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힘이 세다
금지된 행위
윈스턴은 빈민가의 한 고물상에서 몰래 노트를 샀다. 오래되어 빛이 바랬지만,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노트는 생산이 중단된 지 40여년 정도 되었기 때문이다. 충동구매는 곧 다른 구매를 불러왔다. 노트에 그냥 볼펜으로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펜촉, 펜대, 잉크까지 모두 구입한 후 그는 비로소 노트를 펼쳐 글을 쓰기 시작한다.
윈스턴이 시작하려는 일은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일기쓰기는 불법이 아니었다. (법이란 게 없으니 불법이란 것도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발각될 경우 사형 아니면 적어도 강제노동 이십오 년 형의 선고를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 그는 손으로 글을 쓰는 일에 익숙지 않았다. 아주 짧은 글 외에는 모든 것을 구술기록기에 불러주는 것이 상례였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펜촉을 잉크에 적시고 잠시 머뭇거렸다. 짜릿한 전율이 뱃속을 훑고 지나갔다. 종이에 글을 쓴다는 것은 결단력이 필요한 중대한 행위였다. 그는 작고 서툰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썼다.
1984년 4월 4일
─조지 오웰, 정희성 옮김, 『1984』 중
단지 날짜만 기록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강한 전율감. 지금의 우리가 볼 때에는 별것 아닌 ‘일기 쓰기’가 이렇게 남다른 결단을 해야 하는 일이 되는 까닭은 『1984』의 배경에서 비롯된다. 윈스턴은 1984년의 오세아니아에 살고 있다. 미국은 1950년대에 아메리카 대륙과 영국, 남부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대륙을 합병하고 여기에는 영국사회당(줄여서 ‘영사’)이 단 하나의 지배 권력으로 자리 잡는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은 유라시아 지역을 통합했고, 이스트 아시아도 하나의 지배층이 권력자의 위치에 오른다. 오세아니아는 소수의 내부 당원, 외부 당원 그리고 인구의 80%정도는 노동자 계급으로 구성된다. 내부 당원은 고급 공무원, 외부 당원은 하급 공무원 정도로 볼 수 있다. 최고의 권력자는 ‘빅 브라더’이다.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지만 누구도 그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그를 알고 있다.
영화 <1984>에서 일기를 쓰는 윈스턴의 모습
윈스턴은 진리부의 외부 당원이다. 그의 주요 업무는 <타임스>의 기사를 당의 명령에 따라 수정하는 것이다. 당에서 만든 ‘신어’(新語)의 규칙에 따라 과거가 되어버린 기사에서 일부 단어들을 삭제하거나 수정한다. 풍요부에서 초콜릿 배급량을 30g에서 25g으로 줄였다는 소식이 전달된다. 그러면 윈스턴은 초콜릿 배급량을 30g으로 늘리겠다는 기존의 <타임스> 기사를 찾는다. 그리고 초콜릿 배급량을 20g에서 25g으로 늘린다는 기사로 바꾼다. 현재에서 과거를 바꾸면, 바뀐 과거로 인해 현재의 공급률은 5g 늘어나게 된다!
이렇게 새로운 기사가 만들어지면, 예전의 기사는 소각해버린다. 그런데 소각되는 것은 기사 뿐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당의 사상을 위배하는 행동을 했다고 치자. 그는 사상경찰에게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되고, 죄를 자백한 후 처형당한다. 사상경찰에게 끌려가는 순간부터 그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진다. 모든 기록이 말소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윈스턴은 ‘일기쓰기’라는 위험천만한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쓰기 시작하면서, 아니 노트를 구입하는 순간부터 자신이 언제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기’라는 행위는 그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오세아니아에는 빅 브라더에 대항하는 혁명 세력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다. 혁명 세력의 수장은 골드스타인이다. 그의 추종자들은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를 알아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 세력이 실제로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이라는 사내가 왠지 혁명 세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느낀다. 일기를 쓰면서 당의 슬로건을 일기에 비판하며, 차츰 머릿속에 사상죄를 품고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너무 열성적이어서 사상경찰의 끄나풀 같던 한 여성이 그에게 몰래 쪽지를 건넨다. 윈스턴은 극도의 공포심을 느꼈다. 자신의 표정에 사상죄가 드러난 것인지 전전긍긍하며 그녀를 돌로 쳐 죽이고 싶다는 증오심까지 품었다. 그들은 열람이 허락된 기사들 외에 다른 것을 읽으면 안 된다. 윈스턴은 감시를 피해 겨우 그 쪽지를 펼쳐보았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을 읽은 그의 경계심은 봉인해제 되었다! 사실, 당에서 금지한 것은 읽기, 쓰기만이 아니었다. 연애, 사랑과 같은 행위도 금지였다. 당에서는 결혼, 자녀계획까지 모두 통제했다. 성행위는 오직 아이를 낳기 위함이고, 그것을 통해 절대로 만족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과 욕망을 ‘증오’라는 하나의 길만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윈스턴에게 대담하게 쪽지를 건넨 그녀의 이름은 줄리아. 겉으로는 열성적인 당원이지만, 남몰래 다른 남자 당원들을 유혹해 그들과 관계 맺으면서 그녀 나름의 ‘정치적 일탈’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행동에 영향 받고 만족감을 느끼며 더욱 가까워진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이 위험행동이 언젠가 들킬 것이며, 사상죄로 잡혀갈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영화 <1984>에 나오는 줄리아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몇 년 전부터 예비된 결과일 뿐이다. 첫 번째 단계는 비밀스러운 데다 모호한 생각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생각을 글로 옮겼지만, 이제는 글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다. 마지막 단계는 애정부에서 일어날 모종의 사건일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결말은 언제나 시작에 포함되어 있게 마련이었다.
윈스턴은 줄리아와 함께 오브라이언에게 찾아가고, 자신들이 사상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골드스타인의 혁명 세력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한다. 어떤 위협이 있어도,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혁명할 것임을 교리문답하면서. 오브라이언은 비밀리에 어떤 책을 전해주겠다며, 그 책은 골드스타인이 쓴 것이니 읽어보라고 권한다. 그 책을 받고 며칠 뒤, 윈스턴은 둘만의 보금자리에서 그 책을 읽기 시작한다. 자신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잘 정리한 정도였지 새로운 것은 전혀 없었다.
그는 아직 궁극적인 비밀은 알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방법’은 이해했지만, ‘이유’는 이해하지 못했다. (…) 그런데 그는 책을 읽고 나서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전보다 더 확실히 깨달았다. 소수파에 속해 있다고 해서, 아니 단 혼자뿐이라 해서 미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진실과 허위가 엄연히 구별되어 있는 터에 전 세계와 대항하면서까지 진실을 고집한다고 할지라도 미친 사람은 아니었다.
얼마 후 사상경찰이 두 사람을 덮쳤다. 보금자리를 빌려주고, 윈스턴에게 노트를 팔았던 골동품상 주인이 사상경찰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감시당하고 있었다. 일탈은 끝났다. 이제 그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할 일만 남았다.
선물이거나 독이거나
당의 통제력은 단순히 언론을 조작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언어 자체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방식은 언어의 사용을 제한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신어는 사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줄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만큼, 어휘 선택을 최소한도로 줄이는 것도 신어의 고안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이 되었다.
인간이 자연에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언어 덕분이다. 대상에 이름을 지정하는 순간, 나와 대상은 다른 존재임을 인식한다. 그 이름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고 사용되면서 특정한 대상을 환기시키는 추상의 힘 또한 발휘된다. 그러나 개별 이름들은 단지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자가 눈앞에 나타났다’와 ‘고양이가 눈앞에 나타났다’고 해보자. 대상이 나타난 사건은 동일하지만 이 두 단어는 우리에게 다른 감각을 전달한다. 사자가 나타났다는 말에는 ‘위험하니 도망치라’는 의미도 함께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전달은 종종 오해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문화, 개인적인 경험의 차이에 따라 뉘앙스와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동시에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역사와 가치판단을 함께 받아들이는 점을 의미한다. 『1984』의 부서 이름을 생각해보자. ‘풍요’부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주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풍요로움은 좋다, 는 가치판단이 선재된 말이다. 그런데 이 부서는 배급량이 매일 줄어든다는 방송만 하는 부서이다. 풍요부의 이름이 역설적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바로 단어 자체에 걸려있는 가치판단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대부분에 이러한 가치판단이 함의되어있다. gift가 선물과 독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 언어는 사유의 공간을 열어준 선물이자 어떤 한계에 갇히게 되는 독인 셈이다.
사유의 공간은 인간의 어떤 부위에 있을까? 요즘 유행하는 뇌과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언어의 저장과 기능을 담당하는 곳은 측두엽, 생각을 통해 행동의 명령을 내리는 곳은 전두엽이다. 이 두 개의 장소에서 발생하는 화학적 결과, 이른바 뉴런들의 ‘협업’이 윈스턴에게 일기를 쓰도록 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연애를 하게 명령한 셈이다. 뇌의 특정 부위 손상으로 특정 행위에 제약이 생긴다는 점은 오늘날의 뇌과학이 밝혀낸 성과이지만 뉴런이 반응하는 길은 여전히 미스테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같은 단어를 공유하면서도, 약간씩 다르게 사용한다. 또한, 단어의 의미를 일부러 바꿔서 쓸 수도 있으며, 어떤 단어들은 자연스럽게 소멸하기도 하고 생성되기도 한다.
‘영사’는 이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단어를 없애면서, 새로운 사전을 제작하고 유포하면서 사유의 길 자체를 끊어버리는 영리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자유, 라는 단어가 없다면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할 때 "나는 무엇을 원한다"라고 말할 것인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곧바로 행동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언어는 사유나 행동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차원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어를 사용하는 한 '사유의 공간'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
신체의 고통과 언어가 사라지는 고통은 다르지 않을듯하다.
권력은 인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서 권력자가 원하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뜯어 맞추는 거라네.
결국 당에서, 빅 브라더가 하고자 했던 최종 심급은 여기에 있었다. 윈스턴은 고문에 못이겨 겉으로는 굴복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자신이 옳다고 믿었다. 고문의 시간이 끝나고, 비쩍 마른 몸이 회복되는 시간도 갖게 된다. 그러나 잠꼬대로 연인 줄리아의 이름을 소리치다 깬 이후 101호실로 끌려간다. 최후의 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01호실에서 그는 자신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것과 대면하게 된다.
“쥐라고! 이 방에 쥐가 있어?”
윈스턴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쥐야 어디에든 있죠.”
줄리아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다시 누우며 말했다.
“합숙소 부엌에도 있어요. 런던의 일부 지역은 아예 쥐들의 세상이 돼버렸어요. 쥐들이 어린애들을 문다는 거 알고 계세요? 정말 문대요. 그런 지역에서는 엄마들이 단 이 분도 어린애를 혼자 놔둘 수가 없대요. 굉장히 큰 갈색 쥐들이 물까 봐서요. 징그럽게도 그 더러운 놈들은 언제고…”
“그만!”
윈스턴이 눈을 꼭 감고 소리를 질렀다.
“어머! 얼굴이 창백해요. 왜 그러세요? 어디 편찮으세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쥐야!”
사실 윈스턴에게 공포는 어두컴컴하지만 알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러나 줄리아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공포가 각인되어버렸다. 윈스턴이 101호실에서 마주했던 것은 쥐였다. 쥐는 그에게 엄청난 강도의 공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실제로 쥐에 물린 경험이 없지만, 쥐가 자신의 코를 물고, 눈알을 파먹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자신을 방어해 줄 다른 몸이 필요했다.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줄리아 뿐이었다. 그가 느꼈던 줄리아에 대한 사랑은 “죽었고, 불타버렸으며, 마비되어 버렸다”. 이 장면을 보면 공포감이나 두려움과 같은 가장 본능적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조차도 언어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결코 언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가슴에 품은 보물, 언어의 방주
12세기에 살았던 수도사 생빅토르의 위그는 책을 읽는 것을 포도 열매를 따먹는 행위로 표현했다. 밭이랑을 따라가며 주렁주렁 열린 낱말들을 맛보고 음미하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지금처럼 띄어쓰기나 문단 나누기 등이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리내어 읽어야만 했다.
위그는 책읽기는 탐색이며 일종의 순례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책읽기는 그의 눈을 비춰 줄 등불을 찾는 행위입니다. 위그의 책을 읽는 동안 저는 그가 성가대석에 앉아 스테인드글라스의 장면이 동트며 드러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낱말에서도 빛이 나옵니다. 낱말에는 황금색 바탕에 그려진 이 시기의 축소 인물상처럼 나름의 광휘가 있기 때문입니다. (…) 위그는 스스로 불이 켜지는 낱말을 제자의 가슴에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학생이 보물을 암기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낱말을 올바른 곳에 도면 히스토리아 안에 짜고 엮어 넣을 수 있습니다. 잘 암기하면 낱말이 의미의 유추 속에서 서로를 밝혀 줍니다.
거인족과 뒤섞인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진노에서 살아남은 것은 모두 노아의 방주 속에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이처럼 책은 방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가슴에 책을 품습니다. 12세기에는 이것을 깨우치는 방법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가슴속에 받아들인 것을 잘 지켜야 그것이 더렵혀지지 않습니다. 붓을 대기 전에 물감이 잘 흡수되도록 가슴의 표면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남긴 붓 자국은 아무도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양피지에 남긴 붓 자국처럼 주머니칼로 파내려 해도 구멍을 내지 않고는 파낼 수 없을 것입니다. 색을 여러 겹으로 입히고 잘 다듬어 반짝반짝 빛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반 일리히,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중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몸 안에 거대한 도서관이 있다면, 하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 꽂혀있는 사전에는 내가 사용하는(사용할 수 있는) 언어들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어떤 자리는 사용하지 않아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 단어는 그 용법이 다양하게 달려있고, 어떤 단어는 아주 간단한 의미만 수록되어 있을 것이다. 언어는 추상적이므로 물질적인 힘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리 몸에 단어들이, 언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물질적이기도 한 것 아닐까.
"가장 큰 불행은 행복한 거 같긴 한데 그것이 누군가의 조종에 의한 것임을 눈치 채게 될 때일 것이다. 노예의 행복─이 지독한 형용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행복에 대해, 삶에 대해 배우고 익혀야 한다." ─고미숙, 『누드 글쓰기』, 31쪽
조지 오웰이 ‘언어’에 대해 이렇게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를 좀 알겠다. 비슷한 이유로 많은 사상가들이 언어를, 개념을 사용하고 발명해내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언어는 현실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현실을 바꾸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현실'이라고 말했지만 소박(?)하게는 한 개인의 삶에도 마찬가지이리라.
만수(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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