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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

다산과 연암, 그리고 형의 여자

by 북드라망 2013. 7. 5.

다산과 연암 그리고 형의 여자



같은 하늘에 떠 있었지만 만날 수 없었던 두 별, 다산과 연암. 이제까지 보셨다시피 참 닮은 점이라고는 없는 둘이었습니다만, (하기야 굳이 둘의 닮은 점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말입니다;;) 가난했다는 점에서는 닮았다고 『두개의 별 두 개의 지도』에서 이야기가 됐었지요? 그럼 가난했다는 것 말고 또 뭐가 없을까 한번 잘 찾아보았더니…… 있네요. 책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유추해 볼 수가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다산에게는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으니 당근 형수도 셋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큰형님에게 시집왔던 큰형수님의 남동생이 이벽이었던 것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벽 등과의 만남을 통해 다산의 집안에 서학의 피바람이 불었던 것도……. 그런데 사돈 관계였던 이벽이랑 다산 형제는 어찌 그리 친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요? 지금 세상에도 사돈형제끼리 친하게 지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듯한데 말입니다. 저는 이벽과 다산의 관계보다도 다산과 형수의 사이가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랬기에 형수의 동생이었던 이벽과도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데요. 다산이 지은 큰형수 묘지명을 보면 더욱 그런 확신이 듭니다(그…그래서 다산&연암의 또다른 공통점은 큰형수와 사이가 돈독했다?^^;;).


네, 다산도 연암처럼 큰형수에 대한 묘지명을 지었습니다. 다산의 큰형수님 역시 연암의 큰형수님만큼이나 억수로 고생을 하셨고(;;) 그래서 다산에게도 매우 특별했던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다산은 (지금 우리 눈으로 볼 때는 조금… 하지만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던) 복잡한 가정사 때문이기도 한데요. 다산에게 형제가 많을 수 있었던 것은 다산의 아버님이 장가를 많이 가셨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흠흠(이러니까 정말 없어 보이네요;;). 큰형 정약현의 생모인 첫번째 부인, 다산과 약전, 약황 형제의 생모인 둘째 부인 해남 윤씨, 그리고 김씨에게 장가를 드셨더랍니다. 다산의 큰형수님은 다산의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실 적에 시집을 왔습니다. 비록 남편의 생모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시어머니인 다산의 어머니와도 잘 지낸 듯합니다. 다산이 자신의 어머니와 큰형수가 저포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던 일화를 추억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런데 다산의 나이 아홉 살, 어머니 해남 윤씨가 세상을 뜹니다. 핏덩이는 아니었지만 그와 다름없는 다산을 돌보는 것은 당연히 큰형수 경주 이씨의 몫. 아, 그런데 다산, 이 어린 양반도 ‘시’ 자 붙은 사람이라고 형수를 골탕 먹이려고 한 것이기라기보다는, 어려서 철이 없을 때이므로 형수에게 애를 마구 먹입니다. 무슨 짓을 했는지 다산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볼까요?


어머님께선 세상을 등지셨다. 그때 약용의 나이가 겨우 아홉 살이었는데, 머리엔 이와 서캐가 바글거리고 얼굴엔 때가 덕지덕지했다. 큰형수는 날마다 빗기고 씻기고 하느라고 애를 쓰셨다. 그러나 약용은 또 약용대로 흔들며 달아나 버리고는 형수 옆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형수는 빗이 담긴 조그만 바구니와 세숫대야를 들고서 가는 곳마다 따라와 어루만지며 사정을 하곤 했다. 달아나 버리면 잡아오고 울면 놀리고 했다. 꾸짖고 놀리고 하는 소리가 뒤섞여서 떠들썩해지곤 했었다. 온 집안이 그 일로 해서 한바탕 웃곤 했는데 모두들 약용을 밉살스러워 했었다.


예법을 중시하던 다산이었지만 어려서는 역시 악동이었나 봅니다(씻기 싫어서 도망다니는 모습이 꼭 <아빠 어디가> ‘이조녁’의 아들 준수 같지 않나요?^^). 그렇긴 해도 열 살 이전에 지은 글을 모아서 책으로 묶을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좀 의외의 모습이기는 하지요? ㅋㅋ 여기서 잠깐 삼천포로 빠지면 어머니 돌아가시고 3년 후에는 새어머니 김씨가 들어와서 다산을 건사하게 되는데 이때도 우리의 다산은 “머리에 서캐와 이가 많고, 또 부스럼이 잘 났다”고 합니다. 형수가 씻기려고 할 때 잘 좀 씻었으면 깨끗한 모습으로 새엄마를 만났을 것을;;. 이때 새어머니 즉 서모 김씨는 스무 살이었다고 하는데(연상연하 8살 차이로 결혼도 할 수 있는 나이차;;;), 결혼과 동시에 다 큰 자식인 다산을 맡아 저렇게 씻기고, 빨래며, 바느질도 다 해주었다고 합니다. 다산이 장가들기 전까지요.      
 

어릴 때는 씻는게 귀찮아서 싫었는데, 정약용도 그랬나봅니다(응?).


다시 다산의 큰형수 이야기로 돌아오면, 다산의 형수는 많이 배웠으나 생활력은 변변찮은 집안 남자들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집니다. 


맏형수는 모습과 성품이 헌걸차서 대장부처럼 늠름하셨고, 녹록하게 잘지 않으셨다. 어머님께서는 돌아가셨고 아버님도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계시니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다. 그러다 보니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고 하는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큰형수 혼자서 이것들을 다 감당하셨는데, 팔찌나 비녀, 패물들을 모두 팔아 변통하시거나, 심지어는 솜도 두지 않은 속바지로 겨울을 나시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집안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었다.


(할아버지는) 관직에 있을 때에 조금도 재산을 늘려서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았으므로 청빈이 뼛속까지 스몄으며, 별세하던 날에 집안에는 단 열 냥의 재산도 남겨둔 것이 없었다. 게다가 해마다 거듭 상을 당했다. 맏형수는 힘을 다하여 그 열 식구를 먹여 살렸으며, 제사를 받들고 손님 접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명문대가의 체면이 손실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미리 준비하고 …… 거르지 않았으며 넉넉지 못한 부엌살림이나마 잔치를 너끈히 치러냈으니, 어찌 이른바 몸이 닳도록 힘을 다하여 죽어서야 그만둔 분이 아니겠는가?


다산과 연암처럼 일평생 마주친 적이 없는 분들이었는데 어쩜 이렇게 두 분의 삶은 닮아 있을까요? 첫번째 인용문은 다산의 큰형수 묘지명이고 두번째 것은 연암의 큰형수 묘지명입니다. “죽어서야 그만”두게 되는 것이 그 시절 ‘큰형수’님들의 운명이었던가 봅니다, 크흑(저도 큰형수라면 큰형순데 저는 이때 안 태어나서 다행……응?).


시어머니 섬기기도 쉽지 않은데
시어머니가 계모면 더욱 어렵네
시아버지 섬기기도 쉽지 않은데
시아버지가 홀아비면 더욱 어렵네
시동생대우하기도 쉽지 않은데
어머니 잃은 시동생이면 더욱 어렵네
어려운 일인데도 잘하셔서 유감이 없으셨으니
이것은 맏형수의 너그러움이었네


정리의 달인답게 다산은 묘지명 말미에 이 짧은 시로 큰형수의 일생을 요약해놓았습니다. 계모 시어머니에, 홀아비 시아버지, 어린 시동생까지 층층시하 사이에서의 삶이 충분히 짐작됩니다. 연암은 요약평 대신 인상깊은 에피소드 하나로 한방을 노립니다. 형수가 병으로 몸져 누워 있자 형수에게 빨리 쾌차해서 함께 연암협으로 가 농사짓고 고기 키우며 삽시다, 하자 형수가 벌떡 일어나 그것은 자신의 오랜 소원이었다며 눈물을 흘렸다는, 그러나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 이렇게 묘지명의 스타일은 달라지만 다산이나 연암이나 형수에 대한 정에는 차이가 없었겠지요? 그럼 다산과 연암 의외의 접점(?)에서, 이만 글을 마칩니다. 형수님들 고생하셨어요, 흑.


 
 _편집자 k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 10점
고미숙 지음/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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