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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씨앗문장] 럭키 '루이'’와 『몸과 인문학』

by 북드라망 2014. 6. 30.

스투피드한 스마트폰 중독,

나는 왜 스마트폰에서 손을 놓지 못할까?!



일전에 페이스북에서 누군가 공유한 아주 흥미로운 영상을 보게 되었다. 딸의 무용회(?)에서 본 "충격적인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스탠딩 코미디의 일부였다.


이 코미디언은 <럭키 루이>라는 시트콤으로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루이스 C.K.이다. 수위가 높고 날카로운 풍자와 유머로 미국에서 인기가 높다고 한다.



딸의 무용회에 다녀온 코미디언은 그곳에 온 부모들이 촬영을 위해 춤추는 아이들을 직접 보는 대신, 작은 저화질의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아이들을 보고 있다고 조롱하며 이야기한다. 그렇게 찍은 영상을 다시 보지도 않을 거면서 왜 찍고 있느냐고, 실제로 춤출 때도 보지 않았는데 찍은 것을 다시 보겠느냐며 말이다. 그렇게 '아무도 보지 않을' 순간을 SNS에 올리기 위해 왜 직접 바라보지 않느냐며. 스마트폰을 치우고 그 순간을 직접 보라고 말한다.

며칠 전에는 같은 코미디언의 다른 토크쇼가 SNS에 떴다.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사주지 말라며 하는 말이다. 이번에 하는 말의 결론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찾아오는 공허함을 느끼기 싫어서 스마트폰, 야동, 음식으로 그것들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짧은 순간의 외로움이 너무 힘들어서 목숨을 걸고 (운전 중에) 문자를 보낸다는 것, "지금 뭐해?" 라고 말이다.


애석하게도 이 영상은 유투브에서 찾아보셔도 자막이 없습니다만, “루이스 c.k. 스마트폰”을 키워드로 검색하시면 자막이 달린 스크린샷을 볼 수 있습니다요~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은 온종일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지하철에서도, 거리에서도, 혹은 잠들면서도 스마트폰이 쏟아내는 정보들의 바다를 헤엄치느라 익사하기 직전이다. 가히 오매불고, 주야불고, 생사불고(?)의 경지다. 이쯤 되면 헷갈리기 시작한다. 사람이 스마트폰을 쓰는 건지 스마트폰이 사람을 부리고 있는 건지

- 고미숙 『몸과 인문학』 12-14쪽


위 코미디언의 말대로 외로움을 밀어내고 싶어서든, 아무도 보지 않을 순간을 SNS에 올리기 위해서든 사람들은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는다. 나조차도 혼자 집에 가는 길에는 항상 음악을 듣고,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는지 검색을 해본다. 한시도 가만히,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이 없다. 가끔 스마트폰 배터리가 떨어져 뭔가 듣고 있지 않을 때면, 조용한 시간을 견디는 것이 너무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조용한 시간에 들이닥치는 수많은 생각들, 상념들, 부끄러움이나 외로움 같은 것들, 자기비하와 좌절감 같은 것들까지,

손가락으로 몇 번 터치하면 신나고 비장한 음악이 흐르고, 엄청난 양의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함께 시간을 보내던 친구도 스마트폰 안에 있고 손가락 몇 번이면 그들의 일상을 바라볼 수 있다.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외울 필요도 없고, 어디 가는 길 역시 외울 필요가 없다. 검색기능을 통하면 궁금한 모든 일들에 답을 얻을 수 있다. 구독기능을 활용하면 찾아보지 않아도 내가 좋아할 만한 정보들이 손안에 들어온다. 기쁘고 즐겁기만 한 그 시간 동안에는 정념을 조우할 필요가 없다. 분명 스마트폰은 인간의 삶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그 ‘조용한 시간’에 나는 나의 정념과 조우하는 법을, 그 번뇌를 흘려보내는 법을 배우는 대신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었다. 전 세계와 접속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통해 그 정보와 이미지들에 중독되어 계속 나를 소외시키고, 스스로를 정념과 조우하지도 못하는 무능력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1초로 할 수 있는 일? 다운로드 받는 시간 보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이 음악은 잘 들었고, 다운 받은 책은 잘 읽고 있는지...


세상만사 그렇듯이, 결국 공짜는 없다. 자본주의가 피와 살육으로 얼룩진 “원시적 축적”을 통해 탄생했듯이 디지털 혁명 또한 몸의 소외와 생명력의 박탈이라는 가혹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이제 와서 거꾸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 ‘반생명적’ 흐름을 넋 놓고 따라간다는 건 실로 ‘스투피드한’ 짓이다. 적어도 끊임없이 “혁신”을 외쳐 대는 스마트폰의 진군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바보야, 문제는 몸이야!”

- 『몸과 인문학』 15쪽


그렇다고, 18세기 영국에서 방직기를 부수던 것처럼 스마트폰을 던져 버리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스마트폰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삶은 더 편리해지고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그렇다고 게임이나 쇼비지니스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모두 무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내가 주로 스마트폰을 통해 ‘소비’하고 있는 분야가 위 분야들이다. 다른 말로 게임과 덕질이라고 할 수 있다. '입덕'한 연예인의 데뷔 전후부터 지금까지의 전사를 훑어보는 일을 하는 동안에 '몰입'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충분히 즐겁고 위안이 되는 일에는 그만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편리한, 그 충분한 즐거움으로 나를 소외시키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다. 나는 스마트폰의 이미지와 정보에 중독되어 그 정념과 번뇌를 마주하지 못하고 도피하고 있는 동안 살이 4kg이나 쪘다. 살이 먼저 찐 것인지, 아니면 도피가 먼저였는지 알 수는 없다. 실은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는 않다. 계속 재생산되는 망상에서 도망치기 위해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지도 않은 필요를 만들어내는 중독 같은 상태에 내가 빠져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몸을 쓰면 마음이 쉬고, 몸을 쓰지 않으면 마음이 바쁘다. 이에 비춘다면, 우리 시대는 그야말로 '칠정상의 시대'다. 거의 모든 직업이 예전의 귀족만큼도 몸을 쓰지 않는다. 당연히 망상이 그치질 않는다. 망상은 잡념이고, 잡념은 온갖 병증을 불러온다. 불면증,편집증, 강박증 등등. 이 모든 것을 한방에 해결해 주는 방법이 하나있다. '걷기'가 바로 그것이다. … 몸은 다소 힘들지만 마음은 그때 비로소 쉬게 된다. 마음이 쉬면 잡념 아닌 성찰이 시작되고, 또 그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과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게 바로 '정신줄을 잡았'을 때의 삶의 모습이다.

- 『몸과 인문학』199 ~ 202쪽


그렇다면 '내가 나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쥐고 덕질에 집중하지 않을 때는 언제일까. 위 글을 읽으면 과연 그런 순간이 있기나 할까 싶지만, 다행히 제법 있다. 주말에 시간을 내서 밀린 청소와 빨래를 할 때, 두 개의 세미나 준비를 하는 동안, 매일 저녁 샤워 전 스트레칭을 할 때는 주위가 조용해져도, 꼭 무언가 보고 듣고 있지 않아도 별로 불안하지 않다. 모두 몸을 쓰고 있을때다!(다 알고 있겠지만, 공부도 몸을 써야 한다.) 사실 정념도 번뇌도 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몸과 인문학』)다. 너무 먼 곳에서 해법을 찾아 해맬 생각은 말자. 해법은 몸에 있다!


『루드비코의 만화일기』시즌 2 16화 중. 작가 역시 『미생』의 저 말에 감화받아 체력의 중요성에 대해서 깨닫지만... 결국 운동을 관둔다.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원대한 해법을 찾으려 하는 것보다 꾸준하게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 10점
고미숙 지음/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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