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을 왜 쓸까?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글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널리 이름을 알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런 기대가 허망하다는 걸 곧 알게 된다. 무엇보다 나에겐 그럴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겠지만, 글쓰기의 세계가 그런 희망에는 도무지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뒤늦게 깨닫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글을 쓰면 쓸수록 세상에 영향을 끼치거나, 이름을 알리는 것은 고사하고, 글쓰기만으로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렵다는 걸 알게 되면서 마음은 더욱 후회막급이 된다. 글도 세상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대체 글은 왜 쓸까?7
- 강민혁, 『자기배려의 인문학』, 244쪽
‘좋은 책’에는 ‘좋은 질문’이 있는 법이다. 그 질문이 꼭 ‘특별한’ 질문일 필요는 없다. ‘별난 맛을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이상한 병에 걸린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별난 것’이 늘 좋은 법은 아니니까. 다만, ‘평범한 질문’이 ‘좋은 질문’이 되기 위해서는 평범한 가운데서도 돌이켜 생각해 볼만한 질문이어야 한다. 책을 읽고, 읽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짧은 감상을 담아 메모를 하는 사람들, 이러한 ‘글’과 가까운 사람들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질문, ‘글은 왜 쓸까?’.
책이 품고 있는 질문에 대해서 저자는 저자 나름의 답을 달아둔다. 『자기배려의 인문학』엔 이런 답이 달려있다.
내가 보기에 글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역량을 착취하는 것들에 대한 사유의 빛나는 저항이며, 지금의 자유를 넘어서서 새로운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내 신체에 도사리고 있는 망상이라는 적들과 투쟁하는 ‘자유의 피투성이 전투’이다. 감상에 취해서 감동적으로 읊는 시 구절, 술 마시고 노래하며 사람들을 감동시키려고 쏟아내는 철학적 미문들, 자의식으로 넘치는 감상적 문장들, 살기 위해 그런 것들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오로지 글은 나를 다시 살게 할 뿐이다.
- 같은 책, 254쪽
이 답에 동감하지 못하는 독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반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답을 찾아내는 것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글을 왜 쓰는가 하는 질문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글이 ‘나를 다시 살게’하는 것이라는 답은 나쁘지 않은 답이다.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글을 왜 쓰는가?’ 살다보면 자존감이 무너지는 때도 있고, 작은 성공에 도취되어 멋모르고 날뛰는 때도 있으며, 욕심, 욕망에 휘둘려서 그릇된 결정을 하는 때도 있다. 그러저러한 무수한 일들이 첩첩이 쌓여서 ‘삶’을 이루는데, 나는 그것을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 그런 동기로 시작한 글은 충실하게 의도를 수행하지만, 글의 결론은 처음의 예상을 늘 빚나가 버린다. 그렇게 빚나간 예상으로 얻은 결론이 ‘다음 번’에 돌아오는 삶의 특정한 국면에 영향을 주고, 삶은 어쨌든 조금 더 나의 ‘마음’과 가까워진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그것이 ‘지금의 자유를 넘어’서는 ‘새로운 자유’가 아닐까? ‘마음’에 가깝게 삶을 구성하는 ‘글쓰기’, 글을 쓰고 있는 이 와중에도 그 생각을 하니 즐겁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즐거운 전투’일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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