에 오미를 알 수 있고, 비기는 입과 통하기 때문에 오곡의 맛을 알 수 있다(『동의보감』 外形篇 第二 口舌 678쪽). 그러나 신체가 변하면 입맛도 변한다. 심에 열이 있으면 입맛이 쓰고, 비에 열이 있으면 달고, 간에 열이 있으면 시고, 폐에 열이 있으면 맵고, 신에 열이 있으면 짜다. 입맛이 쓰고, 헐었는데 엉뚱하게도 양격산(凉膈散)을 써서 가슴(膈)을 차갑게(凉)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입맛이란 장부의 상태에 따라 변하는 양태다.
어쩌면 아이들의 독서 습관이라는 것도 언어의 가치를 분명히 알았을 때에야 가능한 새로운 생활양식일지 모른다. 심이 알아야 맛도 안다. 담론에 의해 자신의 생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야 독서라는 작업이 진지해진다. 서구 근대 일상인들이 구원을 확신하는 수단으로 직업을 인식했을 때에야 진지한 노동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담론양식으로는 도무지 자신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야 스스로 찾아서 새로운 글을 읽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생각도 든다. 근대 자본주의로 진입하는데 프로테스탄티즘의 생활양식이 큰 역할을 했다면, 이제 거꾸로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지금의 생활양식을 바꾸면서 가능할 것이다. 오장육부를 고쳐야 입맛이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 힘겹게 이루었던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적의 투쟁을 거꾸로 교사로 삼아야 한다. 종교개혁의 힘겨운 투쟁은 이런 의미에서 교육적 가치가 빛난다.
글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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