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은 말한다, "학문이란 별다른 게 아니"라고,
박노해는 말한다, "얼마든지 아름답게 할" 수 있다고!
세상에 직업을 계획적으로 갖게 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내 주변만을 보자면 어쩌다 지금의 업을 갖게 된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니까, 이른바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시험을 준비하거나 뭔가 대학원 같은 곳에 가서 공부를 더 해보고 싶었거나 (드물게) 몸 쓰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엉뚱하게 지금 자기의 책상에 붙박이게 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자신의 일이 맘에 들건 안 들건 '우연히' 지금 그 자리에 있게 되었을 거다.(살아 보니, 삶은 정말 계획 세운 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더라. 물론 그렇다고 계획이 쓸모없다는 말은 아니고. 쩝.)
하는 일이 '출판업'이다 보니 그런지, 또 우연히 함께 하게 된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수가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다며 이 업을 떠났다. 이 직업이 늘 '공부'하는 일이라 좋다고 생각해 왔던 나는 '공부'를 위해 떠난다는 게 처음에는 좀 의아했던 것 같다(대학원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전문 분야를 가지고 논문을 쓰는 것만이 공부가 아니라는 걸 가장 잘 알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걸 위해 떠나다니, 라는 게 당시의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도, 출판은 뭔가 글과 가까이 지내는 직업이니까 그런 것이고, 전혀 글과 무관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따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어느 날 TV에서 수십 년 구두를 닦고 수선해 온 분께서 어떤 철학자의 책에서 읽었던 듯한 말을 본인 삶의 언어로 말씀하실 때 깜짝 놀랐던 것이리라. 그때부터 어렴풋이 그것이 무엇이든, 한 가지 일을 마음을 다해 진력으로 수십 년을 끊임없이 한다면, 그것이 공부고, 그 과정에 겪어 낸 숱한 어려움이 수행이고, 결국 그 사람은 대석학과 다를 바 없어진다는 걸 깨닫게 되어 갔다.
〔아버지는〕 학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문이란 별다른 게 아니다. 한 가지를 하더라도 분명하게 하고, 집을 한 채 짓더라도 제대로 지으며, 그릇을 하나 만들더라도 규모 있게 만들고, 물건을 하나 감식하더라도 식견을 갖추는 것, 이것이 모두 학문의 일단이다."
(박종채, 『나의 아버지 박지원』, 박희병 옮김, 돌베개, 1998, 229쪽)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똑같은 이 일을 하는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제각기 생김과 말투가 다르듯이 일하는 본새('일투'라고 할 수 있을까?)도 제각각임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나처럼 하지 않으면 이상해 보이고 그 낯섦이 못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아무튼, 진력하는 사람은 결국 어떻게든 티가 나더라. 그가 한 일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한 일과는 당연히 결과물이 성공적인 경우가 많고, 오히려 그보다 더 티가 나는 것은 결과물이 성공적이지 않은 경우다. 분명 실패한 것인데도, 뭐랄까, 거기에는 어떤 '아름다움' 같은 것이 있다.
박노해 시인이 「그렇게 내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라는 시에서
사랑도 노동도 혁명도
얼마든지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것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힘들어도 詩心(시심)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괴로워도 성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고 한 구절을 연상시키듯, 그것이 무언가를 치우는 일이든, 만드는 일이든, 부수는 일이든, 경영하는 일이든, 아름답게 해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일의 유형도 지식의 양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들의 시선이나 인정은 더더욱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일을 공부거리로, 자신의 일터를 수행처로 삼아 그의 삶을 곧 공부로 만들어 버린, 자기 삶의 학자이며 성인(聖人)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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