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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씨앗문장] 오로지 쓴다는 것

by 북드라망 2014. 7. 18.


두려워하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쓴다



잃을 게 없는 자는 세 가지가 없다. 첫째, 두려움이 없고, 둘째, 희망이 없으며, 셋째, 절망이 없다. 루쉰이 그러지 않았는가. 절망은 허망하다고, 희망이 그러하듯이. 이옥은 쓰되, 절망하지는 않는다. 쓰되, 그걸로 무언가를 얻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냥 쓴다. 반성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쓴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최고의 저항이었으므로!

 - 채운,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북드라망, 2013, 31쪽


글로 쓰거나, 입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자신조차 의식하지 않고 있었던 인생의 신념 같은 게 있는 법이다. 나의 경우엔 그 신념이 와르르 무너지고 난 다음에야 그것이 있었던 것임을 알았다. 신념이 붕괴된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주장이나 의견을 담은 어떤 말도, 글도 쓸 수 없었다. 책을 읽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나에게 신념이 없는데, 남들의 신념이 온전히 읽힐 리가 없었다. 쓰고, 읽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허망할 따름. 그리 길지 않은 인생에서 처음 마주한 사태, 그것은 절망이었다. 그 시절 내가 하고, 썼던 모든 말과 글이 있다면 그것들은 ‘주장’이나 ‘의견’,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신념’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말했고, 살기 위해 썼을 뿐이다. 



말하지 않고, 쓰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쓰고 말할 수 없는 상태가 생존의 근거를 허무는 사태 속에서 ‘그냥 썼다’. 그러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무언가를 써야 했던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 안의 글쓰기가 새롭게 태어났음을. 글은 ‘신념’으로 쓰는 것이 아니었다. ‘신념’에 근거해서 나온 글은 거짓말이 되기 쉽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이옥의 글쓰기가 ‘최고의 저항’일 수 있는 이유를 예전에는 아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옥…… (애초에 가져본 적도 없는) 정치적인 영향력, 가능성을 모두 잃고 고향으로 내려가 글쓰기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 이 선비에게 무슨 ‘저항’이 있을 수 있을까? 


이옥은 벼슬길을 막은 왕(정조)에게 원한을 품지 않는다. 그 원한을 글로 남기지 않는다. 그때 온전히 느낀 감정을 가장 솔직하고 담담하게 글로 써내려 간다. 놓쳐 버린 입신(立身)의 기회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좋아하는 글쓰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른바 ‘신념’에 따른 ‘저항’을 담은 글을 써서 남기는 것보다, 그것을 작동시키는 자기 안에 그 어떤 원념도 남기지 않고서 글을 써나가는 것이 몇 배는 더 어려운 것임을. 글쓰기가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옥이 도달했던 바로 그 지점이 바로 자유의 공간임을. 


그리고 그냥 써나갔던 글쓰기는…… 끝이 시작임을 알려주었다. 여기가 끝이라고, 이제 어떤 글도 쓰기 어렵겠다고, 어떤 글도 읽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던 때, 새로운 읽기, 새로운 쓰기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 여기가 맨 앞 

이문재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 이문재,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2014, 142쪽


지금 여기가 맨 앞 - 10점
이문재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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