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하고 부지런히 하고 부지런히 하면 뚫리고 터지고 풀린다!
나는 뭐든 배우는 걸 좋아하고(기술적인 거라기보다는 책에서 배워서 뭔가에 대해 알게 되는 걸 좋아한다는 의미...^^;;), 또 빠르게 배우는 편이다. 그 다음에 거기에 몰두하기보다는 또 다른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오고 거기에 관련된 책이 쌓인다.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든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걸 알게 되는 기쁨이 훨씬 컸기에 멈추지 않고 책 사이를 돌아다녔다.
내가 유일하게 금방 싫증 내지 않고 꾸준히 한 일이 바로 편집이다. 단지 직업이기 때문이 아니라(직업이었어도 편집이 아니었다면 나는 매번 직업을 바꾸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엔 역시 이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게 너무 재미있었고, 그 다음에 여기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몰두하면 다른 차원의 삶을 만날 수 있다는 걸 ‘편집’을 통해 배웠다. 그리고 아무리 둔하고 재주가 없어도 몰두하면 몇몇의 특별한 재능을 요하는 일들(예술 같은)을 제외하곤 누구나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고미숙 선생님이 같이 생활하는 친구들에게 글을 쓰도록 계속 훈련시키시면서 “공부하고 익히며 글을 쓰면 누구나 저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시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몰두해야 한다. 이 점이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편집일을 하는 많은 후배들을 받았다. 그들을 보면서도 느낀다. 몰두하는 친구는 반드시 자기 삶의 새로운 차원을 맞는다. 몰두하지 않으면서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욕망으로 스스로를 번뇌로 몰아넣고, 그렇기에 동료들에게도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않은 친구는, 제자리를 맴돈다.
다산 정약용의 제자 황상은 다산에게 받은 ‘삼근계’(三勤戒)를 평생 실천했다고 한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면 둔하고 막히고 답답한 것이 다 풀린다”는 말이다. 연원은 이렇다.(이하 내용의 인용은 모두 정민 지음, 『삶을 바꾼 만남 : 다산 정약용과 제자 황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의 유배지에서도 유배온 지 약 1년 만에 작은 서당을 열었다고 한다. 그 중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그 아이를 따로 남겨서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을 했을 때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아이가 황상이다. 1802년의 이 질문은 지금도 무수히 반복되는 질문이다. 나는 공부를 하기에는 너무 둔하다든가, 나는 이 일을 하기에는 재주가 모자라다든가, 혹은 관계에서 융통성이 없다든가 하는. 이 질문에 먼저 다산은 그 반대의 경우들이 어떤지 이야기해 준다.
누군가를 가르쳐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니, 꼭 가르쳐본 일이 없더라도 자기 자신이 민첩하거나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뜨끔할 것이다. 나도 겪은 일들이다. 빨리 알아듣고 재빠른 사람들은 “대충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진중하게 파고들어야 할 때 금방 싫증을 내거나 다 알지 못했는데도 “다 알겠다”며, 자신을 과신, 맹신한 채 자리를 떠난다. 그렇게 자기가 난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것이다. 이어서 다산은 말한다.
부지런하다는 건 다만 열심히 한다는 뜻이 아니리라. 자기 존재를 걸고 몰두하는 것. 그것을 부지런하다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황상은 한시도 스승의 이 가르침을 잊지 않고 평생 실천했다고 한다.
우리는 무임승차에 익숙해져 있다. 누군가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는 것. 그것으로 남들 앞에 그럴 듯해 보이는 것. 실제 모습은 전혀 아닌데 누군가 나를 그렇게 봐주는 것만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시대인 것이다.
공부도 그렇다. 누구나 정보에 소외없이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열려서인지,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책 한권을 빌려 보는 게 너무나 절실하고 소중했던 그런 배움의 열정, 몰두는 찾아보기가 정말 어려워졌다. “~하는 척”과 “스타일”만이 난무하는 것 같지만, 그속에서도 드물게 자기 활동에 공부에 삶에 몰두하는 이들을 만난다. 이런 이들이 만든 결과물을 역시 몰두해서 책으로 내고 알리는 일, 북드라망이, 무엇보다 내 자신이, 사는 내내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이것이다.
편집인
나는 뭐든 배우는 걸 좋아하고(기술적인 거라기보다는 책에서 배워서 뭔가에 대해 알게 되는 걸 좋아한다는 의미...^^;;), 또 빠르게 배우는 편이다. 그 다음에 거기에 몰두하기보다는 또 다른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오고 거기에 관련된 책이 쌓인다.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든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걸 알게 되는 기쁨이 훨씬 컸기에 멈추지 않고 책 사이를 돌아다녔다.
내가 유일하게 금방 싫증 내지 않고 꾸준히 한 일이 바로 편집이다. 단지 직업이기 때문이 아니라(직업이었어도 편집이 아니었다면 나는 매번 직업을 바꾸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엔 역시 이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게 너무 재미있었고, 그 다음에 여기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몰두하면 다른 차원의 삶을 만날 수 있다는 걸 ‘편집’을 통해 배웠다. 그리고 아무리 둔하고 재주가 없어도 몰두하면 몇몇의 특별한 재능을 요하는 일들(예술 같은)을 제외하곤 누구나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고미숙 선생님이 같이 생활하는 친구들에게 글을 쓰도록 계속 훈련시키시면서 “공부하고 익히며 글을 쓰면 누구나 저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시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몰두해야 한다. 이 점이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편집일을 하는 많은 후배들을 받았다. 그들을 보면서도 느낀다. 몰두하는 친구는 반드시 자기 삶의 새로운 차원을 맞는다. 몰두하지 않으면서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욕망으로 스스로를 번뇌로 몰아넣고, 그렇기에 동료들에게도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않은 친구는, 제자리를 맴돈다.
우리 삶을 구원하는 것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구체적인 행동 하나하나다. ─루쉰
다산 정약용의 제자 황상은 다산에게 받은 ‘삼근계’(三勤戒)를 평생 실천했다고 한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면 둔하고 막히고 답답한 것이 다 풀린다”는 말이다. 연원은 이렇다.(이하 내용의 인용은 모두 정민 지음, 『삶을 바꾼 만남 : 다산 정약용과 제자 황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의 유배지에서도 유배온 지 약 1년 만에 작은 서당을 열었다고 한다. 그 중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그 아이를 따로 남겨서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을 했을 때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에게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할 수 있나요?”
이 아이가 황상이다. 1802년의 이 질문은 지금도 무수히 반복되는 질문이다. 나는 공부를 하기에는 너무 둔하다든가, 나는 이 일을 하기에는 재주가 모자라다든가, 혹은 관계에서 융통성이 없다든가 하는. 이 질문에 먼저 다산은 그 반대의 경우들이 어떤지 이야기해 준다.
“배우는 사람은 보통 세 가지의 큰 문제가 있다.
첫째는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가르치면 한 번만 읽고도 바로 외우지. 정작 문제는 제 머리를 믿고 대충 소홀히 넘어가는 데 있다.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지.
둘째,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질문의 의도와 문제의 핵심을 금세 파악해낸다. 바로 알아듣고 글을 빨리 짓는 것은 좋은데, 다만 재주를 못 이겨 들떠 날리는 게 문제다. 자꾸 튀려고만 하고, 진중하고 듬직한 맛이 없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대번에 깨닫지만 투철하지 않고 대충하고 마니까 오래가지 못한다.”
누군가를 가르쳐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니, 꼭 가르쳐본 일이 없더라도 자기 자신이 민첩하거나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뜨끔할 것이다. 나도 겪은 일들이다. 빨리 알아듣고 재빠른 사람들은 “대충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진중하게 파고들어야 할 때 금방 싫증을 내거나 다 알지 못했는데도 “다 알겠다”며, 자신을 과신, 맹신한 채 자리를 떠난다. 그렇게 자기가 난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것이다. 이어서 다산은 말한다.
“내 생각을 말해줄까?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둔하다고 했지? 송곳은 구멍을 쉬 뚫어도 곧 다시 막히고 만다. …… 계속 들이파면 구멍이 뚫리게 되지. 뚫기가 어려워 그렇지 한번 구멍이 뻥 뚫리면 절대로 막히는 법이 없다.
앞뒤가 꼭 막혔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했지? 여름 장마철의 봇물을 보렴. 막힌 물은 답답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빙빙 돈다. 그러다가 농부가 삽을 들어 막힌 봇물을 터뜨리면 그 성대한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단다.
어근버근 답답하다고 했지? 처음에는 누구나 공부가 익지 않아 힘들고 버벅거리고 들쭉날쭉하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꾸준히 연마하면 나중에는 튀어나와 울퉁불퉁하던 것이 반질반질 반반해져서 마침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구멍을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히 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어찌해야 부지런히 할 수 있겠니?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으면 된다.”
부지런하다는 건 다만 열심히 한다는 뜻이 아니리라. 자기 존재를 걸고 몰두하는 것. 그것을 부지런하다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황상은 한시도 스승의 이 가르침을 잊지 않고 평생 실천했다고 한다.
우리는 무임승차에 익숙해져 있다. 누군가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는 것. 그것으로 남들 앞에 그럴 듯해 보이는 것. 실제 모습은 전혀 아닌데 누군가 나를 그렇게 봐주는 것만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시대인 것이다.
공부도 그렇다. 누구나 정보에 소외없이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열려서인지,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책 한권을 빌려 보는 게 너무나 절실하고 소중했던 그런 배움의 열정, 몰두는 찾아보기가 정말 어려워졌다. “~하는 척”과 “스타일”만이 난무하는 것 같지만, 그속에서도 드물게 자기 활동에 공부에 삶에 몰두하는 이들을 만난다. 이런 이들이 만든 결과물을 역시 몰두해서 책으로 내고 알리는 일, 북드라망이, 무엇보다 내 자신이, 사는 내내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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