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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의 독국유학기

[현민의 독국유학기] 내가 나여도 되는 공간

by 북드라망 2025. 1. 21.

내가 나여도 되는 공간

  
종종 외국에 나와 사는 여자애들을 보면 비슷한 분위기를 느낀다. 정처 없는 느낌. 집이 어디인지 모르겠어서 떠도는 사람들의 정처 없음을 그들과 나로부터 느낀다.

가족은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나와 친구들의 화두였다. 우리는 만나면 처음엔 웃긴 얘기나 좀 하다가 결국 가족사로 가서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할 것 같은 얼굴들로 끝냈다. 자신의 상처를 바탕삼아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우리의 원가족은 집이었는데, 더 이상 돌아갈 곳은 아니었다. 가족 이야기는 모두가 하나같이 기괴해서 웃겼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처량할 때도 있었다. 도대체 왜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에는 자기 탓을 하기가 가장 쉬웠다. 이제는 그때처럼 가족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게 지겹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핸드폰 녹음기에서 한 시간짜리 녹음 기록을 발견했다. 작년 베를린에서 모였던, 아무도 한국에서 살지 않는 친구들과의 대화였다. 우리는 대안가족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다를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까? 그 대화는 조금 현실적인 느낌으로 끝났다. 원가족에 대한 결핍을 대안가족으로부터 메꿀 수는 없을 거라고.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의 안정과 현재의 혼란과 과거의 결핍은 그대로, 서로 뒤섞이지 않고 영원히 너와 함께 살 거야. 어쩌면 살아가면서 그것을 잘 조율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처 없는 아이들은 필연처럼 비슷한 장소에서 모인다. 예를 들면 퀴어 페스티벌이라던가. 다르게 말하자면, 정상세계에서 이상함을 감지하는 아이들은 이상한 것이 주류가 되는 날에 모인다. 6월은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였다. 내가 사는 뮌헨에서는 6월 24일에 CSD 행사를 했다. CSD는 Christopher Street Day의 약자로 독일을 포함한 여러 유럽지역의 퀴어 페스티벌 명칭이다.

우연히 이 날짜에 맞춰 튀빙엔에 사는 지해, 쾰른에 사는 성은이 뮌헨에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서울 퀴어 페스티벌이 가장 크지만, 독일에서는 6월과 7월에 걸쳐 거의 모든 도시에서 CSD 행사를 한다. 당일 아침 우리는 룸메이트들에게 CSD에 가는지 물으며 간다고 하면 가서 만나자고, 안 간다고 하면 왜 안가냐고(가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독일에는 16개 주가 있다. 그 중 뮌헨이 속한 바이에른 주의 지역별 CSD 행사 날짜표 예를 들면 경기도에서만 25개의 지역에서 퀴어퍼레이드가 있는 것이다. 와웅


점심을 넉넉히 먹고, 선크림도 두 번씩 바르고, 서로의 머리를 땋아준 뒤 집을 나섰다. 퍼레이드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끝나는지는 알았지만, 그 시간에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다. 타고 가던 트램이 고장 나 내렸는데 저 멀리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 엄청난 사람들의 색깔과 몸짓, 노래로 저곳이 우리의 목적지라는 걸 알아차렸다. 순식간에 가슴이 벅찼고 발이 가벼워졌다. 우리 셋은 폴짝폴짝 뛰면서 신호등을 건너 무리에 들어갔다. 야하게 입었을까봐 나시 위에 마지막 자기검열로 걸친 겉옷을 스르륵 벗었다. 그들과 만난 순간부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리를 걸을 때 아시안이라 익숙히 받는 시선을 느낄 수 없었고, 옷과 화장이 너무 튈까봐 걱정하지 않았고, 더 꾸미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과 외국인과 동양인 여자애가 아니었다. 그냥 나는 거기 있었다.

퀴어의 상징인 무지개가 내 몸에 없다는 게 아쉬워지자마자, 한 사람이 무지개 스티커를 길거리에 서 있는 경찰에게 붙여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만 줄 수 있어? 물으니 그는 나에게 한 뭉치를 주었다. 곧장 가슴팍에, 왼쪽 뺨에, 매고 있는 가방에 붙이고 지해와 성은에게도 붙여주었다.

퍼레이드는 엄청나게 길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 어디에 있었을까? 이러다간 진짜 세상이 바뀌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싸우지 않고, 책을 만들지 않고, 설득하지 않아도 이 흐름과 기세로 세상이 바뀌어버릴 수도 있다고. 물론 그것은 누군가들이 무수히 해왔고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겉모습이 특이하면 특이할수록 그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덥썩 안기고, 아무에게나 말을 걸었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어디까지가 우리, 퀴어와 앨라이(Alley, 지지자)들이며 어디서부터가 그들, 우연히 길에 있던 사람들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멈춰 이 행진을 구경하고 있었고 아무도 화나 보이지 않았다. 길에서는 고함을 지르거나 북을 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이 없었다. 최근 서울 퀴어퍼레이드 개최가 서울 시청으로부터 거부된 것과 매번 퀴퍼에 갈 때마다 입구에서 고성방가로 우리를 위협하는 혐오세력을 웃어넘겨야 했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네가 이곳에서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아무도 너를 위협할 수 없어. 네가 남들과 다르게 때문에 차별받을 일은 없어. 이 간단하고 마땅한 말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다양성이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궁금해 왔다. 그건 혼란이나 공포가 아니었고, 부드럽고 편했으며 달고 벅찼다. 언젠가 이런 것에 유난하게 느끼지 않아도 되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고 걸으며 생각했다.

퍼레이드가 끝나는 기점에서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의 팻말을 읽었다.

 

Equality is not like cake. If someone get’s it. you don't get less.
평등함은 다른 사람이 가지면 네가 적게 얻는 케이크 같은 것이 아니다.

Not same but equal.
똑같은 게 아니라 평등함.

Never apologize for who you are.
네가 누구인지에 대해 절대 미안해하지 마.

Max-Planck-Gymnasium
막스 플란크 김나지움



김나지움은 독일에서 4학년부터 12학년이 다니는 중고등학교다. 내가 마지막으로 학교에 속해있을 때 퀴어 퍼레이드에 학교 깃발을 들고 갔다면 인생이 얼마나 피곤해졌을까 싶다. 내가 만난 어떤 어른들은 정말, 그저 차별주의자들에 가까웠다. 다른 건 모두 되는데 퀴어와 페미니즘, 장애, 동물권, 정신병 등에 대해서는 본인들이 떠나온 시대의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왜 어떤 이야기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으나 가장 나중에 도착할까?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차별과 혐오가 그 사람을 두들겨 패는 것뿐인 줄 안다. 하지만 침묵이나 중립 혹은 그들의 한마디도 신체적 폭력만큼이나 유해했다. 지나온 과거에 대해 날 선 질문들이 드는 반면에 지금은 그런 것에 힘을 쏟고 싶지 않다. 이미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은 정말로 괴롭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내 옆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더 집중하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말해주고 싶다. Never apologize for who you are. 절대 사과하지 마. 네 존재에 대해서. 네가 너인 것에 대해서 절대 미안해하지 마.

퍼레이드 중


퍼레이드가 끝나고 오후 2시부터 밤 12시까지 뮌헨 시청 앞에 설치된 메인 스테이지에서는 공연이 이어졌다. 무대 위에는 성별을 예측할 수 없거나 아니면 너무 예측할 수 있거나, 금기된 말들을 장난처럼 노래하는 사람들이 올라왔다. 그들은 대체로 웃겼고, 맨 가슴을 흔들었고, 무대 위에서 서로 입을 맞췄고, 노래가 끝나면 엉덩이로 인사를 했다. 무대 한 켠에는 늘 열정적인 수화 통역사가 있었다. 종종 더우면 무리에서 나가 부스를 한바퀴 돌았다. 그 후에는 내 손에 무지개 팔찌와 깃발, 부채와 선캡, 비눗방울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음란 축제라고 부르는 곳에서 나는 안전함을 느꼈다. 관광객이 365일 붐비는 뮌헨 시청 앞 무대 위의 저 가수가 젖꼭지를 드러내도 괜찮고, 괜찮아야만 하는 일이 나의 생존과도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행사가 끝나는 밤 12시 이후에는 시청 안에서 뒷풀이 파티를 한다고 했다. 시청에서의 퀴어 파티라니 굉장히 구미가 당겼지만, 밤에는 우리 집에서도 파티가 있었기에 9시쯤 돌아갔다.

메인 스테이지 위 공연 가슴에 X자로 밴드만 붙이고 나왔는데 그마저도 공연 중에 뗐다.

퀴어 페스티벌에 왔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퀴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은 퀴어 정체성 만을 가진 이들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나여서 슬펐거나, 종종 싫었거나, 어떨 땐 내가 나인 걸 미안해 본 기억을 가진 몸들. 쫓겨났거나, 탈출했거나, 싸워봤거나, 그러다가 포기해봤거나, 결핍을 채워보려고 사랑을 갈구했거나, 상처가 커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거나 그런 역사를 가진 몸들이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프라이드가 필요해서, 프라이드를 외쳐야만 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 공간에 오게된 이들은 각자의 상처를 발판삼아 서로를  존중한다. 궁극의 고난이 만들어내는 유머와 노래와 춤과 이야기는 차원이 다르게 아름다운 법이다. 이것이 어떤 미래가 될지 아무도 모르고 우리가 과거보다 정녕 낫기는 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겠지만, 나의 몸은 자꾸 그쪽으로 기운다. 

 

셰어 하우스 파티를 퀴어 퍼레이드와 같은 날 했다. 파티 테마는 Gay crop top이었고 현관문 앞에 입장 규칙이 써져 있다.

 

 

글_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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