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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의 독국유학기

[현민의 독국 유학기] 두부와 나단

by 북드라망 2025. 3. 18.

두부와 나단


 아래의 쓰여진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시하며, 화자를 나나라는 인물로 칭한다.
  

두부
두부는 나나가 이 곳에서 만나 알게 된 유일한 한국 사람이다. 과거에 어디 하나 엮인 데 없이 말이다. 작년 겨울, 두부는 한국에 가는 동안 방을 맡길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집이 없던 나나는 우연히 두부의 방을 보러 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더 길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아 단기임대는 무산되었지만, 나나는 두부를 놓칠 수가 없었다. 한번 만났지만, 이 맑은 얼굴의 여자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새해를 핑계 삼아 떡국을 먹자고 두부를 집으로 초대하며 인연은 이어지게 되었다.

두부를 볼 때마다 그에겐 어딘가 단단한 마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고생하여 결국엔 이뤄 본 사람. 착하지만 아무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의 느낌. 두부는 독일에서 고생만 했는지 나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며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두부에게는 애인이 있다. 나나보다도 어린 두부가 10살 연상의 사람을 만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아했다. 머리 속에서 빠르게 나이 많은 남자에 대한 편견이 스쳤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두부는 그를 곧 독일에 데려왔다. 한두 번 만난 뒤로 각자 삶이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나나는 그들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두부는 미안하다고, 애인과 함께 만날 수는 없을 거라고 답했다.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 해주겠다고.

장거리 연애를 하던 둘은 1년간 함께 살 계획이었다. 애인은 한국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왔으며 영어도, 독일어도 익숙하지 않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 전공 특성상 바쁜 두부와 분리되지 않는 공간을 공유하며 느낄만한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 그들은 사소한 걸로 싸우기 시작했고 그것이 격해져 애인은 결국 한국행 티켓을 샀다고 했다. 두부에게는 타지에서의 시간이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두부는 버림받는 기분이 들었을 테다. 자신에게 이곳에서의 시간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다 아는 사람이 떠난다는 일은 큰 절망이었을 테다.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모욕했고, 그가 떠난다고 했을 때 스스로 목에 칼까지 대게 되더라 하는 두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나의 마음은 빠르게 아파왔다.

나나는 그럼 이제 둘이 헤어지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부는 예상과는 다른 전개로 나아갔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한 달 뒤 학기가 끝나면 한국에 돌아가는데, 그때 애인과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나는 조금 숙연해졌다. 평소라면 당장 헤어지라는 말을 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나는 상처를 받음에도 남아있게 되는 사랑이 무엇인지 상상해보았다. 상처 앞에서 신중한 사람이 신기했다. 그건 두려움으로부터 온 것일까, 용기로부터 온 것일까? 두려워하다가도 용기가 나고, 용기가 나다가도 두려울 만큼 소중한 관계란 건 무엇일까? 두부는 곧이어 그와의 관계로부터 경험한 것들도 말해주었다. 부모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더,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것처럼 사랑받았다고. 문득 나나는 우리가 어떨 때 우정을 사랑과 구분해 말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강하게 섥혀버린 관계 속의 두부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푸르게 느껴졌다.

 



 
나단
나나는 나단을 2월에 처음 만났다. 그들은 데이팅 앱으로 브로콜리와 선인장 중에 무엇이 더 좋은지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의 식물을 교환하기로 했다. 처음 만난 날 나나는 약속을 잊고 맨 손으로 도착했다. 나단은 코트 주머니 안에서 작은 다육이를 꺼내 보였다. 추운 겨울날 사람이 붐벼 겨우 도착한 세 번째 바에서 그들은 겨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나가 나단을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와 연락한 시간 동안 나나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묻지 않아서였다. 나단의 얼굴도, 나나의 얼굴도 그들이 외국인일 가능성을 다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바가 문을 닫을 때쯤에야 서로에게 물었다. 아, 그래서 너 어디서 왔어?

아르헨티나에서 온 나단의 모국어는 스페인어다. 가끔 나나는 그 애가 못 알아들을 걸 알면서도 한국어로 말했다. 나단은 나나로부터 배운 몇 개의 한국어 표현들로 신기하게 알맞은 대답을 했다. 아니, 응, 안돼, 진짜, 좋아. 가끔은 배운 말들을 혼합시켜 자연스러운 답을 만들어 나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진짜 좋아 혹은 존나 싫어 같은.

나나는 그와 이야기하다 대화가 끊겨 침묵이 이어져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단이 그의 입으로 너와의 침묵은 채워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나단은 정말 낯선 타인이었다. 나와 한평생 다른 곳에서 자라 온 사람에게 스스로가 느끼는 세상의 이상함이나 아름다움을 설명하기란 어려웠다. 나단은 장황해지는 나나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우정이라고도 연애라고도 규정하기 힘든 관계였다. 그래서 소중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처음 만났던 겨울엔 몇 겹의 옷을 껴입었어야 했는데, 시간은 잘 가 어느새 티셔츠 한 장도 벗어내고 싶은 뜨거운 여름이 되었다. 그 사이에 나단의 생일이 있었고, 심통이 나 오래 보지 않았던 시간도 있었다. 어쨌거나 서로를 만나고 있었다. 나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시간은 나나를 나단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나의 집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파티를 했다. 할 때마다 새로운 드라마들이 생겨나는 파티였다. 나나는 나단을 초대했다. 파티는 늘 그렇듯 요란했다. 부엌에서는 팝송이 틀어졌고, 지하에서는 테크노가 흘러나왔다. 이번엔 여자를 걸고 싸우는 사람이나 너무 취한 사람 때문에 앰뷸런스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집안 구석구석에서는 새로운 기묘한 이야기들이 시작되었다. 나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 속을 헤집고 놀았다. 부엌에서 술을 마시다 정원에 나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고, 지하로 내려가 테크노에 시간을 잊고 밤늦게까지 춤을 췄다.

파티 다음 날 아침은 전날의 연장선이다. 느즈막히 일어난 사람들은 정원에 둘러 앉아 아침을 먹으며 파티에서 서로 어떤 걸 보았는지 나누며 웃고 떠든다. 그러던 중 나나의 집 사람 중 한명이 나나에게 말을 꺼냈다. 나나, 나단이 다른 사람과 키스하는 걸 봤어. 그가 네 애인이 아니더래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 곳은 네 파티였어. 걔는 너를 존중하지 않았어. 걔는 쓰레기야. 친구들은 나나를 너무 아껴서 나단을 헐뜯었다. 그냥 차단해버려. 다신 이야기도 하지마. 그 애는 너를 만날 자격 없어. 나나는 정말 모든 게 그런 것만 같았다.

갑자기 나나는 나단이 낯선 타인처럼 느껴졌다. 나나는 나단에게 문자를 보냈다. 사람들이 파티에서 네가 누군가와 키스하는걸 봤다더라. 기억하니? 나단은 답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니야. 내가 너를 존중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나에게도 기분이 좋지 않을거야. 하지만 나도 어느 순간엔 너무 취해서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 내가 네 입장이어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 그것에 대해선 미안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답장이었다. 나나는 기억 못하면 맞는 거 아니냐며 화 내버릴 수도, 모르겠다니 어쩌겠어 하며 넘어갈수도 없었다.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나나와 나단은 날씨가 좋은 날 다시 만나 강가에 앉았다. 서로에게 이 일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었다. 나단을 만나기 전에는 화가 나면서도 쿨한 척하고 싶었고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도 변명하고 싶었다. 눈을 마주치기 어려워 잔디 사이로 시선을 두니 클로버가 보였다. 나나는 클로버는 스페인어로 어떻게 말하냐고 물어보다가 나단에게 스페인어권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어떻게 서로의 출신지를 알아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듣고 있었고, 어느새 그 애의 곱슬머리 사이에 클로버를 꽂아주고 있었다. 몸이 기우는 대로 행동하고 나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이었다.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무엇에도 상관이 없어졌다. 나나는 나단과 함께 잔디 위에 누웠다. 잎사귀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단은 말했다. 나 지금을 즐기고 있어.

나나는 종종 너무나도 자주 바뀌는 자신에 멀미가 났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은 나나의 마음 속에 자꾸만 예외를 만들게 했다. 누군가를 용서해버리고 사랑할 마음이 유난히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상처받는 일은 늘 낯설었다. 사랑은 기대와 상처를 잘 불러 일으키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기대하는 마음이 상처받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기대하지 말라고. 본질을 꿰 뚫는 말이지만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건 존재할 것 같으면서도 본 적이 없었다. 나나는 어느 순간 깨닫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엔 상처받는 마음이 계속 따를 거라고.

그렇다면 계속 기대하자. 계속 상처받자.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사는 게 더 힘드니까. 나나는 또 다시  마음이 열릴 것만 같았다.

 


글_현민(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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