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힘-아치(牙齒)-프랑수아 줄리앙
세(勢) : 용이 올라탄 구름
용이 나오는 그림책을 들고 아들 녀석이 한 시간째 뒹굴고 있다. 풀어야 할 수학 문제도 있고, 시간 맞춰 써야 할 일기도 있을 텐데, 아이는 전혀 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내가 이례적으로 나섰다. 얘야, 엄마가 뭐라 그러기 전에 알아서 움직여라. 아이는 소파에 여전히 틀어박힌 채, 아빠, 이 그림책 보고요,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뭐, 내가 아이에게 꾸짖으려 말을 건넨 게 아니라서 가만히 나뒀다.
그런데 어깨너머 그림책에 나오는 용 그림이 정말 역동적이다. 용이 그림책 양면을 모두 차지하고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림책을 뚫고 나갈 기세다. 저런 그림을 보고 있는데 공부하라는 내 말이 들리겠는가. 나마저 그 기운에 사로잡혀 소파에 같이 파묻혔다. 둘이 황홀하게 이 페이지 저 페이지를 보면서 함께 상념에 빠진다.
브라운관을 뚫을 기세~
하지만 상념은 오래지 않아 깨졌다. 아내가 거실로 나온 것이다. 아내가 소파에 가까이 오더니, 풀라는 문제는 다 풀었니, 지금 몇 시간째니, 당신은 대체 뭐하는 사람이냐,며 퉁을 준다. 그래도 우리는 요지부동이다. 평생 땅 한 뙈기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소파가 우리 땅이다. 전쟁을 불사할 태도로 그림책과 소파를 고수한다. 이대로 가면 한 바탕 요란한 싸움이 진행될 참이다. '엄마'는 '용-그림-아이-나' 대열과 일촉즉발의 전쟁을 준비 중이다.
프랑수아 줄리앙(1951~)
프랑수아 줄리앙(Francois Jullien, 1951~)이라면 이런 상황을 손자병법의 ‘세(勢)’라는 개념으로 풀었을 것이다. 현명한 장군은 싸우기 전에 이긴다. 중국인에게 병법의 목표는 실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힘의 관계에서 나오는 경향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는 것에 있다. 어쩌면 싸우지 않는 것이 전쟁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일대일로 맞싸우는 결투를 최고로 쳤다. 즉 반드시 ‘완전한 승리 또는 완전한 패배’로 결말이 나는 정규전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에게는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을 때가 많다. 저절로 승리가 정해진 것처럼 상황을 만든다. 줄리앙에 따르면 ‘세’를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세(勢)’는 힘 또는 잠재력에 해당하는 중국어다. 사전에 세를 장악하여 상대가 그 세에 눌리면 자연스럽게 승리는 돌아온다. 잠재력이 현실을 움직인다. 이것이 바로 동아시아에서 말하는 ‘도(道)’다.
그것(도-인용자)은 사물의 성향이 사물의 고유한 배열에 따라 저절로 작용하도록 방임하는 것, 사물에 어떠한 인간적 가치나 욕망도 투사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 사물의 전개가 지닌 필연성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결코 주저하지도 않고 빗나가지도 않는, 그리고 ‘선택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가르쳐주어야만’하는 것도 아닌 방향 정립은 사물의 배열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물은 결코 ‘힘들여 고생하는 일’없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확실하게 특정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지닌다[趣物而不兩]
- 프랑수아 줄리앙, 『사물의 성향』, 박희영 옮김, 한울, 65쪽
사물의 배열에서 나오는 특정 방향으로의 성향이 바로 ‘세’다. 여기서 ‘세’는 알튀세르나 푸코가 말하는 ‘장치(dispositif)’와 다르지 않다. 세를 만들어 놓으면 자동적으로 작동하여 상대가 나에게 복종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세’는 어떤 조건 속에서 자동적으로 작동하여 상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힘이다. 장군은 이 장치의 스위치만 누르면 되는 것이다.
아내는 뜻밖의 것으로 이 장치를 작동시킨다. 아내는 이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며, 내 눈과 아이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빛도 형형하지만, 살짝 드러난 이로 보여주는 힘이 장관이다. 아내는 이가 참 튼튼한 여자다, 라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생각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설설 긴다. 아이가 소파에서 발딱 일어났다. 더 이상 그림책을 고수했다가는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배치가 ‘용-그림-아이’에서 ‘엄마-수학-아이’로 바뀌었다. 이 하나가 배치를 지배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가 권력 장치의 스위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뼈다. 즉 이는 뼈의 나머지인 것이다[齒者骨之餘](『동의보감』 외형편 牙齒, 693쪽). 그리고 신(腎)이 그 영양을 맡는다. 또 이는 숨이 드나드는 문호(門戶)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의 정기가 왕성하면 이가 튼튼하다. 치아가 튼튼해지고 약해지는 것도 신기에 달려 있다. 유치(幼齒)를 갈거나 진아(眞牙)가 자라는 것도 각각 신기가 왕성해지고 충만할 나이에 생긴다. 그만큼 이빨이 그 사람의 기가 충만한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신체 요소인 것이다. 아마 현명한 장군이라면 상대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단 한명을 전장에 내보내야 할 때, 필시 이빨이 튼튼한 놈을 골라 보낼 것이다. 충만한 신기로 상대의 기를 누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같았으면 이런 아이가 장군감~
그런 의미에서 이빨이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세를 조작하는 최고의 수단인지 모르겠다. 세란 사물과 사물 사이의 보이지 않는 뼈다. 이 ‘뼈-장치’를 움직이는 스위치가 이빨인 것이다. 적을 향해 ‘이를 간다’는 말은 싸우기 전에 아주 치밀한 장치를 만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가 만들어지면 싸움은 잉여다. 용은 구름을 타야만 위풍당당하게 하늘로 날아간다. 구름이 흩어지면 용은 지렁이나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나 대리석빛 구름이 튼튼하게 만들어지면 용은 훨훨 난다. 바로 그 구름이 이른바 ‘세(勢)’인 것이다. 아내는 이로 구름을 만든다. 그러고 보면 아내는 참 대단한 권력자인 셈이다. 아이와 내가 제 방으로 흩어진 후, 비로소 소파는 용선(龍船)이 되었다.
글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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