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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은 지금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다녀와서

by 북드라망 2014. 4. 14.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탐방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다녀왔다. 이곳은 1908년 경성 감옥으로 시작하였고, 1912년 서대문 감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87년 경기도 의왕으로 이전하면서 기존 건물들을 복원하면서 역사관으로 개관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중앙에 있는 전시관에는 이러한 변화의 역사들이  소개되고 있다.



… 우리는 다음의 일반적인 주제를 주목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처벌제도가 신체에 관한 일종의 '정치경제학' 속에서 재정립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제도가 폭력적이거나 피 흘리는 징벌에 호소하지 않는 경우에도, 혹은 감금이나 교정을 행하는 '온건한' 수단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신체이다. 즉, 신체와 그 체력, 체력의 이용성과 온순함, 체력의 배분과 복종이 문제인 것이다.


─푸코, 『감시와 처벌』, 55~56쪽



인상깊었던 것은 수감직후 작성되었던 조사표들이다. 건강진단, 신상조사, 인상과 특징을 조사한 표 등 자세하고 세분화되어 관리되고 있었구나 싶었다. 수감자들의 하루 일과표를 보면서 든 생각도 철저하게 신체를 관리한다는 느낌이었다. 1920~30년대 독립운동으로 인해 잡혀왔던 수감자들의 사진을 벽에 붙여놓았는데, 앳띤 얼굴들도 많았다.



지하에는 취조실과 고문실이 있었다. 고문은 물고문, 날카로운 것으로 손가락을 찌르는 고문, 상자에 넣는 고문 등등이 있었다. 비명과 통곡이 가득했을 곳이라 그런지 전시관에서도 간간히 소리가 나와 깜짝 놀라게 된다. 물론 예전에도 신체형은 있었을 것이다. 사극을 보면 태형을 받는 장면도 나오고, 주리를 틀며 심문하는 장면도 보곤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 만난 고문은 고통을 가하는 방식이 더 극대화되고, 다양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문실을 보면서 '내가 고문을 당한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어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11옥사와 12옥사는 주로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다고 한다. 밖은 초여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옥사 안은 서늘했다. 길게 늘어선 작은 방, 그 위에 간수가 돌아다니며 감시를 했을 터이다. 적은 인원으로 효율적으로 감시 체계를 만드는 것, 이 안에 들어와보니 동선이나 건물이 그 목적에 잘 맞춰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의 나무와 오른쪽의 나무는 한날 한시에 심은 같은 종류라고 한다. 붉은 벽돌 안에 있는 나무는 바깥의 나무에 비해 덜 큰 모습인데, 이곳이 사형장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한이 많이 서려있어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한 거 아닌가, 라는 설명이 써있었지만 벽돌 건물 안이 어두웠기 때문인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될 것 같다. 이곳에서는 당시 사형장의 모습과 시체를 운반하던 통로를 볼 수있다.



사형장쪽에서 바라본 감시초소이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바로 아래 건물은 한센병에 걸린 수감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부채꼴 모양의 격벽장이 바로 내려다보였을 것이다. 격벽장은 수감자들의 운동을 위한 공간이다. 대화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칸막이벽(격벽)을 만들었다고 한다. 격벽장 안에 있는 단상에 오르면, 격벽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여성들만 수감되었던 여옥사이다. 총 8개의 방이 있었고 8번 방에 유관순이 수감되어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독방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늘하고 어두운 느낌은 비슷하게 들었다. 민족감정, 애국은 '일제'라는 뚜렷한 적을 설정할때 보다 효과적으로 생기는 것 같다. 고통스러운 고문과 수감생활, 그 안에서 단연 돋보이는 기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국심이 가득한 영웅들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김구, 안창호, 유관순과 같은 인물은 늘 특별하게 표상되고 있었다. 두려움과 고통에서 이를 초월한 애국지사까지, 이들의 삶을 보며 다시금 '애국의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이 자연스러운(!) 동선이 눈에 보이지 않게 그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족감정이나 애국심이 '나쁘다/좋다'는 이분법은 이 글에서 하고자 이야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만약 그렇게 느껴진다면 글쓴이의 부족함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배경에서 민족주의가 탄생했는지를 '본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배치 위에서, 우리는 다시 사유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오직 부재를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기호— 민족. 이것이 우리의 계보학적 탐사의 작은 결론이었다. 또 그것은 수많은 역설과 딜레마를 내장하고서 등장한 ‘상처투성이’의 초월자였다.

—고미숙, 『계몽의 시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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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근대성 3부작 세트 - 전3권 - 10점
고미숙 지음/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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