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길에서 '근대성'을 만나다
어느날 문득, 집 근처에 근대에 관련된 건물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역사박물관, 정동길,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등등. 그런데 의외로 그 건물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근대라고 하면 대략 100년전에서 지금까지에 이르는 비교적 가까운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가끔 1920~30년대에 활동했던 문인이나 예술가의 사진을 보면서 '와~ 지금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네'라고 생각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르다는 전제가 깔려있던 탓이다.
그런데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보면,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이 활동했던 시기와 지금 삶의 스타일은 큰 차이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는 공통의 감각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방에서 차를 마시던 모습이 별다방이나 콩다방과 같은 카페로 바뀌었을 뿐이며, 전차 대신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고 있으며, 미쓰코시 백화점 대신 S 백화점, 혹은 H 백화점에서 신상(품)을 보고 구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물들의 운명은 100여년 동안 꽤 다사다난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서울역사박물관, 덕수궁 중명전,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을 다녀온 체험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면 바로 이 전차 모형이 아닐까. 이 전차 381호는 1930년경에 을지로 방면을 운행했다고 한다. 도시락을 놓고 간 아들을 위해 뛰어간 어머니와 동생들의 모형이 급박한 상황을 연출한다. 여튼 전철은 1899년 5월, 개통식을 한 후 첫 운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전철의 도입은 이 시기에 전기가 도입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전기 없이 살던 시절에서, 전기를 사용하던 시기의 시작점인 셈이다.
전차, 기차는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장할 수 있게 만들었고, 전등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주었다. 전기는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방식의 태도를 만드는 키워드였던 것!
문명과 비문명 사이의 경계는 시간을 얼마나 잘게 쪼개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어떤 태도로 전유하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즉, ‘시간-기계’란 하루를 분 단위로 잘게 쪼개서 잘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시간이 곧 금’이 라는 명제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지금이야 시간이 금이라는 건 온 국민의 상식이지만, 당시로서는 실로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그 때문에, 계몽주의자들은 이 명제를 전파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고미숙, 『계몽의 시대』(출간 예정), 34쪽
지금은 많이 달라진 광화문 대로의 복원 모형이다. 북촌에는 주로 노론들이, 남촌에는 주로 남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서쪽에는 주로 중인들이 거주했다. 어느 동네에 사느냐가 곧 그 사람의 지위(신분)을 말해주는 셈이랄까. 지금도 '북촌 한옥마을'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듯, 예전에도 잘 나가던 사대부들이 살았던 곳이라 하니 묘하게 재미있었다. 안국역 근처에는 헌법재판소가 있다. 이곳이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가 살았던 집터라고 한다. 연암이 탑골공원에서 벗들과 노닐었던 이유 중 하나도 집과 가까웠기 때문이 아닐까. ^^
남촌에는 남인들을 비롯하여 소론, 소북 등 대체로 권력에서 소외된 가난한 선비들이 살았다고 알려져있다. 명례방(명동, 남산동, 회현동 일대)에는 다산이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남촌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었다. 서울역과 가깝기 때문일까? 지금도 여전히 명동 주변은 많은 관광객들이 쇼핑하는 명소가 되었으니, 이 지역은 늘 사람이 북적이는 팔자인가보다.
러시아 공사관, 중명전
조선시대에는 사대문 안이 가장 중요한 장소였지만, 이제 주요 거점은 정동으로 바뀌게 된다. 먼저, 왜 정동이 중요해졌는지를 먼저 짚고 가보자.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전쟁때 파괴되었고, 지금은 하얀색 탑 하나만 복원되어 쓸쓸히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복원 공사를 하면서 밝혀진 사실 하나! 러시아 공사관과 덕수궁 사이에 지하 비밀 통로가 있었다는 점! 덕수궁 중명전은 왜 혼자 떨어져있을까 의아했는데, 알고보니 예전에 비해 그 영역이 축소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계몽기에 중요했던 것은 바로 신문! 정동길 근처에는 많은 신문사가 있다.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신아일보사 등등. 대사관들이 몰려있는 곳이기에 이곳에 드나들고 정보를 수집하려면 가까울수록 좋은게 당연지사. 이 건물들이 이곳에 집중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는 점이 재미있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대한'이라는 이름을 반포한다. 지금 조선호텔 근처에 환구단이 있는데, 둥근 하늘과 모난 땅을 표현한 곳으로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이다. 국기인 태극기도 태극과 건, 곤, 감, 리의 괘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이때까지 전통적인 사상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 숟가락을 얹으며, 소중화(小中華)라 자부하던 조선인데 이제 그러한 과거와 단절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고종의 거처가 덕수궁 중명전으로 바뀌게 된다. 원래는 1897년 황실도서관 수옥헌이었으나, 1904년 덕수궁에 화재가 나면서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이다. 1905년, 중명전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을사조약, 하면 헤이그 특사가 떠오르는 당신! 대단하다! ^^ 그래서 중명전은 을사조약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헤이그 특사 3인방과 그들의 이동경로, 을사조약 문건, 그당시의 신문 기사 등을 볼 수 있다. 사진에서 보이듯 한 나라의 황제가 머무르기에는 소박해도 너~무 소박한 곳이다.
최초의 교회, 최초의 서양식 학교
조선시대에 서학이 들어왔던 경력(!)이 있지만, 이 시기에는 개신교가 들어왔다. 정동교회는 아펜젤러라는 선교사가 한옥 한 채를 구입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897년 현재의 자리에 건립되었다. 선교사들은 교회, 학교, 병원이라는 3종 세트를 1타 3피로 펼쳤는데 그 결과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정동교회에서 시립미술관쪽으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있다. 배재학당은 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인데, 역시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곳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영어 선생님을 지내기도 했고, 나도향, 김소월, 주시경 등이 배재학당 출신이라고 한다. 3층 건물인데, 1~2층은 박물관으로 3층은 세미나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이화박물관을 함께 살펴보면 당시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의 학교 생활을 만날 수 있을 듯하다. 당시 교과서, 졸업앨범, 학생수첩, 성적표, 졸업생 명부 등이 진열되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도 당시의 지리학, 천문학, 세계역사 등의 교과서를 만날 수 있었다.
역사가 기억의 대서사를 통해 국민의 이성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면, 문학은 우리말의 미적 잠재력을 통해 국민의 감성을 촉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더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고 믿어졌다). 그와 더불어 미적이고, 정서적인 글쓰기는 온통 문학이라는 형식으로 수렴되었다. 국어의 지위가 높아가면 갈수록 국어의 미적 잠재력을 총괄하는 문학의 지위 역시 승격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더불어, 문학 이외의 글쓰기는 위축되고, 배제되었다. 에세이건 잡문이건 문학 아닌 글쓰기들이 차지할 공간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물론 근대 계몽기의 경우, 계몽의 열풍 속에서 문학이 독자적 위상을 지니지는 못했다. 문학에 투여된 이미지는 더할 나위 없이 고결했건만, 실제로는 계몽의 도구적 역할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에 이르면 문학은 비로소 근대적 앎의 배치, 그 전면에 나서게 된다. 3·1운동 이후 문맹률이 저하되고, 출판산업이 활기를 띠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를 휩쓴 ‘연애열풍’에 힘입어 독서는 범국민적 취미이자 오락이 되었다. 이 독서의 중심에 문학, 그 중에서도 특히 소설이 있었다. 1920년대 초부터 구소설이나 계몽 기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서구소설이 대량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그 소설들의 주요 테마가 연애인 건 말할 나위도 없다. 소설과 연애 는 그야말로 찰떡궁합이었으므로 소설이 많아질수록 연애 또한 다양해지고, 연애가 다양해질수록 소설 또한 진화하게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소설은 근대적 지식과 매너, 패션 등 문화의 중심이자 첨단을 의미하게 되었다. (위의 책, 224~225쪽)
교회를 제외하고, 다른 건물들은 일부만 복원되었고 또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한양 도성 내에서의 배치와 근대 계몽기의 공간적 배치가 달라졌다는 것을 직접 느끼게 된 점이 재미있었다. 대사관과 신문사가 집중되어 있고, 성당과 교회, 학교, 병원이 모두 근처에 있다는 점을 실감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음 편에서는 근대식 병원 탐방을 나서보려고 하니, 기대해주시라!
* 정동길 근대유산 도보 탐방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이 프로그램을 활용해도 좋을 듯하다. 탐방은 무료이며, 안내 해설은 매주 토, 일요일 13:30에 정동극장 앞에서 집결해 출발한다고 한다. 더 자세한 것은 02-732-7524로 문의하시길.
마케터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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