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연암, 그리고 그들의 원수
지난주 일요일(6월 23일) 저녁에 달구경들 하셨는지요? 1년에 열두 번 뜨는 보름달 중 지구에 가장 큰 달, 슈퍼문이 떴다고 뉴스에서 인터넷 검색어에서 난리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저도 보았는데, 참 크고 밝긴 밝습디다. 전엔 달빛, 하면 어쩐지 므흣한 생각이 들었었더랬지요. “달이 참 밝습니다.” 이 말이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던 시절, ‘오늘밤, 안채로 드셔요~ 후후’ 하는 마님들의 암구호였다는 고등학교 국사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꼭꼭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달빛, 하면 연암과 다산이 떠오릅니다(진짜여요!! +.+).
달빛 아래의 백탑청연이나 열하로 가는 길에서도 달빛을 받으며 새로 사귄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연암, 무박나흘의 강행군 끝에 일행들이 모두 곯아떨어진 가운데서도 “이렇게나 달이 밝은데 어찌 마시지 않을 수 있으랴” 하며 술 한잔을 걸치고, 혼자 달빛에 드리운 자기 그림자를 희롱하다가 “이 좋은 달밤에 함께 구경할 사람”이 없음을 아쉬워하며 잠이 들었던 연암 말이어요. 은근하고 애틋한 것이 달빛은 꼭 연암의 친구들 같습니다. 연암의 원수는 삼복의 뙤약볕 같구요(물 사람인 연암을 부글부글 끓여 졸여버리려고 합니다). 다산의 원수들은 구름 같습니다. 우르르 몰려와 달빛(다산의 일간인 정화는 달빛에 비유되기도 합니다!)인 다산을 꽁꽁 숨겨버립니다. 무려 18년 동안이나 말이죠. 오늘은 다산과 연암의 원수들 이야기입니다.
다산의 원수
남인이었던 다산, 그러니 원수는 당연히 노론 그중에서도 벽파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아니 사실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 아니 아니라는 것! 당시 노론벽파의 대표 주자는 심환지! 지난번 정조 편에서 말씀드렸듯이 정조와 심환지는 앙숙일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사실은 그렇고 그런 사이;; 그렇다면 당색이 다른 다산과 심환지는 정조를 가운데 둔 정적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으나 사실 심환지는 다산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손을 내밀어 준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천주교 문제로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등용될 때도 심환지의 강추에 의해서였고, 신유박해 때도 다산의 처지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심환지뿐 아니라 역시 노론벽파였던 이서구 역시도 신유박해 때 다산을 격려했고, 황사영 백서로 다산이 궁지에 몰렸을 때도 그를 구해준 것은 노론벽파 정일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원수는 누구입니까? 놀라지 마셔요. 다산의 원수는 바로 같은 남인이자 함께 공부를 했던 옛친구들이었습니다.
먼저, 이기경. 천주교에 뜻을 함께한 교우였던 이들, 하지만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천주교가 불법화되고 진산사건이 벌어지면서(책의 ‘찾아보기’를 통해 찾아보셔요^^) 이기경의 마음은 천주교로부터 멀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남인내에서 천주교를 계속 믿는 신서파와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가 본격적으로 분화된 것도 이 시점이었지요. 한국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은 혐의를 받을 때마다 표면적으로는 배교를 했는데 이때 이기경에 대한 비난을 퍼붓게 됩니다. 이 여파로 정조에 의해 유배를 당하게 되고 이기경은 이승훈뿐 아니라 그와 가까이 있었던 다산에게까지 원한을 품게 되고 맙니다. 다산은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이기경의 석방에 힘썼지만 이미 이기경의 마음은 저 멀리 떠났고, 그리하여 신유박해가 닥쳤을 때 이기경은 드디어 찬스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이기경의 마음을 딱 한 컷으로 표현해보자면 이런 느낌이죠. "약용과 친구였었지. 그래서 어쩌라고."
앞서 정조가 승하했을 때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다산을 궁지로 몰았고, 신유박해 때 다산이 무혐의 처분을 받자 다산의 막내형 약종에게 극형을 추가함으로써 다산 일가를 폐족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다산과 정약전이 유배형으로 끝내 살아남자 홍희운(홍낙안)은 “천 사람을 죽여도 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거와 같”다며 길길이 뛰었다고 하는데 안타까운 것은 다산이 말하길 이런 사람들이 바로 “모두 내가 옛날 친히 사귀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지요. 흑. 또 이기경은 1810년, 다산에게 해배 찬스가 왔을 때 극구 반대하여 불발시킨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사랑이 깊었던 만큼 미움도 컸던 것일까요? 한때는 천주님 안에서 한 형제였으나 이제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이 사람들…… 이렇게 시절인연이 끝나면 님도 남이 되고 친구도 원수가 되는 것인가 봅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서로 죽고 말아버리는 시절인연의 비극, 흑.
연암의 원수
연암은 정조 즉위 초반 세도가였던 홍국영의 견제를 피해 연암골로 은둔하게 됩니다. 일찌감치 정계진출을 거부했던 연암이었으니 둘이 직접 맞붙을 일도 없었고, 또 친구의 도움으로 재빠르게 피신을 했고, 결정적으로 홍국영의 세도가 막을 내림으로써 연암과 홍국영의 악연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습니다. 진짜 ‘웬수’는 유한준이라는 자였습니다. 연암의 아들 종채는 이 유한준을 “우리 집안의 백 대 원수”라고 했지요. 그만큼 징글징글했습니다.
우선 유한준에 대해 소개하자면, 나름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고 합니다. 육촌형이 유명한 서예가였는데 그 영향이었는지 서화에도 뛰어났다고 하나 입증할 만한 작품은 남아 있지 않고요. 어쨌든 주변에서도 글을 좀 쓴다고 ‘잘한다, 잘한다’ 해주고, 본인이 생각해도 흐뭇한 글솜씨라는 생각이 들어, 패기 있게 연암에게 자신의 문장을 품평해 달라고 합니다. 물론 자신의 글쓰기가 어느 정도인가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연암의 인정이라는 프리미엄을 받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나! 특히 글에 대해서만큼은 ‘짤’없었던 연암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의 문장이 몹시 기이하다 하겠으나, 사물의 명칭이 빌려온 것들이 많고 인용한 전거들이 적절치 못하니 그 점이 옥의 티라 하겠기에 노형을 위하여 아뢰는 바요. 벼슬 이름이나 지명은 남의 것을 빌려 써서는 안되오. 땔나무를 지고 다니면서 소금을 사라고 외친다면, 하루 종일 길에 다녀도 땔나무 한 다발 팔지 못할 것이오.
와~와~와~왕(아;; 이 효과음 글자로는 어떻게 써야 할지;;). 박종채에 따르면 이 편지로 인해 유한준이 연암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한준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자기 문장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계속 편지를 보냈는지 어쨌는지, 아니면 허영기와 자의식이 가득 차 있다 해도 어떻게든 글을 써서 인정을 받아보려 했던 문사의 노력이 가상해서였는지(유한준의 문집에는 연암과 주고받은 편지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정황을 알 수가 없답니다;;) 이후로도 연암은 여덟 통의 편지를 더 보냅니다. 지금의 우리가 보면 괜히 쓸데없는 짓을 했지요. 이런 사람은 자기 혼자 자뻑을 하고 살든 말든 내버려뒀어야 하는 건데(편집자 k, 제 생각입니다;;; 북드라망의 생각이 아니어요;;)…….
아마 유한준의 심정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만...^^;; (추측은 추측일뿐!)
한 다섯번째 편지쯤부터 유한준은 연암의 본격적인 안티로 활동합니다. 연암의 승진을 반대하고 연암이 안의현감을 지내던 시절 오랑캐의 연호를 썼다는 둥의 루머를 퍼트리면서 말이죠. 그런데 꼬투리를 잡은 것도 참 별게 아닌 데다가 이런 걸로 꺾일 연암이 아니고, 여기에 유한준의 분노 게이지는 계속계속 상승을 하고 있던 차에 드디어 찬스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십여 년 전에도 연암을 괴롭혔던 산송(묘지를 쓴 일로 생기는 송사)! 때는 1802년, 연암의 나이 66세. 관직에서도 물러나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연암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를 이장할 계획을 세웁니다. 1767년에 한 차례 산송(자세한 것은 책 49쪽을 보셔요^^)을 겪었기에 신중에 신중을 더하여 묏자리를 택하고 이장을 하였는데, 유한준이 사촌동생을 시켜 묘를 몰래 파내게 합니다.
일전에 받았던 산송 스트레스가 아직도 생생한데,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래도 연암은 참을성 있게 이유가 무엇이냐, 문제가 있으면 판관을 통해 시비를 가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유한준을 달래보지만 돌아온 유한준의 대답은 대박! “나는 ‘파낼 굴’掘 자만 알 뿐이오!” 유한준의 패악이 성해지자 연암은 “이는 사람의 이치를 갖고 다툴 일이 아니구나!” 하며 탄식합니다. 사람 같지 않은 것과 상대해선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유한준은 이때 연암을 자극해서 송사를 벌이고, 연암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정순왕후(경주김씨) 세력을 이용하여 연암을 해치려고 한 것인데, 연암은 물처럼 스르르 그의 의도를 비껴나갑니다. 게다가 멋지게 유한준에게 한방을 먹였지요. “연암의 대책없는 ‘안티’로, 평생 음모와 비방을 일삼은 ‘악플러’로, 무덤을 파낸 ‘도굴자’로”(103쪽) 이름을 남겨주었으니 말입니다(안티와 악플은 함부로 할 게 아니라는 것 아셨죠?^^;). 유한준이 찌질했던 것은 문장으로 생긴 원한을 문장으로 풀지 못하고 엉뚱한 방법으로 복수했다는 데 있습니다. 일 못했던 미스 김(김혜수)이 ‘직장의 신’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건 일을 잘하게 됐기 때문이었다는 거 다들 보셨지요?^^
참,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연암집』에서 볼 수 있는 「창애에게 답함」이라는 편지글 속의 ‘창애’가 유한준입니다. 창애는 유한준의 호라고 하네요. 『연암집』을 보게 되시면 이 히스토리를 꼭 떠올리시면서 연암이 하려고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음미해 보셔요~^^.
_편집자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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